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미당 담론

「자화상」과 함께

 

 

고은­ 高銀

시인. 시집으로 『문의마을에 가서』 『백두산』 『만인보』 『남과 북』 『순간의 꽃』 등이 있음.

 

 

 

세상이여 설사 돌 사람이 입을 열지라도

여전히 혀끝의 속임을 알지 못하리

─염송(拈頌) 25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었나보다. 하나는 사십구재 이후에나 말하는 것이 덜 거북살스럽겠다는 생각이었고, 둘은 애도와 회고의 찬양들이 가라앉은 다음에나 담담하게 나서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늦었다.

미당(未堂)은 나에게 추억의 대상이기도 하고 단절의 대상이기도 하다. 육친적인 날들과 긴 벼랑 같은 결별이 그것인데, 그 두 가지가 다 이 글의 짐이다.

30여년 동안 세찬 강물의 이쪽과 저쪽이 마주했는데, 특히 1980년 5월 ‘광주’ 이후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단절되기 이전까지는 아직도 내 정감 가운데는 그의 음력(陰曆)이 들어 있었고 그의 워낭소리 나는 듯한 마당 깊은 눈길이 이따금 떠오르던 것이다.

저 전후 산천을 떠돌며 살아남은 나에게 불가결의 혈연으로 그 인연은 시작되었다. 유난히 둘 사이의 진한 피에 이심전심도 많았다.

1958년 한국시인협회 설립과 함께 나온 기관지 『현대시』 창간호에 친구가 보낸 내 시 한편이 신인작품으로 발표된 데 이어 어떤 사람의 안내로 시 5편 중의 3편이 『현대문학』에 추천됨으로써 나는 지훈(芝薰)과 미당을 통해서 곡절 많은 이 나라 시의 길에 내보내진 것이다. 이런 추천행사가 스승과 제자라는 조선 사림(士林)의 유습 그대로 도제주의로 굳어져 그런 미풍 겸 폐단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왔다. 그래서 너는 누구의 제자이고 나는 누구네 문도(門徒)라는 것으로 고질병 같은 시의 문벌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 나머지 60년대 후반의 어느날 미당은 나에게 말했다. “오늘 동리(金東里)하고 만났더니 너에겐 고은이 있어 좋겠다, 나는 그런 제자가 없다 하더군. 잇히히히.” 이런 것말고도 그는 여기저기서 내 자랑을 자주 했고, 그럴 때마다 왜 편애하느냐라는 불평을 만나기도 한 것을 기억한다. 그만큼 자주 정실적이기까지 했다. 한때는 내 장시간의 웃음증상 때문에 화가 난 그가 가족회의를 열어 출입금지를 선언한 뒤 한달 이상의 절교 뒤에 다시 관계가 회복되어 그전보다 더 진진해졌다. 그 당시 불교적 관심의 친연성도 큰 길인 듯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지훈의 선적(禪的)인 것과 함께 미당의 연기론적인 것의 여울지는 유혹도 그 한몫이었던 것 같다.

1971년 이후 내 문학행로는 그러나 그동안의 강의 끄트머리를 떠났다. 물마루 높은 난바다는 이제까지의 ‘스승’이 차츰 무효로 되어갔다. 어제는 오늘의 부차적인 볼모이기 십상이었다. 어쭙잖게도 나의 문학은 지키는 것보다 고치는 것을 지향해야 했다. 현실의 여러 가녘으로부터 저만치 소개되어 있기보다 돌아쳐 맞서는 산짐승의 태세야말로 달려오는 세계의 절실성을 만나게 하는 원칙이기도 했다.

그 수많은 오늘들은 늘 화상(火傷)을 입을 만큼 뜨겁고 공포의 고비마다 면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인에게 파쇼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것에 지면 시는 삭은 낙엽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해서 낙엽이 시 속에서 행여 모독되는 일이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떠났던 미당 근처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1980년 5월이 지나갔다. 이미 미당은 8할 이상 부정되었다. 1983년 모처럼 내가 세상에 돌아왔을 때 어느 회합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10년 가까이 만나지 않은 처지였다. “왜 안 오시는가, 꼭 와, 오란 말이여”라고 그가 말했다. 그때 내 입에서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한마디 대꾸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세상 떠나시면 가겠습니다.” 한동안 그는 내 하반신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나도 돌아섰다. 그는 1915년생이고 나는 1933년생이었다.

