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미국과 세계: 메타포로서의 쌍둥이빌딩1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년생. 현재 예일대학 사회학 교수 겸 페르낭 브로델 쎈터 소장. 속간중인 『근대 세계체제』(1~3권 간행)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유토피스틱스』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등 수많은 저서와 논문이 있음. 본지 109호(2000 가을)에 「인종차별주의, 근대의 쌍생아–––오스트리아 새 정부의 출범을 지켜보며」를 발표. 이 글의 원문은 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의 홈페이지(http://www.ssrc.org/sept11/essays/wallerstein.htm)에 실렸으며 원제는 “America and the World: The Twin Towers as Metaphor”임. 말미에 덧붙인 이메일 인터뷰는 월러스틴의 논문을 보완하고 최근 그의 견해를 들어보기 위해 기획된 것임.

ⓒ I. Wallerstein 2001 / 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2

 

 

1. 아름다운 미국

 

아 아름다운 애국자의 꿈, 여러해가 지나도 그대 희고 보드라운 도시들이 빛남을 보네, 인간의 눈물로 흐려지지 않은 채! 미국이여! 미국이여! 신께서 그대에게 은총을 내려 그대의 선함 위에 형제애의 왕관을 씌우시길, 이 바다에서 저 빛나는 바다에까지!

—「아름다운 미국」(America the Beautiful, 애창되는 미국 찬가––옮긴이)

 

1990년 10월 24일 나는 버몬트대학 200주년 기념 저명인사 강연 씨리즈의 첫번째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나는 그 강연의 제목을 “미국과 세계: 오늘, 어제, 그리고 내일”2이라고 붙였다. 그 강연에서 나는 미국에 대한 신의 축복을—현재에는 번영을, 과거에는 자유를, 미래에는 평등을—논했다. 왠지 몰라도 신은 이런 축복을 모든 곳의 어느 누구한테나 나누어주지 않았다. 나는 미국인들이 신의 은총의 이런 불평등한 분배를 매우 의식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나는 미국이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의 축복을 측량하는 데 항상 세계를 척도로 삼아왔다고 말했다. 우리가 더 낫다느니, 우리가 더 나았다느니, 우리가 더 나을 것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쩌면 보편적인 축복이란 진정한 축복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신에게 오로지 소수만을 구원해달라고 강요하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대다수를 흔들어놓은 사건, 즉 일단의 개인들이 2001년 9월 11일 쌍둥이빌딩을 파괴한 사건의 그늘 아래 살고 있다. 그 개인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미국에 대한 도덕적 분노에 너무나 헌신적이라서 미국과 미국의 지지자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지정학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 여러해 동안 방법을 모색해왔으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이 일을 수행했다. 대다수 미국인은 이 사건에 깊은 분노와 애국적인 결의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상당한 당혹감도 계속 갖고 있었다. 당혹감은 두 가지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것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당혹감은 엄청난 불확실성으로 장식되었으니, 그런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아니 일어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대두된 것이다.

11년 전에 내가 한 말을 돌이켜보면, 그때 한 말 가운데 어느 것도 바꾸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강연할 때의 자세에 대해서는 약간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마치 다른 어떤 곳에서, 이를테면 화성에서 온 민속학자인 양, 이 ‘미국인’이라는 흥미로운 종족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글을 썼던 것이다. 오늘 나는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분명 한 인간이며, 인류의 운명을 걱정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미국의 한 시민이다.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내 삶의 대부분을 살았다. 그러니 나는 나와 입장을 같이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여기서 일어난 일과 여기서 일어날 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국을 내부에서부터 봐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미국과 세계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인들이 세계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신을 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인들이 세계를 어떻게 보아왔는지, 미국인들이 이곳 내부에서부터 세계를 어떻게 보기를 원하는지 살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점에서 상당히 논쟁적인 입지에 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20세기 미국 대통령 가운데 어느 싯점에서든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고 선언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도처에 널려 있는 미국의 여론조사기관들이 우리의 공중에게 이 질문을 직접 한 적이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런 선언에 동의할 미국인들이 매우 많다고 믿는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런 선언이 우리와 매우 다른 문화를 가진 가난한 나라 출신의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우리의 가까운 우방과 동맹국—캐나다인, 영국인, 그리고 물론 프랑스인—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숙고하기를 요청한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로, 대영제국보다 더 위대한 나라로 생각할까? 그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런 생각을 할까? 미국인들과 미국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누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

