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미국의 공위시대(空位時代)

 

 

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정치철학자, 미국 뉴스쿨 교수.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전진하는 페미니즘』 등의 저서와 『99% 페미니즘 선언』 『거대한 후퇴』 등의 공저서가 있음.

 

 

* 이 글은 2021년 4월 9일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 블로그 싸이드카(Sidecar)에 게재된 “American Interregnum”을 번역한 것으로, 원문은 newleftreview.org/sidecar에서 볼 수 있다. ⓒNancy Fraser 2021 / 한국어판 ⓒ창비 2021

 

 

코로나19가 불러일으킨 사회, 보건, 경제 위기로부터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추세는 어떤 것이라고 보는가? 팬데믹 이후의 재건 과정이 ‘돌봄의 위기’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앨러산드라 스파노 Alessandra Spano의 질의, 이하 동일)

 

팬데믹과 그에 대한 대응 둘 다 자본주의의 비합리성과 파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돌봄의 위기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미 명백히 존재했지만, 이 전염병에 의해 크게 악화되었다. 말하자면 ‘기저질환’은 금융화된 자본—지난 40년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긴축’이라는 이름의 투자회수를 통해 공적 보살핌의 기반을 점진적으로 침식해온 유별나게 약탈적인 형태의 자본—이었다. 그런데 사실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사회는 돌봄노동에 대한 사업체들의 무임승차를 허용함으로써 작동한다. 인간 생성을 이윤 생성에 종속시킴으로써, 자본주의사회는 사회적 재생산 위기로 치닫는 내재적 경향을 품고 있다.

같은 원리가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에도 작용하는데, 이 위기는 자본이 자연을 수리하거나 채워 넣을 생각 없이 무임승차하는 수법을 가르치고, 그리하여 생태계와 그 생태계가 떠받치는 공동체를 주기적으로 위험에 빠뜨리는 자본주의 심층구조의 동력을 반영한다. 현재의 정치 위기도 마찬가지다. 이 위기는 거대기업, 금융기관, 부유층의 납세 거부에 의한 공권력의 심각한 약화를 반영하며, 그 결과 출구 없는 교착상태와 핵심 기반시설에 대한 저투자를 초래한다. 이런 상황이 신자유주의화에 의해 각별히 첨예화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사회에 내장된 정치적 위기의 경향성을 드러낸다. 돌봄의 위기는 여타의 역기능—생태학적·정치적·인종-민족적—과 떼어낼 수 없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 모든 역기능이 결국 사회질서의 총체적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서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현 시기의 자본이 공권력—팬데믹의 영향을 완화시키는 데 사용될 수도 있었을 집단적 역량—을 집어삼켰다는 사실로 인해 그 영향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 결과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팬데믹에 대한 대응이 저해되었는데, 이는 수십년에 걸친 필수적인 공중보건 기반시설에서의 투자회수의 결과이다. 미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트럼프를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인이다. 투자회수는 수십년간 진행되어왔다.

 

1990년대의 클린턴 행정부가 이 길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렇다. 공화당뿐 아니라 민주당까지 미국의 모든 행정부가 잇달아 필수 공중보건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회수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개인보호장비(PPE), 인공호흡기, 마스크와 같은 필수장비의 비축량을 삭감했고, 극히 중요한 역량—감염 추적, 백신의 비축과 분배—을 고갈시켰고, 연구기관, 공립병원, 중환자실, 정부보건기구 등 중요한 기관들에 자금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또다른 바이러스 전염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과학자들이 경고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래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미국은 철저히 무방비상태였다. 우리는 사실상 감염자 추적을 하지 않았으며, 일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하지 않고 있다. 공중보건 당국은 아예 감염자 추적을 조직할 능력이 없었고, 아직도 그런 역량을 쌓아 올리지 못했다.

이미 미약했던 공적 보살핌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지자, 모든 부담이 다시 가족과 지역사회에—특히 여전히 무보수 돌봄 일 대부분을 하고 있는 여성에게—지워졌다. 이동제한조치(록다운) 아래 어린이를 보살피는 일과 학교 교육이 갑자기 가정으로 옮겨졌고, 여성들은 다른 책임부담에 더하여 그 짐마저 떠맡게 되었으며, 그런 부하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비좁은 가정의 공간에서 그 모든 일을 해야 했다. 많은 직장 여성들이 아이들과 친척들을 돌보기 위해 일터를 떠났고, 또다른 많은 여성들이 해고되었다. 직업을 계속 유지하며 집에서 원거리로 일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은 세번째 집단은, 집에 붙어 있는 아이들 돌보는 일을 포함하여 갖가지 돌봄 일도 동시에 수행하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다중작업을 떠맡아야 했다. 네번째 집단, 즉 ‘필수노동자’들은 매일같이 일선에서 감염의 위협에 노출된 채 가족들에게 바이러스를 옮길 것을 두려워하며, 종종 아주 낮은 보수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이들의 노동은 더 특권을 누리는 다른 사람들이 집에서 고립되어 지내는 데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어느 여성이 어느 그룹에 속하는지는 계급 및 피부색과 절대적 연관성이 있다. 이는 마치 누군가 자본주의의 순환계에 염료를 주사해서, 그 구조적 단층선을 환히 보이게 만든 형국이다.

