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위기의 시대, 문학의 지혜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개벽의 사상사』(공저), 역서 『단일한 근대성』 『패니와 애니』(공역),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다시 ‘전체’를 사유하기

 

비평담론의 역사를 돌아보면 유독 낙인이 찍힌 듯 보이는 용어가 몇몇 있다. 이를테면 ‘민족문학’ 같은 단어가 그런 경우인데, 민족주의 비판이 가장 선차적인 문화적·담론적 의제로 부상한 시기를 거치며 ‘민족’을 발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민족주의의 자백처럼 여겨졌다. 마치 역류하는 환유처럼 논리적으로 착종된 기제가 작동한 결과였다. 한때 비평적 진리탐구의 불가결한 지향점으로 생각되던 ‘총체성’의 운명도 그에 못지않아서, 이 단어는 전체주의를 욕망한다는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타자에 대한 존중과 양립할 수 없고 단일한 관점으로 세계를 획일화한다는 혐의에 따른 것이다. 그 반대편에 있던 ‘파편화’가 부정적 함의를 산뜻하게 털어내며 다양성 및 차이와 같은 의미로 수렴된 점은 동일한 사태의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실상 연속적인 현상이라 말할 근거도 여기서 재차 확인된다. 둘 다 ‘전체’의 쇠락을 불가피하다고 보되 다만 그것을 향수 어린 비애감으로 돌아보느냐 아니면 긴 억압에서의 해방으로 경축하느냐 사이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 이래 얼마나 멀리 왔는가는 “‘나’를 주인공으로 한 일인칭 글쓰기의 전성시대”라는 최근 비평의 진술이 잘 보여준다.1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해석되고 시야가 제한되는 특징”을 도리어 옹호하는 이 변화가 실제로 대세라면 진리주장으로서 ‘총체성’의 남아 있는 흔적조차 말끔히 청산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한 끝에 맞닥뜨린 혼란에 휩싸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부르짖은 리어왕의 회한 어린 자문은 이제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답변과 만나기에 이른 것이다. 당당하기 그지없는 이 답변이 발휘하는 수행적 효과는 ‘나 자신’의 권위를 긍정한 데 있다기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으로 만드는 데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시대정신의 한 발현처럼 ‘나’라는 정체성 자체가 서사의 핵심 주제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렇듯 ‘나 자신’이 세계를 대체할 기세로 부풀어 오른 한편에서, 마치 하나의 주기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듯이 ‘거대서사’에 대한 요구가 서서히 귀환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무엇보다 ‘전체’ 또는 ‘총체’를 향한 인지감수성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 세계가 가진 특이점을 포착하는 핵심 키워드 대부분이 다시금 거대서사의 층위로 돌아갔다. 팬데믹이 그렇고 기후위기가 그러하며 인류세(人類世) 같은 명명 역시 한껏 줌-아웃된 의미장을 조성한다. 한때 ‘전체’의 차원을 상당히 감당하는 듯 보였던 국가라는 단위조차 그에 비하면 도리 없는 ‘로컬’로 비친다. 탈식민주의 역사가로 널리 이름을 알린 디페시 차크라바티(Dipesh Chakrabarty)가 오늘날 ‘종적 사유’(species-thinking)나 ‘지구행성적 사유’(planetary-thinking)를 제안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세계감각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스케일에 접속하고 있음을 뚜렷이 예시한다. 이제 ‘전체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가 된 것일까.

거대서사적 차원이 다시 소환되는 현상은 리얼리즘의 역사에서 때로 그 역사 자체와 동일시되던 ‘총체성을 향한 열망’(the passion for totality)을 연상시킨다. 이 연상에서 새삼 눈여겨볼 대목은 리얼리즘의 총체성 개념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맑스주의 전통이라는 면에서 총체성 개념의 근거는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다른 어떤 체제에 비할 수 없는 규모로 총체화하는 체제이면서 동시에 총체적 인식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든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 개념의 필요성은 자본주의를 체제로서 사유할 필요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체제라는 것이 없다면 체제적 변화를 환기하는 것이 불필요하고 부적절”해지리라는 의미에서 총체성 개념은 “미학적 생산이나 이론적 분석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행동의 전제조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총체성은 일단 전복 자체가 안 된다고 전제한 다음 한결 기준이 낮은 전복성의 인정을 남발하는 비평적 판단의 느슨함을 경계하고, 어떤 것이 진짜 바깥을 넘보는 전복성인가에 관한 탐문을 지속하게 해준다.2

