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대한민국의 오늘, 내일의 코리아

 

미국 ‘신경제’의 종언과 한국경제의 향방

 

 

전창환 全鋹煥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본지 114호(2001 겨울)에 「테러 전후의 미국경제」 발표. 편저로 『미국식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적 대안』(공편) 『현대자본주의의 미래와 조절이론』 등이 있음. jch6577@hanshin.ac.kr

 

 

1. 문제제기

 

90년대 전세계가 심각한 디플레와 외환·금융위기로 고통받고 있는 동안, 미국은 ‘신경제’의 화려한 실적을 앞세워 자유시장경제의 구현이라는 미명하에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요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경제가 IT공급과잉, 주가하락, 회계부정 등에 휘말리면서 신경제의 위력과 글로벌 스탠더드의 권위는 크게 약해졌다. 그 대신 부동산 거품 부풀리기와 노골적인 군사화가 한창이지만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가 높다.

더 우려해야 할 것은 외환·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가 미국경제의 변화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물론 외환·금융위기 이전에도 한국경제가 미국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위기 이후는 강도나 속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1999〜2000년의 신속한 경제회복을 김대중정부의 구조조정 성과로 돌리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최근 2년 동안 한국경제의 부진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필자는 외환·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가 IT산업의 국제분업구조=IT공급연쇄, 한미 주식시장의 동조화, 그리고 엔/달러 환율의 변동에 취약한 동아시아 달러본위제를 매개로 미국경제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우선 엔론사와 월드컴사의 회계부정 사건으로 크게 흔들리는 미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여러 각도에서 짚어볼 것이다. 이어 위 세 가지 매개고리를 통해 급속한 회복 이후 부진을 보이고 있는 한국경제의 최근 실상 및 구조적 문제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미국 ‘신경제’의 종언

 

(1) 이중거품(IT·주가)의 붕괴와 글로벌 스탠더드의 동요

70년대 미국은 대내외적 금융규제를 필수적 제도형태로 필요로 했던 포드주의의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전후 미국의 황금기에는 금융에 대한 대내외적인 규제로 인해 주식·채권·예금 등의 금융자산 보유와 금융자본의 축적기반이 지금에 비해 현저히 제약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낮은 인플레와 높은 생산성으로 금융수익성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에 금융규제에 대한 이들의 불만은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걸쳐 급속한 인플레와 제조업분야에서의 수익성 저하가 금융적 수익성 저하를 초래하자, 이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포드주의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인플레 압력이 70년대 초반부터 강력하게 나타나면서 가계의 자산보유구조에서 예금 대신 주식 등 인플레 헤지(hedge)가 가능한 금융자산 보유가 크게 증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1 특히 포드주의 황금기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개인주주들이 기존의 소극적인 금리생활자 지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익옹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금융기관들도 금융자산 보유자들과 주주들의 이런 요구에 적극 부응하여 기존의 금융규제들을 철폐해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금융자산 보유자와 금융자본의 이런 대응은 결국 뉴딜관료·경영자·조직노동자 간의 포드주의적 타협구조를 해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연·기금, 뮤추얼펀드 등 기관투자가들의 주식보유비율이 크게 증가한 결과, 이들은 주주의 이해를 대변하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연·기금과 뮤추얼펀드의 펀드매니저들은 포트폴리오 투자의 운용실적을 높이기 위해 해당기업들에 주가 극대화를 철저하게 요구한다. 이로써 금융씨스템, 연금제도, 기업지배구조 등에서 주주가치극대화=주가지상주의가 확고한 규범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문에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경영자들은 주주가치극대화를 최우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경영자들에게 제공된 스톡옵션이 자신의 재산증식과 직결되기 때문에 경영자들은 자연스럽게 주가중시 경영으로 기울어졌다. 심지어 종업원들도 기업연금·개인연금 등을 매개로 하여 모두 주식투자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이제 경제의 모든 주체들이 주가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경영자들의 주가지상주의가 대중들의 주식투자와 맞물리면서 여러 부작용과 폐해가 속출했다. 주가상승 그 자체가 지상목표가 되어버린 나머지 경영자들은 주가부양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주가부양 차원에서 자사주 매입이 전례없이 크게 성행했으며 다양한 형태의 합병·인수(M&A)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경영자들은 이에 필요한 자금이 부족할 때에는 은행차입이나 채권발행에 의존하기도 했다. 분식회계나 회계조작의 유혹이 발생하는 것도 바로 주가지상주의 때문이다.

