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신수정 申水晶

문학평론가.

 

 

미궁 속의 산책

한강·백민석·배수아·최근작을 중심으로

 

 

1

 

소설이 ‘길찾기’에 비유되어온 것은 ‘출구’ 혹은 ‘집’을 향한 그것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오랫동안 소설은 혼돈을 물리치고 미정형 상태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려는 욕망의 산물로 이해되어왔다. 이러한 욕망은 혼돈이란 구획되고 정리되어야 할 과제라는 인식과 더불어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나갈 주체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전제로 한다. 온갖 유혹과 환난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쎄우스의 여정을 소설의 전범으로 삼는 이론이 근대의 일반적인 소설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에게 소설은 언제나 스스로의 욕망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합목적적 주체의 간지(奸智)였다.

그러나 최근 우리 문학에서 이러한 의미의 소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일찍이 최인석은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창작과비평사 1997)을 통해 우리 소설의 주류인 회귀서사를 부정한 바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올라간 사내가 본 것은 거대한 혼돈, 무한한 심연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길을 잃은 지 벌써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이 혼돈이야말로 자신을 둘러싼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그는 혼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대신 차라리 그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나아가는 길을 택한다. 최근의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길찾기’의 서사 대신 그 길의 ‘미궁스러움’과 그 미로를 가로막고 있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왜 그 괴물과 싸워 물리치지 못했느냐고 추궁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 미궁 속에서 발견한 진실, 곧 자신들이 ‘이성’이라는 실을 가진 테세우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그들 스스로가 바로 혼돈의 주체이자 괴물 미노타우로스일지도 모른다는 자각, 그리고 혼돈이 인간을 수렁으로 내몬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혼돈을 수렁 속에 집어넣고 그 위를 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가정 등을 심대한 소설사적 전환의 기미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최근 소설에 나타난 이러한 변화의 조짐들은 이제까지 ‘소설’을 비추던 거울을 깨고 그것을 새로운 형상으로 조립한다. 한강·백민석·배수아의 최근작을 통해 그 ‘거울’의 파편을 맞춰보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미궁 속에 갇힌 소설의 욕망을 보여줄 것이다.

 

 

2

 

한강(韓江)의 두번째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창작과비평사 2000)는 상처와 고통이 육화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 ‘피’ ‘흉터’ ‘눈물’ ‘생리’ ‘멍’ ‘가시에 찔린 자국’ ‘음식 혐오증’ ‘시력 상실’ 등 가시적이고도 물질적인 형태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육체적 흔적은 이 소설집이 규정하고 있는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틀’이다. 존재는 미정형의 진흙 덩어리이다. 그것은 그것을 빚는 자의 손놀림에 의해 ‘부처’가 될 수도 있고 흉물스러운 허물을 지닌 ‘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끈적거리고, 찢기고, 멍들고, 찔린 자국 등, 이 모든 육체적 외상이 암시하는 것은 존재 자체가 이미 근본적인 결여태라는 사실이다. ‘부처’의 형상을 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현존하는 한 그는 수성(獸性)의 허물, 그 껍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는 “뱀 지나간 자국처럼 길게 금이 벌어진 콘크리트”(287면) 벽과 같다. 그것은 자신의 균열과 허물로 언제나, 이미, 스스로, 낙원의 부재를 입증한다. 「어느 날 그는」의 ‘그’와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의 ‘아빠’가 보여주듯 『내 여자의 열매』가 마련한 존재의 초상은 언제나 “반인반수”(25면), 그 신화적인 괴물의 모습에 가깝다.

이 누더기 같은 한겹 가죽을 벗어던질 길은 없는가. 그리하여 지겹도록 우리를 구속하는 분노와 후회와 증오, 억울함과 자책과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깨끗하게 털어버리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방법은 없는가. 괴물의 운명을 벗어나고자 하는 탈신(脫身)의 욕망은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충동이다. 때로 “어두운 하늘에 닿으려고 몸을 길게 뻗어올린 나무”(71면)와 “운무에 가려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 푸른 산”(249면), 혹은 “하얀 소금가루만 남겨놓고 나를 몸뚱이째 증발시켜버릴 것 같은 뙤약볕”(68면)이나 “철길 위로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강줄기”(310면) 등의 이미지로 은유되는 이 욕망은 기본적으로 존재의 ‘허물’을 벗고 ‘본원적인 자아’로 되돌아가려는 의지에 다름아니다. 이 의지는 대개의 경우 서로 다른 두 방향을 동시에 가리킨다. 나무와 산이 상징하듯 곧고 푸르게 뻗어나가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초월의지가 그 하나라면, 빛과 물처럼 점점이, 흔적없이 흩어져 한점 티끌이 되기를 바라는 소멸의지가 또다른 하나다. 초월이 자기 안에 내재하는 ‘관음’과 만나는 것, 말하자면 진흙덩어리 속에 선험적으로 녹아 있는 ‘부처’의 형상을 만나는 길이라면, 소멸은 그 ‘진흙’을 다시 우주 삼라만상의 근원인 바람과 물과 흙, 그리고 햇빛으로 날려보내는 과정, 곧 자연으로 되돌려보내는 과정이다. 성화(聖化)와 무화(無化), 이 두 가지 길을 따라 탈신의 욕망은 “사람의 운명을 일시에 끝장내버리고 싶”(89면)은 무서운 죽음충동을 잠재운다. 「아기 부처」에서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아왔던 어머니가 불화(佛畵)를 그림으로써 자기 안의 관음을 만나는 과정이나 오랜 인고 끝에 결국 남편의 ‘흉터’를 받아들이게 되는 ‘나’의 내면적 움직임이 모두 그러하다. ‘부처’와 ‘햇빛’은 그 특유의 생명력으로 존재의 살기를 잠재우고 유한한 운명을 벗어날 방도를 일깨운다.

한강은 이 ‘부처’와 ‘빛’의 행복한 만남이 ‘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터질 듯 팽팽한 물관 가득 맑은 물을 퍼올리며, 온 가지를 힘껏 벌리고 가슴으로 하늘을 밀어올리는 거예요. 그렇게 이 집을 떠나는 거예요.”(239면) ‘꽃’은 육신의 무거운 껍질을 벗고 한없이 뻗어나간 ‘정신’과 맑은 물로 녹아내린 ‘육체’의 순간적인 화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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