 

그렇다 해도 총체성 개념이 결국은 자본주의를 빈틈없이 완결된 전체로 물신화하지 않느냐는 우려에 관해서는, “맑스에게 자본주의의 ‘총체성’은 위기를 불가결한 계기로서 포함하고 (…) 여기에 깔린 전제는 전체란 결코 진짜 전체가 아니라는 것, 전체에 대한 모든 개념은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3다는 것이라 강조한 지젝(S. Žižek)의 설명이 적실하다. 자본주의를 ‘진짜 전체’ 또는 ‘완결된 총체’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키는 별도의 표현으로 더 최근에 등장한 것이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다. 자본주의적 현실주의라고 풀어 써야 할 이 명명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4을 가리킨다.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이 ‘리얼리즘’이 실제로 초점을 두는 것은 체제의 인식보다는 대안의 부정(否定)이다. 대안이란 곧 환상임을 받아들인다면 내부적 조정을 전복으로 추켜올리는 오류 따위도 범하지 않을 것이니, 단호한 체념이야말로 리얼리티를 대하는 더없이 성숙한 자세라는 식이다.

체제의 변화를 포기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체제적 인식으로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체제의 변화를 강력히 지향하는 방식으로 체제적 이해를 도모한 총체성 개념의 핵심을 거꾸로 잘 부각해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안은 없다’를 중심으로 구축된 이 세계관을 하나의 증상으로 주목하고 오늘날 전체 또는 총체에 대한 사유가 어느 지점에 집중해야 할지에 관한 암시를 그로부터 읽어내는 일이다. ‘대안은 없다’는 구호가 발휘하는 효력을 적절히 평가하려면 그 앞에 놓인 보이지 않는 괄호까지 읽어내야 한다. 요컨대 그것은 (심각한 위기가 있다 한들), (완결된 전체가 아니라 한들), (‘실재’ 같은 구조적 공백이 있다 한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총체화의 여하한 궁극적 ‘불가능성’이 있다 한들)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이 판단은 괄호 속에서 선제적으로 무화된 명제들이 아니라 오로지 대안은 ‘있다’를 통해서만 반박될 수 있다. 리얼리즘적 ‘총체성을 향한 열망’은 언제나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정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 바깥은 그야말로 ‘실정적인’ 리얼리티로서, 감지될 뿐 아니라 엄연히 존속할 리얼리티로서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과는 또다른 방향에서 전체의 사유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도 놓칠 수 없다. 유일한 현실이든 아니든 자본주의는 지속할 수 없는 체제라는 인식이 그것인데, 이 사실은 특히 기후위기에 대한 실감과 더불어 확고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스로를 지속시켜줄 조건들을 훼손하는 모순적 체제로서 자본주의는 우리의 소망이나 계획과 무관하게 어쨌든 종말을 맞이할 것이며 그 바깥은 생성될 것이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기가 더 쉽다’는, 무수히 인용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문장에서도 전과 다른 함의가 읽힌다. 이 말은 애초에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었고, 그래서 마치 자본주의가 끝나면 세상도 끝날 듯이 유일무이한 현실로서 자본주의에 매달리는 태도, 곧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묘사에 가까웠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것, 그래서 자본주의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이 사실의 차원에서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 지금,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용이한 방식이 되었다. 종말(이후)서사가 한갓 도발적인 상상이 아니라 직접적인 비판이자 근본적인 전복으로서의 아우라를 주장하게 되는데, 그런 비판과 전복을 위해 우리 대부분이 종말을 감수해야 한다는 전제는 흔히 간과된다. 이 현상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뒤집힌 형태가 아닐지 의심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더 중요한 점은 이제 진짜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자본주의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분리하는 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종말하지 않은) 세상 속에 ‘실재하는’ 자본주의의 바깥을 발견하는 과제와 다시금 만나게 된다.