국가주의가 물론 미국 사람들한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거의 모든 나라의 시민들이 애국적이며 종종 국수주의적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이 이를 의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를 희망하고 있고 다른 어떤 이민의 장소도 미국만큼 인기가 높은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 눈여겨보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사실을 하나의 국가로서 미국의 우월한 미덕에 대한 그들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우월한 미덕이 어디에 있다고 여기는 걸까? 나는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을 타자들이 갖고 있으며, 우리가 더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은총의 표시라고 믿는 경향이 미국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덜함의 개념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많은 경쟁의 장들을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아주 확신하는 듯한 바로 그 경쟁의 장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들이 덜 근대적이라고 믿는데, 이때의 근대는 과학기술의 발전 수준을 의미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학기술은 이 나라 곳곳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기계·전자 장치, 통신·교통의 네트워크, 이 나라의 기간시설, 우주탐사 기구들, 그리고 물론 우리 군대가 사용하는 군사적 하드웨어 등에 들어 있다. 과학기술이 이렇게 축적된 결과, 미국인들은 미국에서의 삶이 좀더 편안하고, 미국제품이 세계시장에서 좀더 성공적인 경쟁력을 지니며, 따라서 타자들이 우리를 끌어들인 전쟁에서 우리가 분명히 승리할 수 있다고 여긴다.

미국인들은 또한 자신의 사회가 좀더 효율적이라고 여긴다. 직장, 공공영역, 사회적 관계, 관료와의 대면에서 일이 좀더 원활하게 운영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관행들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불만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다른 곳을 돌아다녀보면 타자들은 일을 그렇게 잘 운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는 듯하다. 타자들은 미국인의 적극성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크고작은 문제들의 해결책을 발견하는 데서 덜 창의적이다. 미국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그들은 전통적이거나 공식적인 방식의 수렁에 빠져 정체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이들—나이지리아인, 일본인, 이딸리아인—에게 어떻게 하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지 우정어린 충고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다. 타자들이 미국적 방식을 열심히 모방하는 것은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평가할 때 큰 가산점이 된다. 대니얼 분(Daniel Boone, 1734~1820, 미국 초창기의 전설적인 서부개척자–옮긴이)에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을 더한 것이 타국의 정치경제를 비교, 평가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 미국인들이 타자들의 덜함을 단지 물질적인 것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 덜함은 정신적이기도 한 것이다. 혹시 정신적이라는 용어가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을 배제하는 것 같다면, 그것이 문화적이기도 하다라고 표현해도 좋다. 우리 대통령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듯, 우리의 애국적 노래들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듯, 미국은 자유의 땅인 것이다. 타자들은 우리보다 덜 자유롭다. 자유의 여신상은 “자유를 숨쉬고자 열망하는 온갖 잡다한 대중들”에게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밀도있는 자유는 수많은 방식으로 가시화된다. 다른 어떤 나라가 권리장전을 가지고 있는가? 다른 어느 곳에서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연설의 자유가 그토록 존중되는가? 다른 어느 곳에서 이민들이 정치체제 속에 그토록 통합되어 있는가? 이곳에 십대에 와서 오늘날까지 강렬한 독일식 액센트의 영어를 하는 사람이 전세계에 대해 미국인들의 제1대표자라 할 국무장관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미국말고 또 있는가?(전임 국무장관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를 가리킴–옮긴이)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 사회적 이동성이 그토록 높은 나라가 또 있는가? 그리고 민주주의의 실현 정도에서 어떤 나라가 우리와 경쟁할 수 있을까? 양당제의 핵심이라는 정치구조의 지속적인 개방성뿐 아니라 일상적인 관습에서도 우리만큼 민주주의적일 수 있을까? 미국은 일상적 삶의 관행에서 특권을 지닌 사람이 우선권을 갖는 체제와 반대되는 ‘선착순’의 원리를 유지하는 데 빼어난 나라가 아니던가? 그리고 공공영역에서나 사회생활에서 이런 민주적인 습속이 400년 전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200년 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나라가 아닌가?

