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이 시대는 어떤 인문학을 요구하는가

 

묻혀버린 질문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영문과 연구교수. 역서로 『도둑맞은 세계화』 『쿠바의 헤밍웨이』 『이런 사랑』 『종속국가 일본』(공역)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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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윤리’그리고 더 최근에는 ‘정치’같은 단어를 매개로 외국이론들은 이제 국내 비평에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한 인상이다. 이론가들의 배경도 다양해졌고 주목받다가 사라지는 주기도 빨라졌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유행하는 이론에 대해‘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냉소도 생긴다. 냉소적 태도를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필경 지나가기 마련인 하나의 이론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경향에 대한 경고로 삼을 법은 하다. 특정 이론을 모르면 논의에 끼지 못하는 사태가 지적 나태함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해당 논의 자체가 이론의 단순 반복인 탓도 있을 것이다. 지금쯤은 오가는 이론들을 차분하게 바라볼 내공이 쌓일 시점이 됐는지 모른다.

어쨌든 이즈음의 비평을 들추다 보면 각종 이론들의 향연처럼 보일 때가 많다. 여전히 강력한 정신분석의 영향으로 분열적 주체와 상징계의 결핍과 실재가 논의되는 사이에 한쪽에서는 사건, 진리, 절대적 타자, 벌거벗은 생명, 환대 같은 개념이 운위되고 또 어느새‘감각적인 것’혹은‘정치적인 것’하는 말들이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양상들이 보기보다 서로 더 깊이 연관되어 있으리란 추측도 해봄직한데, 그 유행의 흐름에서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무르는 뚜렷한 이론적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윤리’이다.

‘윤리’는 지난 몇년간 비평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였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오랜, 익숙한 단어이기도 하다. 새삼‘국민윤리’까지 거슬러가지 않아도, 돌이켜보면 어떤 의미에선 윤리(라는 말)의 과잉을 겪었다고 할 만하다. 흔히 이념의 시대로 지칭되는 1980년대도 많은 이들에게는 윤리적 강박의 시대로 경험되었으며, 그런 측면에 대한 반발로 90년대 이래 또다른 유행어인‘욕망’은 윤리 과잉의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에 대한 재반발인지 어떤지 더 따져볼 일이겠으나 최근의 비평담론에서‘윤리’는 때로‘절대적’이라거나‘무조건적’이라거나 하는, 겉보기에 무시무시하게 억압적인 형용구들을 당당히 동반하면서 한층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윤리’와 관련해서는 한때 유행했던‘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는 말을 쓰고 싶게 만드는 묘한 이중적 태도가 있는 듯하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윤리의 억압성에 대한 반발이 있고, 다른 한편에선 유례없이 강력한 위상을 부여받은 윤리가 거론되는 것이다. 이런 모호한 공존 양상이‘윤리’이론의 범람을 더 흥미로운 상황으로 만들어주는지 모른다.

실상 우리 비평계에서‘윤리’의 출현은 해당 주제를 내세운 외국이론의 도입에 크게 영향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윤리’의 유행 이전이든 이후든‘언제나 이미’외국이론들의 존재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 유행을 두고 자생적 필요 따로, 수입 이론의 영향 따로, 이렇게 구별하는 일은 거의 무의미할 것이다. 이념 혹은 거대담론의 종말과 해체, 욕망의 분석, 윤리와 정치담론의 재조명 같은 대체적인 수순이 외국 학계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다면 그 현상은 나날이 동질화되는 현실세계의 경험과 그 경험이 만들어내는 요구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 글에서는‘윤리’와 관련하여 최근 많이 거론되는 두 외국 이론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국내 비평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가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미리 밝혀두자면 왕성하게 활동중인 이들의 진면목이나 사상사적 중요성을 짚어낼 능력은 없고 국내 비평으로 수용된 부분을 중심으로 논의할 테지만, 이‘수용’만 하더라도 정색하고 접근하기가 애매한 면이 있다. 특정 이론가의 주장에 전반적으로 기댄 것이 분명한데도 인용임을 표시하지 않고 이제는 상식이 되었다는 투로 전제하거나, 이론의 문맥과 관련 없이 다분히 수사적인 차원에서 활용한 사례가 많은 것이다. 그같은 수용방식에도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이론가들을 본격적으로 인용하고 논평한 (따라서 좁은 의미의 문학비평이 아니라 인문학 담론 성격이 더 강한) 몇몇 글에 국한하겠다. 그것도 수용 사례에 대한 세세한 개별 점검보다는 이들 이론가의 중요한 주장인데도 국내 비평에서는 ‘묻혀버린’ 부분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그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데 목적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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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어떤 암묵적 의도 혹은 어떤‘정치적 무의식’이 작용했는가를 떠나 윤리를 논한 비평들이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배경이자 윤리가 시급히 요청되고 실현되어야 할 근거로 거론되는 개념은‘타자’이다. 이때‘타자’는 대개 이방인 혹은 외국인이라는 구체적인 이름과 짝지어지며,‘타자’가 어떤 성격이며 어떤 종류의 윤리를 요구하는가를 논하는 지점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론가가 바디우이다.