 

 

2. ‘예시(豫示)’의 문학과 ‘이행(移行)’의 문학

 

이 시점에서 문학을 향해 한층 무거운 책무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놀랍지 않다. 최근 『뉴래디컬리뷰』의 ‘우리 시대 문학의 자리를 묻는다’라는 특집5은 그런 요청을 뚜렷이 확인할 기회를 제공하는데, 특히 이 문제를 둘러싼 사유의 과제에 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진석은 문학이 실제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례로 이른바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근대국가 성립에서 문학이 한 역할을 상기한다.6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는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논의에서 다루어진 것으로, 앤더슨은 “민족이라는 종류의 상상의 공동체를 재현하는 기술적 수단”인 “상상하기의 두가지 형식”으로 신문과 더불어 근대소설을 든 바 있다.7 민족이 ‘상상’의 산물이라면 그런 상상을 담당하는 소설적 효과가 특별한 중요성을 띠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주장이 설령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문학의 입장에서는 체제의 작동에 기능적 역할을 담당한 그리 자랑스러울 것 없는 역사일 수 있다. 최진석도 “소위 ‘근대 문학’이란 정치와 경제, 사회적 차원에서 이미 형성된 국가를 감싸 안고 덧대는 과정에 참여한 문학이지 새롭게 도래할 공동체를 투영하고 형상화하는 문학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그런 문학이 아니기로 치면 “전근대 사회를 깨뜨리는 데 일조했던 문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사례는 각각 “기성 사회를 파괴하는 문학과 새로운 사회를 공고히 하는 문학”에 그치는데, 최진석에 따르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문학은 ‘그 사이’의 비어 있는 자리, 즉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회를 지금-여기로 끌어당겨 그려보는 미-래적 상상력의 자리”를 채울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로서의 문학”이다(34~35면).

우리 시대의 문학을 향한 최진석의 요청 또는 기대에 공감하는 한편으로, 그가 설명하는 ‘예시의 문학’이 그 기대와 요청을 충분히 담아내는지는 의문이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끌어당겨 예시하는 것 자체는 사실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지금 이대로 살아간다면, 자본주의가 지금 이런 식으로 지속된다면, 우리가 맞이할 미래가 ‘세상의 종말’이리라는 예시가 과학적 추론의 형태로도 제출되어 있고, 그런 과학서사를 참조할 뿐 아니라 때로 ‘예시’한 SF적 종말서사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라는 표현으로 최진석이 실제로 의미한 바는 ‘도래할 예정으로 보이는’ 미래가 아니라 문맥상 ‘도래해야 마땅한’ 미래를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도래했으면 하는 미래를 여기로 끌어오는 일이란 아름답지만 근거 없는 소망 투사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 의문을 우회하듯 최진석은 ‘예시’의 의미를 좀더 다듬으며 ‘공백’ 개념과 연결시킨다. 데리다(J. Derrida)의 해석에 기댄 이 ‘공백’이란 법보존적 폭력과 대비되는 법정립적 폭력이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완전한 무(無)와는 구별된다. 그것은 “새로운 비전이 구축될 수 있는 비가시적 터전을 가리”키며, 그렇듯 “빈 공백을 만들어내는 폭력은 거기에 새로운 삶의 근거를 세울 것을 요청하고, 이를 약속으로써 새겨놓도록 강제한다.”(39면) 최진석은 예시의 문학이 행하는 바가 바로 그런 일임을 잠시 암시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공백이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와 구분될 수 있을지, 또 거기에 새겨질 새로운 약속이 반드시 더 나은 삶에 대한 약속이라는 보장이 있을지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최진석은 “폭력 이후의 세계 속에서 약속 곧 계약을 이행하는 것은, 그것을 발견하기보다 발명하는 작업에 가깝다”(40면)고 인정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실상 빈손으로 출발점에 돌아가는 셈이다.