 

미국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이 매우 인상적인 항의시위의 물결로 이어졌는데, 이들 시위는 대부분 인종차별적인 경찰의 폭력에 대항하여 젊은 흑인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BLM)라는 슬로건이 팬데믹 기간 동안 색다른 의미를 띠었는가?

 

중요한 질문이다. 왜 미국에서 전투적인 반인종차별주의 운동의 부활이 하필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과 일치한 것일까? 경찰이 유색인들을 살해한 것은 그에 대항한 투쟁과 마찬가지로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일이다. 그렇다면 왜 바로 그 순간에, 끔찍한 보건위기의 와중에 그토록 대규모의 지속적인 시위가 이루어졌나? 어떤 이들은 몇달간의 이동제한조치가 격렬한 심리적 압박감을 초래했고, 그 압박감이 거리에서 절박하게 터져나온 것이라는 견해를 넌지시 내비쳤다. 하지만 나는 위기를 겪으며 조성된, 뭔가 중요한 정치적 통찰력의 섬광을 불러일으킨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겉보기에는 별개인 이들 두가지 구조적 인종차별주의의 표현—서로 별개인, 바이러스로 인해 죽음을 당할 가능성과 경찰폭력에 의해 죽음을 당할 가능성—이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양자 모두 동일한 사회체제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의 깨달음이 그것이다.

2020년 5월, 항의시위가 폭발할 즈음에는 유색 미국인들, 특히 흑인들이 인구비례에 맞지 않게 코로나바이러스에 많이 감염되고 사망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더 형편없는 건강관리를 받았으며 더 높은 비율의 기저질환—천식, 비만, 스트레스, 고혈압—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 질환은 가난 및 차별과 결부되어 있고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나쁜 예후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들은 원거리에서 수행할 수 없는 일선 작업과 붐비는 주거환경으로 인해 감염에 노출될 위험성이 더 컸다. 이 모든 사실이 미디어를 통해 널리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들 보도가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라는 슬로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 슬로건은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이 경찰에 살해되어 흑인생명운동(Movement for Black Lives)에 불이 붙었던 2014년 이래 계속 퍼졌다. 그때 이후로 의식화, 독서 그룹, 전투적 반인종차별주의 신세대 활동가, 특히 젊은 유색인 활동가의 양성 등을 포함한 상당히 많은 조직화 활동이 이어져왔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인종에 따른 영향에 대한 보도들이 수용되고 처리된 것은 이러한 맥락과 분위기에서였다. 이에 더해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살해 사건이 일어났고, 이 살해 장면은 동영상으로 포착되어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들의 분노와 비탄을 자아냈다. 그렇게 도화선에 불이 당겨졌던 것이다. 즉, 그 시점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팬데믹과 경찰폭력에 항거하는 시위가 서로 수렴하면서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라는 슬로건의 의미도 확장되고 심화되었다. 일차적 수준의 의미는 만약 흑인의 목숨이 미국 형사 ‘사법’(justice) 제도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면, 그 제도 안에 여러 형태의 인종주의화된 폭력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팬데믹이 강타했을 때, 그 슬로건은 다음의 사실도 의미하게 되었다: 감염에 대한 노출과 기존 병력(病歷)의 치명적 혼합—이는 저변의 구조적 환경의 지표가 되는데—으로 말미암아 인구비례와 맞지 않게 흑인 생명이 상실되거나 단축되어서는 안 된다.

BLM 운동이 선거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긍정적이며, 진한 적색주(red state, 공화당 지지주)에서 청색주(blue state, 민주당 지지주)로 바뀐 조지아주에서 그 효과가 가장 뚜렷했다. 조지아주는 바이든에게 선거인단 표를 주었고, 두개의 상원의석을 뒤집어, 하나는 흑인에게 다른 하나는 유대인에게 줌으로써—최남동부 지역(Deep South, 특히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지칭—옮긴이)에서 이 사실은 굉장한 뉴스거리이다—민주당에 상원 통제권을 넘겨주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원동력으로 교외주택가 백인들의 트럼프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흑인의 대대적인 투표 참여를 들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 의심의 여지 없이 BLM 운동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주에서 여러해에 걸친 ‘투표하러 나가기’ 운동의 조직화, 즉 스테이시 에이브럼스(Stacey Abrams) 같은 현장활동가들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준비한 결과이기도 하다.

