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미국 패권의 위기와 세계사적 전환

 

 

유재건 柳在建

부산대 사학과 교수. 주요 논문으로 「맑스와 월러스틴」 「식민지·근대와 세계사적 시야의 모색」 「통일시대의 개혁과 진보」 등이 있음. jkyoo@pusan.ac.kr

 

 

1. 머리말

 

부시 2기 정부의 출범에 맞춰 1기 때와 같은 일방주의가 계속될 것인지 그 정책 방향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부시는 예정대로 치러진 이라크 선거에 고무되어 중동 및 세계의 민주화라는 명분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한편, 전쟁으로 틀어진 유럽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외교적 수단에 비중을 두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집권 1기 때도 내건 ‘자유의 확산’이라는 명분 자체가 패권주의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바 있어서 군사패권주의에 어떤 실질적인 변화가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이라크 정세는 여전히 유동적이고 미국의 희망대로 진전될 전망은 밝지 않으며 미군 철수 역시 딜레마에 빠져 있다. 부시가 이끌고 있는 미국은 여전히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어 있다.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에 관한 우려가 증폭되어가면서 그 일방주의적 행태와 만행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글들을 접하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듯 막강한 군사력으로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의 패권에 대한 두려움 못지않게 그 패권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상식적으로도 진짜 힘있는 자가 저리도 무모하게 싸움을 걸면서 완력 자랑만 하랴 하는 의문이 가능한 터에, 오늘날 세계의 정치·경제·군사·이데올로기적인 정황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 또한 이러한 진단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한 해 국내에 연이어 소개된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의 『미국 패권의 몰락』, 찰머스 존슨(ChalmersJohnson)의 『제국의 슬픔』, 엠마뉘엘 또드(Emmanuel Todd)의 『제국의 몰락』, 죠지 쏘로스(George Soros)의 『미국 패권주의의 거품』은 제목들이 시사하듯이 미국 패권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1 책의 저자들을 보더라도 월러스틴를 제외한다면 좌파라고 하기 어려운 사람들인데, 이렇듯 지적 배경과 문제의식에서 전혀 다른 저자들이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쇠퇴? 오늘날 이 주장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그런 쇠퇴를 반전시킬 정책을 요란하게 주장하는 미국의 매파들밖에 없다”2는 월러스틴의 말은 극적인 수사로 들릴 뿐 지식계에서는 이미 해당되지 않는다.

2차대전 후 확고했던 미국 패권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은 면밀히 검토해보아야 할 사항이지만, 아무튼 세계사의 현 국면에서 미국이 처한 위치와 좌표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북핵문제를 둘러싼 불안정한 정세를 감안할 때, 탈냉전 이후의 유일한 군사대국인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이 지닌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다른 무엇보다 절실하다. 또한 미국이 동아시아와 한반도 현실에 내재화된 구조적인 변수인만큼 미국의 패권체제가 쇠락해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즈음 새로운 동아시아질서의 변화에 대한 전망이나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구축과 같은 지역단위의 창조적 대응을 모색하는 흐름이 대두하는 것도 이러한 세계사적 전환기의 상황, 즉 미국 패권의 안정기에 고착된 구조에 모종의 균열이 감지되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미국의 패권주의 세계전략의 모순적 성격과 역량을 진단하고, 4장에서는 오늘날 세계의 지정학적 분열상황을 어떤 틀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간략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미국이라는 국가와 나머지 세계로만 분열된 것이 아닐진대, 오늘과 같은 세계사적 전환국면에서 현실을 한층 복합적으로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취지를 담고 있다.

 

 

2. 미국 패권주의 구상의 시대착오

 

현재 부시정권 매파의 세계전략 목표는 그들의 공개적 언명만 보더라도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냉전종식 후의 유동적이고 혼란스런 세계질서를 끝내고 미국 주도의 패권을 재확립하겠다는 것이다. 냉전시대의 양극화된 국제정치구조는 해당국가에게 강제된 만큼이나 안정성도 가졌던 반면 탈냉전은 세계에 불안정과 위험을 가져온 동시에 미국 패권의 정당성도 어느정도 위협했다. 따라서 탈냉전 이후 미국의 전략분석가들은 미국의 세계지배권을 연장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을 다각도로 모색해왔다. 잘 알려진 헌팅턴(S. Huntington)의 서구와 비서구의 문명적 대결론이나 브레진스키(Z. Brzezinski)의 다양한 동맹관계를 활용하는 현실주의 전략 모두 탈냉전으로 유동적이 된 세계질서에서 어떻게 하면 미국의 패권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모색이었다.

하지만 9·11사태는 그간 다른 종류의 구상을 해온 신보수파(네오콘)라는 집단을 부상시켰다. 그 구상은 미국이 갖고 있는 압도적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점차 쇠락해가는 미국의 패권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이 집단의 정책그룹인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의 1997년 원칙 선언문은 대폭적인 군사력 강화를 통해 전지구적 지도력을 회복해 21세기를 “미국의 원칙과 이익”에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현하고 있다.3 군사력을 활용해 ‘원칙과 이익’을 실현시키겠다는 천명은 사려깊은 현실주의 대신 이데올로기와 이익추구를 결합시키겠다는 강경한 지향을 보여준다. 부시나 라이스(CondoleezzaRice)가 제창하는 ‘자유를 지지하는 세력균형’ 정책 또한 이와 맥을 같이한다. 이들 매파 가운데 어떤 이는 탈냉전 후 10년을 영웅 프로메테우스가 난쟁이처럼 지낸 시기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일방주의가 진정한 의미에서 탈냉전 외교정책의 출발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는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임을 인정하고 그 책무를 강조하는 이도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이들에게 ‘제국’ ‘제국적 역할’이라는 용어는 모종의 사명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4

이들의 목표는 군사적 수단

  1. Immanuel Wallerstein, The Decline of American Power: The U.S. in a Chaotic World, The New Press 2003(한기욱·정범진 옮김 『미국 패권의 몰락: 혼돈의 세계와 미국』, 창비 2004); Chalmers Johnson, The Sorrows of Empire: Militarism, Secrecy and the End of the Republic, Metropolitan Books 2004(안병진 옮김 『제국의 슬픔: 군국주의, 비밀주의, 그리고 공화국의 종말』, 삼우반 2004); Emmanuel Todd, Aprés L’Empire, Gallimard 2002(주경철 옮김 『제국의 몰락』, 까치 2004); George Soros, The Bubble of American Supremacy, Public Affairs 2004(최종옥 옮김 『미국 패권주의의 거품』, 세종연구원 2004). 이하 인용면수는 번역서의 면수임.
  2. 이매뉴얼 월러스틴, 앞의 책 23면.
  3. 죠지 쏘로스, 앞의 책 22~26면에서 재인용.
  4. Michael Mann, Incoherent Empire, Verso 2003, 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