그러나 공백이나 약속 같은 모호한 수사를 끝까지 붙잡지 않는 점이야말로 최진석의 글이 갖는 차별성이자 달라진 시대감각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물론 그의 논의가 봉착하는 논리적이고 실질적인 난관은 여전히 남는다. 그 난관은 애초에 ‘예시’라는 키워드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지금-여기로 끌어당겨 그려보는 것’으로 설정한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첫째, 그가 말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란 도래해야 하지만 동시에 좀처럼 도래하지 않을 것 같은 미래이므로 그저 ‘예시’하는 것만으로 약속의 힘을 발동시킬 법하지 않다. 둘째, 우리에게 도래해야 할 미래는 (이대로라면) 도래할 것 같은 미래와 양립할 수 없다. 도래할 것 같은 미래, 곧 ‘세상의 종말’이란 ‘지금-여기’ 자체가 끝났다는 뜻인데 그 단절을 순순히 받아들인 다음에는 “약속의 미-래적 형상을 부지런히 탐사하는 것”(66면) 또한 지금-여기의 우리와는 무관한 사명이 된다. 그러니 최진석이 말하는 ‘예시의 문학’이란 ‘지금-여기로 끌어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밀어 올리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특집의 또다른 글에서 박인성은 전에 없이 비평적 주목을 받고 있는 SF 장르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조명한다.8 그에 따르면 이 가능성은 “과학이라는 휘장 아래 미래를 점유하고자 하는 거대 공룡 기업들”(97면)의 행태와 대비될 때 분명해진다. 우주나 메타버스 같은 신세계 탐사를 선도한다는 미래산업은 “미래라는 시간성을 당장의 이익을 위한 투자 종목으로 바꾸고 현재화”하며 그럼으로써 미래의 “시간성에 내포된 미지성의 깊이는 휘발된다.”(102면) 반면 “SF의 하이퍼 스페이스는 납작해진 시간성의 축을 현재에 되살리려는 시도”로서 “무엇보다도 근대성에 기초한 미래 세계의 비전”(103면)에 대한 비판적 도전이다. 그런데 미래산업의 기술낙관주의에 맞서 SF가 되살린 시간성의 구체적인 형태로 박인성이 주목하는 것은 “지도를 잃어버린 세계-없음” 또는 “폐쇄된 우주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미래의 시간성”이다(108면). 그렇다면 “SF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 혹은 현재에 대한 염세주의에 그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되는데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과정에서 박인성의 논의는 상당히 난삽해진다. SF가 비관과 염세에 그치지 않는 이유로 그는 그것이 일종의 “관측”이라는 점을 들고, 그러한 관측이 “현재로 돌아가되 세계-없음의 상황에서 다시 파편화된 것들로부터 삶을 재건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지금 조각난 현실에서 발견하”도록 안내한다고 설명한다(109면).

그런데 앞서 최진석의 논의가 그랬듯이 일단 ‘세계-없음’의 미래를 확인하고 그에 더하여 현실의 ‘파편화’도 인정한 다음이라면, ‘재건’에 필요한 ‘조건’이 쉽게 발견될 리가 없다. 그런 논리적 난점에 직면하여 박인성은 그 조건이란 “역설적으로 이미 도래한 멸망과 파국의 실체들”이며 SF의 가능성은 “지금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을 이미 멸망한 폐허이자 잔재로 발견”하는 일이라 답한다(같은 면). 최진석의 언어를 빌려 말한다면 멸망과 파국이라는 미래를 지금-여기로 끌어당겨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예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예시가 그 자체로 또다른 시간성의 박제 또는 미지성의 휘발일지 모른다는 의문이 생기지만, 분명 박인성이 비판하려 한 미래산업의 기술낙관주의에 대항하는 작업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충격요법으로서 일정한 효력을 갖는다 해도, ‘대안은 없다’가 발휘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떠올리건대, 세상의 종말이 이미 실재한다고 ‘관측’하는 일이 곧 ‘재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앞의 최대 난관이다. 그런 점에서 멸망과 재건 사이에는 ‘역설’이 아니라 ‘심연’이 놓여 있다. 박인성이 제기한 문학의 가능성이란 그 ‘심연’을 가로지르는 일에서 관측되어야 한다.