80년대 신군부 지배기간은 좀더 지능화된 정보정치로 나아갔고 6월항쟁 뒤의 어설픈 대통령직선제까지 이르렀다. 그럴 무렵 문학에 대한 관심은 문단의 화합을 강조하는 것으로 제법 그럴싸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여기저기 모호한 가치중립적인 동작도 있게 되었다. 언론들의 계도도 있었다. 내 이름을 문예지 문인주소록에서도 빼버린 시절이 어느새 다른 시절로 슬그머니 돌아서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당과 나와의 만남을 요청하는 매체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미당 자신이 전두환의 통로로 얻어낸 자금으로 운영하는 문예지에서 그와의 권두대담을 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몇 신문과 잡지들이 그렇게 미당과 내가 ‘화해’하는 극적인 광경을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권유는 그가 타계할 때까지 열 번 이상 되풀이되었다. 그런 노력들에 대해서 나는 서투른 열중쉬어 자세로 대하다가 미당 별세의 소식을 기자들로부터 들은 이틀 뒤에 빈소의 사진과의 대면으로 그와의 만남을 마감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의 영구가 고향의 선영으로 돌아가는 장례행렬에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장엄한 바였다. 그날따라 나에게 미당의 청산 귀의와는 별도로 내가 살고 있는 마을 한 노인의 죽음으로부터 새삼 터득한 바가 있다면, 사람이 이 세상을 자신의 의식 환경으로 삼아 천년 만년 살아갈 것처럼 지내다가 끝내는 한 나그네로 표표히 떠나야 하는 그 죽음의 왕생행로에 이르러서야 이 세상이 내 것이 아니라 내가 하염없는 손님으로 머물다가 떠나야 하는 덧없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미당은 2백세까지는 살아야겠다고 벼른 적도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 무슨 요구르트 선전의 그루지야 지방 풍경을 보고 생각해냈을 러시아 행각도 있었던 것이다.

미당 85세의 생애는 그렇듯이 그가 생전 내내 자처한 ‘떠돌이’로 떠났으나 그와 반대로 그는 세상의 주인이고자 한 집착도 없지 않았고, 세상에는 그에 대한 평가와 맹신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의 규탄으로도 얼룩져 있어야 했다. 그런 것 이전에 김수영(金洙暎)은 미당을 체질적으로 싫어한 이유가 셋이었다. 하나는 그 토속성이 견딜 수 없다는 것, 둘은 그의 늘어지는 서정성이었고, 셋은 그의 반동성이 역겹다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미당의 시 한두 편과 삶의 몇군데에 대해서 말하는 동안 모내기철 여기저기 무논에 던져진 모춤 몇개를 풀어 허튼모를 심는 심정이고자 한다. 천도(天道)도 옳으냐 그르냐 물어야 하거늘 지상의 한 시인이 남긴 것들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그것이 무언인가를.

 

50년대 말 미당은 백철(白鐵)의 천민론에 몹시 화를 냈다. 그것은 뒤의 김종길(金宗吉) 영매론에 반발하는 것보다 더 격렬했다. 아마도 그즈음이 미당으로서는 그동안 떠돌았던 ‘병든’ 삶으로부터 가문과 세상에 대한 안착의 품격을 보여주어야 할 때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닌밤중에 백철이 나타난 것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外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詩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이 「자화상(自畵像)」은 ‘此一篇昭和十二年丁丑歲仲秋作. 作者時年二十三也’라는 좀 현학적인 부기(附記)로 보아 시인의 나이 23세 무렵의 것이다.

그는 18세 무렵 신문의 독자문예란에 작품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런 투고작품의 하나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응모에 편입되어 당선된 「벽(壁)」이다. 그로부터 2,3년 뒤 김동리·이용희(李用熙)·오장환(吳章煥) 들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회를 결성하고 그 동인지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된다.

이 시는 미당을 말할 때마다 마치 원죄로서의 영예인 듯, 주부(呪符)인 듯 반드시 내세워지는 미당론 생활필수품 같은 텍스트라 하겠다. 또는 이것은 한동안 잠잠하게 가라앉았다가 수면으로 떠오르는 늙어빠진 고래의 오달진 물줄기 같은 시적 진술들의 강한 간주곡이 된다. 백철이 이 시를 두고 시인의 가계가 천민이라고 말한 것이고, 시인은 백철에게 어떤 살의(殺意)까지도 품으며 화를 낸 것이다.

아마도 이같은 천민론이 식민지시대였다면 도리어 그런 신분으로서의 천민에 피압박 민족의 의미라도 가탁되었거나 개인적으로도 위악적인 자기학대에 기여함으로써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첫행을 시인 자신이 명예로운 사실로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시와 사실의 일치라는 뜻밖의 상징효과를 얻게 되는 줄을 왜 몰랐겠는가.

그러나 백철의 발언이 나온 것은 우선 시인이 전쟁시기의 정신적 난조에서 어느정도 헤어나 가정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위엄을 통상적으로 갖춰갈 때였으므로 그의 폭발은 당연했다.

백철 문학론의 허실에 대한 비판은 정작 다른 곳에서 가능한 노릇이지만 미당으로서는 그의 부친이 상민이나 노비신분이라고 말한 것으로 인해서 백철의 비평행위 전반을 격하하기도 한다. (이는 뒷날 김동리와의 문인협회 이사장 쟁탈전에서 패배한 뒤 이십대 이래의 오랜 친구인 김동리의 문학을 부정하고 그 대신 황순원黃順元을 찬양하는 일과도 상통한다.)

아버지가 상민이냐 종이냐를 말하기 전에 그는 김동리에게 주는 시 「엽서(葉書)」에서는 “목아지가 가느다란 李太白이처럼/우리는 어째서 兩班이어야 했드냐”라 한 것을 보면 시인 자신은 세기말 댄디즘의 기분과 함께 적선(謫仙) 이백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다.

사실인즉 그의 부친은 고향의 대지주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가의 농사 마름이었던 것이다. 이 마름이란, 가령 김용섭(金容燮)의 지주연구와 관련짓지 않더라도 먼저 지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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