주가지상주의가 확산된 가운데 기관투자가들뿐만 아니라 개인투자가들은 IT관련투자가 생산성증대와 기업경영실적의 호전을 가져온다는 정체불명의 논리에 현혹되어 IT관련부문에 대규모로 자금을 투자하였다. 그 규모를 보면 1995〜2000년에 비금융부문이 은행융자와 채권발행을 통해 약 2조1천억 달러의 자금을 조달했는데 그중 반 정도가 IT부문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세는 90년대 특유의 주식수급 불균형(즉 마이너스의 주식 순발행=주식에 대한 항상적인 초과수요)에 따른 주가의 상승압력과 지속적인 저금리정책기조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2

주가가 최고정점에 달했을 때 주가수익비율은(PER)은 30 대 1을 웃돌았으며 역사적 평균수준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준이었다.3 또한 그것은 20년대 말 대공황 직전의 주가상승 정도를 훨씬 앞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산가격의 속성상 주가가 무한정 상승할 수는 없다. IT관련 기술주에 대한 신화가 깨어지고 IT산업에서의 과잉설비투자로 해당기업들의 생산성 및 경영실적이 급속히 둔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 봄 주가 대폭락을 계기로 한 미국경제의 급격한 쇠퇴에는 IT붐과 공급과잉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IT관련분야에서의 과잉설비와 수익성 저하로 2002년 상반기 벤처캐피털(VC)의 투자는 전기 대비로 50% 정도 줄어들었다. 2001년 벤처캐피털 전체의 투자수익률이 마이너스 27.8%로 떨어졌는데 이는 1980년 투자수익의 기록개시 이후 최초의 마이너스 수익률이다.

엔론사와 월드컴사 등 IT관련기업의 회계부정사건은 연·기금, 뮤추얼펀드, 투자은행, 투자자문사=펀드매니저 등의 금융수익성 증대압력이 경영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맞물리면서 야기된 것이다. 회계감사를 맡았던 감사법인이 분식회계를 은폐하고 회계조작에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또한 해당기업의 자문을 담당하는 투자자문회사가 감사업무를 겸해 회계분식을 엄격하게 감시하기 어려웠다.4 이로써 90년대 미국이 그토록 강조했던 글로벌 스탠더드의 권위는 일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80년대 창립 초기만 하더라도 보잘것없는 중소규모 기업이던 엔론사와 월드컴사가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기업이 주식교환형 합병, 현금 인수 등을 통해 다른 기업들을 쉽게 합병·인수(M&A)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기업의 성장과정을 보면 이 기업들이 M&A의 마술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어떤 형태의 합병·인수이든 고주가가 그 필수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가

  1. 하지만 소득별 주식보유분포는 극단적으로 편중되어 있다. 최상위 1%가 보유한 주식은 전체의 37%에 달하며 상위 5%는 전체 주식의 65%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R. Wolff, “The U.S. Economic Crisis: A Marxian Analysis,” Rethinking Marxism Vol.14, No.1(2002년 봄호), 119면 참조.
  2. 전창환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금융주도 자본주의」, 『사회경제평론』 18집, 한국사회경제학회 2002 참조.
  3. D. Baker, “The Stock Market Bubble and Investing Social Security in the Stock Market,” www.cepr.net(2002. 7).
  4. J. Coffee, “Understanding Enron: It’s about Gatekeepers, Stupid,” Columbia Law School: The Center for Law and Economic Studies, Working Paper, No. 207(2002년 7월 30일자) 참조. 이 사건을 계기로 한 상하 양원의 타협으로 기업개혁법안인 싸베인즈-옥슬리법안(Sarbanes-Oxley Act)이 통과되었다. 분식회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고 감사법인에서 회계감사업무와 자문업무의 분리를 규정한 조항도 삽입되었다. 그러나 경영자와 새로운 금융자본과 융합·유착되어 있는 현재의 금융주도 자본주의에서 과연 이 법안이 어느정도 회계투명성을 제고하고 회계분식을 막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심지어 미국의 찰머즈 존슨(Chalmers Johnson)은 엔론사의 회계부정을 조직화된 범죄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대안은 없다고 주장한다(C. Johnson, “Economic Fanaticism Is Bad for Seoul,” LA Times 2002년 1월 27일자). 미국의 법인기업과 투자은행 등 금융자본간의 담합에 따른 여러 회계부정사례에 대해서는 김경호 「회계투명성과 기업회계기준」(한국회계연구원 2002년 4월 24일); 一ノ瀨秀文 「90年代美國型株式資本主義の大きなガり角」, 『經濟』 2002년 9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