두 글에서 징후적으로 나타나며 지금 이 글 역시 맞닥뜨리는 문제는, 오늘날 비평이 문학에 어려운 사명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한편에서 비평 스스로 그 사명이 무엇인지 사유하는 데 곤경을 겪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대안을 상상하기가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대안 상상하기를 상상하기조차 힘들어졌음을 나타낸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위력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대목인데, 두 글이 공통적으로 드러낸 난제의 본질은 특집의 다른 글에서 좀더 분명해진다. “문학이 수행해야 할 사유와 비판의 기능이 현저하게 퇴보한 자리를 ‘감각과 정동’”으로 메워왔다고 비판하는 황규관의 글9은 오늘의 문학에 필요한 것이 “‘산업과 기술 그리고 경제’에 응전하는 사유” 곧 ‘사상’임을 강조한다(76~77면). 이어 그는 “문학이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이 강제하는 새로운 감각과 감성의 변화를 넘어서 사유와 상상력을 통한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것”이라 설명한다(78면).10 ‘감각의 재분배’라거나 ‘탈주의 실행’, 또는 ‘타자의 재현’이나 ‘당사자의 발화’ 같은 규정에 비해 ‘현실의 변화’는 분명 좀더 포괄적인 요구이며, 문학이 거대담론의 차원을 전면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문학의 사상이란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것’이라 한 문장이다. 그는 왜 ‘사유와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더욱이 통상 ‘꿈꾸는 것’과 동일시되는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이미 쓰고도) 끝맺지 않았을까. 여기서 느껴지는 모종의 주저는 황규관이 “문학의 새로움은 오직 현재 역사에 대한 초월의식을 통해서만 배태되”리라 주장한 다음 곧이어 “그것은 다시 ‘근대의 괴로움’ 혹은 ‘언어 이전의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91면)할 것이라 덧붙이는 데서 재차 감지된다.11 ‘현실의 변화’에서 ‘꿈꾸기’로, ‘초월’에서 ‘괴로움’으로 물러나는 이 주저는 앞서 언급한 ‘심연’과 맥락이 닿아 있다. 황규관은 문학이 현실의 변화를 꿈꿔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그 변화를 직접 지시하거나 변화의 경로를 확정하는 것은 아니다”(78면)라고 잘라 말한다.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하자는 식의 오래전 선전문학이나 관변문학의 폐해를 상기한 발언일지 모르지만, 여기서 ‘직접’이나 ‘확정’ 같은 극단적인 표현만 떼어놓으면, 변화를 지시하고 변화의 경로를 정하는 일이야말로 변화를 꿈꾸는 일의 핵심이 아닐까?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문학이란 정확히 변화의 경로를 사유하고 상상하는 ‘이행의 문학’이기를 지향해야 하리라 본다.

 

 

3. 대안보다 먼저 일어나는 이행

 

이행은 예시와 다르게 지금-여기에서 출발하여 심연 같은 간극을 한걸음씩 채워야 하고, 이 과정이 참된 이행이기 위해서는 또한 ‘전체’를 시야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다가갈 ‘도래하기 어려운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만큼이나 다양하게 제출되어 있다. 민주주의와 정의와 평등 같은 전통적인 좌표에 탈성장, 돌봄, 재생산 같은 가치들이 그 미래를 떠받칠 대안적 기둥으로 새로이 보태어지며 사회주의라는 오래된 이름마저 다시 거론된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위력을 뿌리치려면 뭔가 더 큰 모멘텀이 필요하다는 느낌도 여전하다. 자본주의가 뻔히 예상되는 ‘세상의 종말’마저 불사할 기세인 만큼, 이행 역시 세상의 종말처럼 보이는 ‘심연’에 기꺼이 한발을 내디뎌야 하지만, 그런 일은 (종말을 경고한다고 해서 되지 않는 만큼이나) 대안을 예시한다고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 점을 일깨우는 표현이 브뤼노 라뚜르(Bruno Latour)가 말한 ‘유인자’(attractor)이다.12 라뚜르는 벡터를 전환하고 싸움의 전선을 바꿀 방도, 다시 말해 그의 방식으로 이행을 수행할 방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끌어당긴다’는 의미를 갖는 이 표현을 구사한다. 라뚜르가 펼치는 ‘거대서사’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보편성”을 경험하고 있고 이는 “지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의 공유”(28면)로 정의된다. 기후변화와 그에 관련된 위기로 인해 우리 모두, 그러니까 이미 오래전부터 정복과 식민 지배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들을 쫓아낸 사람들까지 포함한 전체로서의 우리가 살아갈 땅을 잃는 것이다. 새로운 보편성은 후진적인 ‘로컬’과 근대화된 ‘글로벌’이라는 양극 또는 두 ‘유인자’로 이루어진 근대화의 좌표계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라뚜르는 현재의 상황을 “이로써 근대 세계라는 표현이 마치 형용모순처럼 되었다. 근대적이지만 발아래 아무 세계도 없는 상황, 또는 세계가 실로 존재하지만 근대화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분명한 역사적 분기점에 도달했다”(56면, 강조는 원문)고 묘사한다.

