특집│문학, 정치, 민주주의

 

‘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역서 『단일한 근대성』 『패니와 애니』(공역),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까다로운 ‘문학의 정치’

 

2000년대 말에서 2010년대 초반에 걸친 ‘문학의 정치’ 논의는 당시 금기까지는 아니라도 추문으로 취급받던 문학과 정치의 결합을 당당히 선언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참신성이 의아할 만큼 그 이래 정치성이나 사회성은 당연한 듯 한국문학의 뚜렷하고 우세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 「기생충」(2019)이나 최근 공개된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의 글로벌한 성공을 감안하면 이 특징은 비단 문학만이 아니라 이른바 K-문화의 한 변별성이라 말할 수조차 있을 것 같다. 여기에 같은 기간 한국사회를 뒤흔든 여러 ‘사건’의 외면할 수 없는 위력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2009년의 용산과 2014년의 세월호, 그 견딜 수 없음이 촉발한 촛불혁명이라는 거대한 전환의 요구, 뒤이은 페미니즘 리부트 등 공동체의 정당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방식으로 공동체 자체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실감케 하는 시간이 이어졌고, 숨 돌릴 틈 없이 닥친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실감을 한층 강화했다.

‘감각의 재분배’ 같은 모호한 번역에 편승해 문학의 정치를 언어의 자율성과 감각적 새로움의 문제로 환수하려는 일부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논의가 기댄 자끄 랑씨에르(Jacques Rancière)의 핵심 주장이 ‘누구나’ 또는 ‘어떤 것이든’ 문학의 시민권을 갖는다는 문학적 평등의 발상에 있고, 이것이 정치적 평등과 곧바로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긴밀히 공명한다는 인식이 이루어졌다. 그 영향으로 ‘몫 없는 자의 몫’이라는 표현이나 ‘포함과 배제’라는 구분법, 몫 없음과 배제의 ‘가시화’가 갖는 중요성이 널리 공유되었고, 정치성을 둘러싼 해석 면에서 문학의 정치는 현실정치와 상당 부분 근접하는 듯했다. 권리에서 배제되어 몫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배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려져 있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몫을 돌려놓는 일이 문학에서나 정치에서나 주요하고 심지어 선차적인 민주주의적 의제로 부상했다.

그런데 ‘합당한 몫’이란 ‘포함’의 실행으로 간단히 해소되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포함과 배제가 지나치게 단순한 구분이기 때문이다. ‘포함’이라는 단어는 안과 밖으로 이루어지는 경계를 함축하는데, 가령 시민권이라는 공식 경계가 확실한 국가를 떠올려보자. 국가의 경계 밖으로 배제된 대표적 사례는 난민이고, 이들이 겪는 극심한 곤경은 실제로 일국적 층위나 글로벌한 층위 모두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되었다. 하지만 즉각 국경을 개방하고 시민권을 부여해 이들 모두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지젝(S. Žižek)이 지적했듯이 “내심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가장 위선적인” 제안일지 모른다.1 그 점을 차치하고라도 배제를 향한 비판에는, 국가에 이미 포함된 사람들이 겪고 있으며 간신히 시민권을 획득한 난민들도 조만간 겪으리라 예상되는 (배제 상태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극심한 불평등 문제가 별도로 남는다. 불평등 구조는 ‘포함과 배제’의 프레임으로 온전히 번역되지 않아서 구조의 어디에 위치해야 온전한 ‘포함’이 되는가, 나아가 이 구조에 온전히 포함되는 것이 도대체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들이 비어져 나오는 것이다. 현실이 포함과 배제라는 구분으로 조직화되어 있다고 보는 프레임은 계속해서 새로운 배제를 발굴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포함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접어두는 한에서만 효용이 유지된다.