 

선거에서 트럼프의 패배는 승리로 열렬한 환호를 받았지만, 바이든의 승리가 똑같은 열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 것 같다. 미국 선거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트럼프 진영의 반동적 대중주의와 쌘더스의 진보적 대중주의를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인가?

 

그람시(A. Gramsci)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옛것은 죽어가고 있지만 새것이 태어나지 못하는 공위시대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일련의 정치적 동요를 겪게 되는데, 즉 이미 자원이 바닥나버린 대안들과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대안들 사이를 오가며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트럼프주의로부터 클린턴과 오바마 행정부가 구현한 전면적인 ‘진보적 신자유주의’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사태가 여전히 일어날 수 있지만, 지금 당장은 민주당의 대담해진 좌파진영이 진자운동을 견제하고 있다. 트럼프의 패배는 민주당의 기득권 세력인 신자유주의 중도파, 즉 클린턴-오바마 진영과 그 반대편의 당내 좌파 대중주의 세력, 즉 쌘더스(B. Sanders)-워런(E. Warren)-오카시오코르테즈(A. Ocasio-Cortez, AOC) 진영 간의 연합에 의해 확보되었다. 그렇다 해도, 중도파는 예비선거 과정에서 쌘더스의 우수한 실적에도 불구하고—혹은 바로 그 때문에—당시 휘청거리던 바이든이 당 후보 지명자가 되는 길을 닦기 위해 쌘더스의 가차 없는 축출을 교묘하게 일궈냈다. 하지만 2016년과 달리 그 두 진영은 총선을 위해 함께 뭉쳤다. 쌘더스파는 트럼프에 대항하여 바이든에게 상당히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 보답으로 정책에서 더 많은 발언권을 얻었다.

결론은 진보적 대중주의자들과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들이 지금 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동맹에서 대중주의자들은 더 약한 집단이며, 바이든 내각에는 그들의 대표가 들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의 영향력은 커져왔다. 쌘더스는 지금 막강한 상원 예산위원회를 이끌고 있으며, 전국에 방송망을 둔 TV에서 빈번히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현상이다—그는 예전에 주요 대변인이나 논평가로 취급된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하원 내 AOC가 속한 그룹(caucus)인 ‘스쿼드’(The Squad, 2018년 중간선거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진보좌파 성향의 4명의 유색인 여성인 AOC(뉴욕), 일한 오마(Ilhan Omar, 미네소타), 아이아나 프레슬리(Ayanna Pressley, 메사추세츠), 러시다 털리브(Rashida Tlaib, 미시간)를 말하며, 2020년 총선에서 자말 보먼(Jamaal Bowman, 뉴욕)과 코리 부시(Cori Bush, 미주리)가 당선되어 합류했음—옮긴이)도 2020년의 몇몇 중요한 하원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 숫자를 거의 두배로 늘렸다.

그리고 국내 정책에서 중도파들이 좌측으로 이동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상하원 모두 바이든의 1조 9천억 달러 규모 코로나 구제법안에 만장일치로 찬성투표 했는데, 이 법안은 진보적 대중주의의 몇가지 요망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 종합 경기부양책은 쌘더스 진영의 힘과 영향력을 뚜렷이 반영한다. 그럼에도 이 종합정책은 바이든 측 경제고문들의 지지를 받은바, 이들이 ‘좌파에 속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지만, 최소한 이들은 수십년간 재무부를 지휘·관리하면서 금융화를 초래한 골드만삭스(Goldman-Sachs) 동창들과의 부분적 단절을 표상한다. 재닛 옐런(Janet Yellen)이 이끄는 새 경제팀의 성향은 신케인즈주의 혹은 준케인즈주의이다. 여전히 ‘자유무역’에 헌신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일시적으로 긴축 논리를 포기했고, 저인플레이션보다 완전고용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바이든 행정부의 현재 상태는 타협 구도를 나타낸다. 그들의 (재)분배 정책은 뉴딜적 사고의 일부 재활성화된 요소를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의 자유무역 측면과 융합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 그들의 인정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는 능력주의적 요소와 평등주의적 요소 양자를 포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긴장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 긴장은 조만간 분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언제인지 어떤 형태인지—또한 그 긴장이 해결될 수 있을지, 있다면 어떤 조건에서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대체로 좌파/자유주의자 동맹은 불안정하며,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그 동맹을 대신하게 될지는 불명확한 상태다.