새로운 보편성은 근대화 좌표 바깥에서 영향을 미치는 또다른 유인자의 존재를 감지하게 만들지만 이 유인자의 성격이 분명해지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주의로 대표되는 네번째 유인자의 등장 때문이다. 라뚜르는 이 유인자를 ‘외계’(Out-of-This-World)로 이름 붙이고 “지구의 현실에 더는 개의치 않는 사람들의 지평선”(58면)이라 설명한다. 그가 말한 ‘외계’ 유인자를 더없이 생생하게 묘사한 사례가 「돈 룩 업」(Don’t Look Up, 2021)일 것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정계-재계-언론계의 카르텔은 모두가 살아갈 땅인 지구가 부서지는 세상의 종말 따위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결국 문자 그대로 ‘외계’로 향할 그들만의 구명선을 만들어 미련 없이 지구를 뜬다.13 몇년 전까지만 해도 과장에 기댄 블랙코미디로 보였을 이 영화가 알레고리의 거리감마저 뛰어넘어 생생한 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 ‘외계’ 유인자의 실재성을 입증한다. ‘유인자 4’의 등장에 따라 이제 그 대립항으로서 성격이 분명해진 ‘유인자 3’을 라뚜르는 ‘대지’(Terrestrial)로 명명한다.

여기서 ‘유인자’라는 표현은 언뜻 자석의 극처럼 가만히 있어도 우리를 끌어당긴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뚜르가 주목한바 ‘대지’라는 새 유인자가 야기하는 당장의 결과는 무엇보다 “기존의 비행항로를 따른 방향 설정을 불가능하게 만”(56~57면)드는 것이며, 양극을 이룬다는 점에서 또다른 새 유인자 ‘외계’를 더 강화할 위험마저 내포한다. ‘대지’의 방향 교란 때문에 “누가 협조자이고 누가 배신자인지,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 누구와 동맹을 맺고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이제는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길을 찾아 나가야”(57면) 한다. 그러니 유인자란 저절로 그쪽으로 밀려가게 만든다기보다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것에 제대로 유인될 태세를 갖추도록, 다시 말해 라뚜르 자신이 그랬듯이 유인자의 이름을 짓고 그것을 향해 지도에 없는 길을 만들도록 이끈다. 그러니 ‘유인’이란 유인자의 (유인하는) 작용과 관계되는 만큼이나 우리가 스스로에게 (유인되도록) 하는 작용과 관계된다.14

라뚜르는 ‘대지’ 유인자로 방향을 튼 대표적 움직임이라 할 생태운동이 “사안의 중요성에 걸맞은 규모로 동원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19세기 이후 사회 문제가 불러일으킨 격정의 힘”을 적절히 이어받는 “에너지 전파”(85면)에 실패했다고 평가하고, 그 이유를 “애초에 힘을 발휘할 수 없게 하는 좌표만을 사용했기 때문”(75면)으로 진단한다. 이를테면 “‘퇴보(regress)’하자는 호소”나 “천천히 쪼그라드는 법을 배우자는 프로젝트”처럼, 여전히 근대화 좌표에 매여 있는 방식으로는 이미 “부모 세대보다 더 잘 살기 어려운” 시대의 “군중을 열광시키기는 힘들다”(76~77면). 라뚜르의 전체 논지에서 강조되는 점은 “생태학이 지고(至高)의 정치적 행위자인 대지를 〔그 자신이 하고 있는 것만큼—인용자〕 충분히 엄밀하게 정의하지 못했다”(85면)는 점이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유인자를 향해 유인될 수 있도록 “우리가 정치적 정동을 쇄신하는 데 뒤처졌다”(82면, 강조는 원문)는 지적이다. 부인할 수 없이 중요한 유인자조차 기꺼이 유인되려는 정치적 정동의 동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러 대안적 가치들이 실제로 제안되고 있음에도 ‘대안은 있다’가 좀처럼 대세가 되지 못하는 사정도 이와 마찬가지로 유인되려는 에너지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단순히 동의를 얻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삶의 중심에서 강렬하고 지속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만 대안의 존재감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을 발휘하지 못할 좌표에서 벗어나는 일 역시 대안적 가치들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의 포기나 부정이 아니라, 아니 포기나 부정이라도, 그 자체로 우리의 온 삶이 유인되어 마땅할 매혹적이고 충만한 것임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그 발견의 과정은 곧 대안의 매혹과 충만함이 비로소 생성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유인되는 정동을 통해 유인하는 작용이 발동하는 것이라면, 정확히 그런 만큼은 이미 일어난 이행만이 대안을 만들어낸다고도 말할 수 있다.