문학의 시민권이라는 면으로 접근하면 문제는 좀더 복잡해진다. 문학적 재현이라는 ‘몫’을 이제껏 누리지 못한 이들, 나아가 동식물과 사물들까지 담아내려는 노력은 구태여 정치성을 앞세우지 않고도 문학의 지난 역사가 꾸준히 해오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근대 이래의 문학 전반이 ‘포함의 확대’로서의 민주주의적 지향을 품고 있었다 해도 무방하지만, 같은 이유로 이 진술이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의미있는 문학적 질문은 재현 여부만이 아니라 어떤 재현인가에까지 이른다. 문학에서 몫 없는 이들에게 합당한 몫을 부여한다는 것은 몫이 없다는 사실을 꾸준하고 여실하게 재현하는 일일까, 아니면 어떤 다른 종류의 몫을 마련하는 (그럼으로써 몫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만드는) 일일까? 이런 불가피한 질문들에 비추어 보면 ‘포함과 배제’라든지 ‘몫’이라든지 하는 표현, 그리고 그런 것들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민주주의 개념이 정치적으로 다분히 미흡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대목에서 얼핏 1980년대의 문학적 주제들, 특히 ‘민중’을 키워드로 한 여러 논쟁이 떠오르지만,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정치에서도 그사이 다른 요소들이 많이 개입되어왔다. 그 가운데 ‘차이의 정치’ 또는 ‘타자의 정치’가 문학에 미친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포함과 배제라는 프레임이 어쨌든 평등의 정치라는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면, 차이와 타자성에 대한 강조는 ‘존중’의 태도를 거의 절대적 경지에 이르도록 앞세울지언정 평등의 실천으로서의 재현을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재현 불가능성과 알 수 없음에 대한 겸허한 인정이 주된 가치가 되고, 그런 만큼 재현의 정치보다는 재현의 ‘윤리’에 방점이 찍힌다. 그에 따라 재현 대상에 더욱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이 권장되면서 여하한 객관화나 보편화도 타자를 향한 폭력처럼 생각되고 그런 폭력을 미세한 수준까지 감지하고 추적하는 태도가 정치적·윤리적 덕목이 된다. ‘몫이 없는 자’와 ‘타자’라는 범주는 다행스럽게도 양립 가능하고 심지어 중첩되는 듯 보이지만, ‘몫 없음’을 가시화하는 문학과 ‘타자의 알 수 없음’을 존중하는 문학 사이의 거리는 (각각의 한계나 난관과 별도로)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문학의 정치성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서 광범위한 동의를 얻은 반면, 문학의 정치는 한층 수행하기 까다로운 실천이 되었다.

랑씨에르의 논의부터 그랬지만 문학의 정치는 애초에 문학의 ‘이미 그러한’ 역능에 대한 관찰이지 문학에 부과된 규범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본연’의 역능이라 해서 그것을 제대로 실현하려는 의식적 지향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정의를 둘러싼 분투를 포기할 때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와 태도에 집착하는 것처럼, 문학 역시 스스로의 정치성에 대한 탐구와 질문을 접어둔 채 협소하게 규정된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학에 속박당할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현실의 정치가 근본적인 변화를 향한 대담한 기획을 통해 고작 ‘틀리지 않는’ 데 연연하는 한계를 벗어나야 하듯이, 오늘날 문학의 정치는 정치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올바른 듯 보이는 문학적 경향과의 대결에서 강력하게 발동되어야 하리라 본다. 이제 그 대결을 요청하는 몇몇 구체적인 지점들을 살펴보자.

 

 

2. 센티멘털리즘이라는 ‘오차’

 

역사에 대한 해석이 이념적 쟁점이 되고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이 터무니없이 오랜 세월 묻혀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문학의 정치성이 역사로 향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역사기술 자체가 정치적 서사라는 주장이 나오는 한편, 문학적 서사는 자주 역사기술의 성긴 서사가 누락한 것들에 집중함으로써 정치성을 발휘한다.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가 향하는 역사는 4·3과 보도연맹이다. 두 사건 모두 진실은 물론이고 고통과 애도마저 오래 억압되었던 역사로서, 광주의 역사를 탁월하게 서사화한 작가의 눈길이 이 사건들에 닿은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인과처럼 보인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실제로 일종의 후일담처럼 『소년이 온다』(창비 2014)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소설 초입에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화자 경하가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11면)라고 밝힌 대목에서 그 ‘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화자는 눈 덮인 검은 나무들이 묘비로 서 있는 봉분들로 밀물이 몰려오고 묻힌 뼈들이 당장이라도 쓸려갈까 어찌할 바 모르는

  1. 슬라보예 지젝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 김영선 옮김, 글항아리 2016, 59면. 물론 이것이 난민과 이주민의 문제를 방치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젝 자신은 ‘공동의 투쟁’을 제안해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