도가니(melting pot)에서 다문화성(multiculturality)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실제 미국인의 삶에서—식당에서, 대학에서, 정치적 지도층에서—의 놀라운 종족적 혼합을 자랑스러워해왔다. 그렇다, 우리에게도 결함은 있었지만, 그런 결함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데 우리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노력을 했다. 지난 몇십년 동안 성과 인종의 장애들을 허물어뜨리고, 완벽한 실력주의 사회를 끊임없이 새로 모색하는 데, 우리가 선두에서 이끌지 않았던가? 심지어 우리의 항의운동조차 우리에게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있지 않는가? 다른 어디에서 항의운동이 이렇게 지속적이고 다양하고 정당하단 말인가?

그리고 1945년까지는 우리가 세계의 전위가 아니라고 시인하던 단 하나의 각축장, 즉 고급문화의 각축장에서도 이제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는가? 뉴욕이 오늘날 미술·연극·음악·무용·오페라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아닌가? 우리의 영화가 너무도 뛰어나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관객들이 우리 영화를 더 많이 보지 못하도록 보호주의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미국인들이 적어도 9·11 이전에는 별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에서는 중하게 생각하는 하나의 구절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의 나머지보다 더욱 문명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나머지 지역을 예전에는 경멸의 표시로 구세계(the Old World)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그냥 미국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가장 높은 열망을 대변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이고, 타자들은 우리가 지도력을 보여주기를, 자유의 기치와 문명의 기치를 높이 쳐들기를 기대하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세계의 지도자이다.

나는 이 가운데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이러니컬하게 말하지 않았다. 나의 제시에 당혹해하면서 자기들은 그런 합의에 동조한 것이 아니며 자기들의 관점은 그것보다는 한결 코스모폴리탄적이라고 주장할 사람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나는 나머지 세계의 덜함이라는 이미지가 미국인의 정신 속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쌍둥이빌딩이 완벽한 메타포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무제한적인 열망의 신호였고, 과학기술적 성취의 신호였으며, 세상의 횃불을 나타냈다.

 

 

2. 미국에 대한 공격

 

미국이 오늘날 맛보는 것은 우리가 수십년 동안 맛보아온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다. 우리 민족은 80년 이상이나 이런 수모와 경멸을 맛보아왔다. (…) 그러나 80년이 지난 후, 정작 미국에 칼이 떨어진 경우에는 위선이 그 추악한 고개를 치켜들고, 이슬람교도의 피와 명예와 성지를 함부로 더럽힌 이런 살인자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최소한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타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 2001년 10월 7일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Raden)은 미국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다수 미국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도 일부 존재한다. 우리는 미국의 문화적 우파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미국의 문화적 우파의 비판과 오사마 빈 라덴의 비판이 일상적인 습속과 관련해서는 어느정도 겹치긴 하지만, 빈 라덴의 근본적 비난은 그가 세계의 각축장에서의 미국의 위선이라 일컬은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세계의 각축장에서 미국에 관해 논할 때 이런 특징 묘사에 동의할 미국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며, 빈 라덴과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할 법한 사람들조차, 빈 라덴이 보기엔 부적절하고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런 견해와 미묘한 차이를 두려 할 것이다.

이것이 미국인들에게는 9·11의 두 가지 큰 충격 가운데 하나였다. 세계의 각축장에서 미국의 행동과 동기에 어떤 선

  1. 2001년 12월 5일 브루클린대학에서 행한 Charles R. Lawrence II Memorial Lecture의 강연원고.
  2. Theory and Society, 21권 1호(1992년 2월), 1~28면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