 

 

4. ‘빈 나무통’에 대한 믿음

 

대안보다 먼저 일어나는 이행으로서의 에너지와 정동과 욕망을 생각하는 이 지점에서 로런스(D. H. Lawrence)가 소설을 논하며 펼친 ‘이행론’의 한 대목, “이 전체 구조 밑에 폭탄이 하나 놓여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자 할 것인가? 어떤 느낌을 끝까지 지속하여 다음 시대로 진입하고 싶은가? 어떤 느낌이 우리를 거기까지 도달하게 해줄 것인가?”15에서의 ‘느낌’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에너지와 정동, 욕망과 느낌에 관여하는 것이 문학 본연의 일이라면, 그것들이야말로 이행의 문제임을 거의 ‘메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다른 삶으로의 유인과 그 유인에 연루되는 정동의 문제가 철저하게 마이너스의 형식으로 그려진 예를 정지아의 「자본주의의 적」(『자본주의의 적』, 창비 2021)에서 볼 수 있다. 소설의 제목은 그 노골성으로 미루어 아이러니임을 애초에 선언하는 듯하고, 이런 제목이 붙은 소설에 무슨 반체제 활동이 다루어질 리 없다는 메시지를 사전에 전달한다. 결말에서 화자 역시 여기에 그려진 ‘자본주의의 적’이 “자본주의의 실질적 위협이 될 수는 없다”(43면)고 못 박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너무 분명한 아이러니 속에는 거의 수줍게 숨겨진 탐구가 있다.