윤리론을 적극 개진하는 비평에서 바디우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그가 『윤리학』(L’Éthique)의 저자이기는 하지만 서문에서 공공연히 표명하듯이 이 책은 윤리가 중심무대로 등장하게 된 현재의 “윤리로의 회귀”1 현상을 비판하는 일을 한 축으로 삼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 현상을 더이상 사회혁명을 희망하지 못하고 집단적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정치용어를 모색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무능함과 일정하게 연관시키는데, 그들의 무능함이 추상적이고 보수적이며 서구중심적인 자유주의 인권론과 그 근거인 보편적 인간 주체 같은 개념에 굴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11~12면). 그런데 바디우의 비판에서 또 하나의 주된 표적은 “일종의 윤리적 급진주의”(27면)인 레비나스(E. Levinas)의 타자 혹은 차이의 윤리이다. 그가 보건대 타자의 윤리란 타자의 윤리적 우선성에 기반하고 이는 다시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타자성을 담보로 요구하는데, 그같은 절대적 타자성은 결국 종교에 다름아니다. 바디우는 타자와 차이의 윤리가 현실에서는 결국‘나처럼 되어라, 그러면 너의 차이를 존중하겠다’로 귀결된다고 지적한다(34면). 그는 이런‘윤리 이데올로기’들이 (인간이니 권리니 타자니 하는) 추상적 범주에 기댈 뿐 어떤 적극적인 것에도 기반을 두지 못한 탓에 현존 질서를 추인하거나 심지어‘무’와 죽음을 열망하는 허무주의에 빠진다고 판단하면서, 윤리는 오로지 진리와 관련하여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 선언한다(38면).

여기서 바디우를 매개로 윤리론을 펼치는 비평을 한번 들여다보자. 김형중(金亨中)은 이방인-타자-윤리라는 구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글2에서 이방인이 “철학에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정치에 있어서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방식에 있어서나 공히 기존의 패러다임 내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제기”(28면)한다는 의미에서 “바디우적인 의미에서의 사건”(29면)이라고 정의하며 바디우를 들여온다. 그는 이런 의미의 이방인이라는 “완전히 다른 타자,‘절대적으로 외부에 있는’타자는‘무조건적인 환대’를 위한 전제조건”이며 이렇듯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이 보장될 때만 환대는 윤리가 된다”고 주장한다(37~38면).

이처럼 바디우에서 출발하여 절대적 타자로 오는 과정의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바디우 자신이‘타자의 윤리’를 누누이 비판한 사실임을 김형중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 양자〔바디우의 진리의 윤리학과 레비나스/데리다의 환대의 윤리학-인용자〕의 대립은 보편과 차이의 대립처럼 보인다. 바디우는 유행과는 달리 차이라는 것, 그리고 그 차이의 담지체로서의 타자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33면)는 점을 일단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같은‘대립’을 규명하는 절차로 나아가는 대신, 이내 “바디우의 진리의 윤리학이 최종적으로는 다시 환대의 윤리학으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35면)는 진술이 뒤따른다. 그리하여 김형중은 바디우가 진리에 대해 “굳어진 의견들 사이에서 사건에 의해, 느닷없이 도래”한다고 말한 대목을 두고 그러니 진리라는 사건은 기존의 것들과 절대적‘차이’를 갖는다는 해석을 적용함으로써, “바디우에게 진리인 것이 레비나스와 데리다에게는 타자이자 이방인”이라고 결론 내린다.(36면)3

이쯤 되면‘진리가 절대적 차이를 갖는다’는 것과‘절대적 차이가 진리이다’는 진술 사이의 논리적 비약을 무릅쓰면서 왜 구태여 바디우를 동원했을까 의아해진다. 여기서 실질적으로 바디우가 기존의 것들을 뒤흔드는 타자의‘절대성’과 환대의‘무조건성’을 한층 강조하기 위한 수사 이상의 역할을 하는지 의문이다. 실상 바디우가 말하는‘사건으로서의 진리’또는‘진리의 사건성’이라는 개념은 바디우를 인용하는 비평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한다. 바디우는 사건으로서의 진리가 이미 확립되고 승

  1.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 8면.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대체로 국역본에 근거하되 필요한 경우 영역본을 참고한다. 이하 괄호 안에 제목과 면수만 표기한다.
  2. 김형중 「사건으로서의 이방인:‘윤리’에 관한 단상들」, 『문학들』 2008년 겨울호.
  3. 김형중의 글 후반부는 어떤 것이 되었든 윤리 담론을 문학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으며 문학은 “이방인이라는 사건에 대해 문학적인 방식으로 충실해야 한다”(50면)는 주장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바디우와 관련된 논의에 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