핵심 변수는 팬데믹으로 인한 보건 및 경제적 여파 때문만이 아니라 ‘기저질환들’ 때문에도 휘청거리고 있는 대중을 바이든의 정책이 얼마만큼 만족시키느냐는 것이다. 경찰폭력, 환경파괴, 사회안전망의 절단뿐 아니라, 40년에 걸친 탈산업화와 국외이전, 금융화, 노조파괴, 맥잡화(McJobification, 기존의 정규직 일자리를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교체하는 현상을 일컬음—옮긴이), 기반시설의 노후화에 이르기까지 빈민과 노동자 계급, 중하류 중산층 계급의 생활조건 악화에 작용해온 모든 것 말이다.

바로 이것이 2016년 양편의 대중주의 반란—한쪽은 트럼프, 다른 한쪽은 쌘더스—을 통해 ‘진보적 신자유주의’로부터의 대대적 이탈이 촉발된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지속되는 한 양편의 운동들 모두 이런저런 형태로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바이든 타협책의 미래는 좌파 대중주의자들을 제자리에 붙잡아두면서, 우파 대중주의자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친노동자계급적인 양보 교섭을 이루어내는 능력에 달려 있다. 게다가 바이든의 타협은 투자자 계층의 비위도 계속 맞춰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의 선임은 좌파 측의 뒤섞인 반응, 즉 흑인 여성이 부통령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사람들과, 사형제도에 대한 그의 과거 입장 및 캘리포니아 검찰총장 재임 당시의 공권력 남용 은폐를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엇갈리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당신의 분석은 어떠한가?

 

나는 앤 필립스(Anne Phillips)가 예전에 ‘존재감의 정치’(politics of presence)라고 불렀던 것, 즉 자신처럼 생긴 누군가가—예컨대 여성이라든가 유색인—공직에 선출되는 것, 그 자체가 위대한 성과라는 생각에 특별히 열광한 적이 없다. 페미니스트의 기질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새처(M. Thatcher, 1979~90년 영국 수상을 지낸 영국의 보수정치가—옮긴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2008년에 흑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경험을 한 뒤, 미국의 우리들에게 이 사실이 더 분명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큰 변화에 대한 엄청난 희망을 갖고 표를 던졌는데, 그런 희망은 선거유세의 감격적인 웅변술을 통해 그 후보가 의도적으로 배양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깊은 실망이었다. 일단 권력을 손에 쥐자 오바마는 고무적인 연설은 재빨리 집어치우고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로서 통치했다. 이런 경험을 한 뒤 정치에 대해 약간이라도 깊이있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해리스가 부통령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그리 흥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옛 속담이 있다: “한번 속으면 네가 나쁜 놈이지만, 두번 속으면 내가 바보다.”

여하튼 해리스는—오바마와 달리—정치적 무명인도 아니고 감격적인 연설자도 아니다. 그는 ‘범죄에 대한 엄격한 대응’을 표방하는 검사이자 행정가—그리고 야심만만한 정치꾼—로서 오랜 정치적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일부러 눈을 감아버리지 않고서야 그를 ‘희망과 변화’의 횃불로 생각할 수는 없다. 다른 한편 그는 매우 총명하고 유연하며 대세를 읽고 그에 따라 경로를 조정하는 데 뛰어나다. 만약 그 경로가 그의 야심에 도움이 된다면, 짐작건대 그는 약간 좌로 이동할 수도 있다. 그 야심에는 대통령직도 포함되는데, 그는 현재 바이든의 제2인자이자 유력한 계승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가다듬고 있다. 그러나 그가 대세를 따르는 사람인 한 그 흐름을 분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이든의 타협 구도가 무너지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텐데, 자유주의자들은 좌파를 공격하고 뭔가 새롭게 위장하여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부활하려 할 것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세력이 그들의 반동적 대중주의 대안을 부활시키려 시도할 것처럼 말이다. 그 지점에 이르면 좌파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한가지 시나리오는 취소문화(cancel culture, 공인이나 기업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판단할 경우 그들에 대한 지원이나 지지를 철회하는 SNS상의 항의방식—옮긴이)와 다양성 숭배(diversity fetishism)를 몰아붙이는 얄팍한 형태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좌파가 제3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진력하는 것인데, 이는 재분배의 평등주의 정치와 함께 포용적인 인정 정치를 천명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발상은 서로 다른 두 진영에서 친노동자계급적인 요소들을 분리시켜 노동자계급 전체를 위해—쌘더스를 지지하는 유색인이나 이민자 혹은 여성들만이 아니라, 트럼프 진영으로 달아난 사람들까지도 그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근거로 설득하여—싸우는 데 헌신하는 새로운 반자본주의 연합으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좌파적 형태의 대중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종결점으로 여기기보다 좀더 급진적인 어떤 것—우리 사회체제 전체의 깊은 구조적 변화—으로 나아가는 이행기로 본다. 이 길은 단순히 좌파 대중주의 정치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적 생태사회주의와 더 유사한 형태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번역: 이종임(李鍾姙)/영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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