소설의 서사는 ‘자본주의의 적’으로 호명된 방현남을 필두로 한 ‘자폐가족’의 보고서에 가깝다. 이들은 돈끼호떼식의 터무니없는 허세와 안쓰러운 시대착오로 우리의 풍자와 연민을 자극하는 대상은 아니다. 멜빌(H. Melville)의 그 유명한 바틀비야말로 이 소설의 상호텍스트적 비교 대상임이 분명한데, ‘차라리 안 하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단호한 대사가 함축하듯 온갖 유인을 뿌리치는 가공할 의지로써 자신의 의욕 없음을 관철시킨 바틀비식 거부는 기존 질서 바깥에 “진정한 행위의 공간을 열어주는 급진적 제스처”16로 평가받기도 한다. 반면 방현남이 “수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터득한 “비기”는 “자기 존재를 지우”며 그야말로 고요하고 희박하게 살아가는 것이다(14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결단코 하지 않는 것이 바틀비의 방식이라면, 숱한 ‘기꺼이 하렵니다’들, 곧 성장과 발전과 상승 일체를 포함한 새로움의 ‘확대재생산’ 욕망에 유인되지 않는 것, 자본주의적 유인이 자신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몸을 숨긴 채 ‘단순재생산’17의 삶을 사는 것이 방현남의 방식이다. 이 둘 사이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시기에 따라 정동을 동원하는 지배적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이론가들로부터 인정받은 바틀비식 반체제성의 반대급부는 바로 그 자신의 삶의 소진을 전제로 한 저항이라는 사실이며 그 점이 그의 ‘급진적 제스처’의 지속 불가능성(및 근본적인 유인 불가능성)을 입증한다. 반대로 방현남의 방식이 반체제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지속 가능성, 다시 말해 체제가 방현남의 생존을 허용해주는 것으로 드러난다. “욕망이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자폐가족들이 현남처럼 몸을 숨긴 채 누구에게든 어떤 시대에든 고요히 스며들어, 저 태곳적의 유전자를 보존하며 은밀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욕망덩어리의 세계도 폭발하지 않고 지속되는지 모른다”(28면)는 대목에서는 심지어 체제의 원만한 작동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암시마저 읽힌다. 그렇더라도 체제로부터의 ‘물러남’이나 바깥으로의 ‘탈주’에 대한 주장들을 고려할 때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방현남의 비기를 발동한다면?이라는 가정은 여전히 의미심장할까? 「자본주의의 적」은 애초에 그런 가정이 성립할 수 없고 그래서 이 질문이 사실상 부질없음을 보여준다. 정동의 제거를 통한 정동의 쇄신이란 불가능하고 에너지 결핍을 토대로 에너지 전파를 도모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느낌과 정동의 강렬한 거부나 희박한 부재로 우리의 시선을 끌고 또 어느정도는 우리의 마음을 끄는 예외적 인물들은, 같은 이유로 우리의 삶을 유인하지는 못한다. 이 소설에서 방현남과 자폐가족 역시 화자 정지아에게 끝내 어떤 “위안”(43면)이 될 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강렬한 정동으로 장전한 채 ‘단순재생산’의 삶에 진입한 인물이 권여선의 소설 「이모」(『안녕 주정뱅이』, 창비 2016)에서의 ‘이모’ 윤경호다. 화자의 시이모를 가리키는 이 인물은 부친이 사망한 대학 1학년부터 줄곧 가장 역할을 떠맡아 어머니를 부양하고 남동생 도박 빚을 해결하느라 사랑하던 이와의 결혼 기회도 잃은 채 가족에 저당 잡힌 삶을 살다가 2년 전 도려내듯 서늘하게 그 모든 관계를 끊고 잠적한 바 있다. 이제 췌장암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여동생과 연락이 닿은 참이었다. 단호히 퇴원을 택한 이모는 글 쓰는 사람이라는 데서 흥미를 느꼈는지 화자를 집으로 초대하고 이후 화자가 이모를 규칙적으로 방문하면서 그의 삶의 면면이 펼쳐진다. 이 소설의 흡인력은 결단을 통해 기존의 관계와 삶 ‘바깥’으로 나간 이모의 마지막 나날에 담긴 독특한 매력에 기댄다. 극단적 ‘미니멀리즘’을 체현한 듯 “수녀의 방처럼 텅 비어 있”는 집에서 이모는 “실제로 수녀처럼 살고 있”다(82~83면). 도서관에서 책 읽는 것을 주요 일과로 삼아 절제된 규칙성을 구축한 그녀의 금욕적인 삶은 그러나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다. 거기에는 하루 네개비의 담배와 일주일 한번의 술과 소박하지만 정성 들인 요리, 그리고 이제 화자와의 우정이 있다. 소설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이모의 생활비도 상세히 묘사하는데, 이를 알게 된 화자가 잔뜩 사 간 물건들을 이모는 도로 가져가게 하면서 “나는 내 가난에 익숙하고 그게 싫지 않다. 우리 서로 만나는 동안만은 공평하고 정직해지도록 하자”(86면)고 제안하고 실제로 그런 관계를 맺는다. 이모의 담백한 성격과 그에 조응하는 소박한 삶에 대한 묘사는 제임슨이 “현재의 유토피아적 사유를 구성하는 특징적 대립”을 설명하며 언급한, 쾌락의 유토피아와 대립하는 “프란시스코식 유토피아라 할 수 있을, 말하자면 결핍과 청빈의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한다.18 소설에서 이 ‘유토피아’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명백한 조건을 한계로 가질망정, 아니 그 한계를 명백히 드러내기 때문에 오히려 사실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이모가 어떻게 해서 이런 삶에 이르렀는지 화자가 알아가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이 사실적 유토피아를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무너뜨린다. 이모의 결단으로 발생한 단절을 되짚어 개연성을 강화하는 과정이 도리어 단절로서의 의미를 잠식하는 것이다. 소설은 이모가 독립과 청빈의 삶에 이른 동기로 과거에 져야 했던 짐과 포기해야 했던 기회 그리고 현재의 피할 수 없는 죽음만으로 부족하다는 듯, 차곡차곡 쌓여 있던 증오와 두려움을 유난히 들쑤신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난 어느 겨울날의 기억을 배치한다. 깊숙이 숨어 있다가 마침내 떠오른 가해의 기억, 순하게 내민 손을 담뱃불로 지졌던 그 기억이 지금의 이모를 만든 결정적 동기로 부상하게 되면서 이제 ‘청빈의 유토피아’에는 일종의 ‘자기처벌’이라는 도착성이 스며든다. 화자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이모는 그 가해가 자신을 살게 해주었음을 핵심적 진실이자 수수께끼인 듯 고백하는데, 그에 상응하는 안티클라이맥스는 이모가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106면)라고 한 부분이다. 이 토로와 함께 이모의 삶은 스스로 가진 유인 에너지를 결정적으로 부인하고 만다. 소설 마지막에 이모의 유산으로 남겨진 통장의 숫자를 바라보는 화자에게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107면)진 것은 그 부인의 당연한 귀결이다. 불가촉의 거리가 남고 소박하고 짧은 유토피아적 삶과 우정은 남겨지지 않는다.

두 소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행한 정동 또는 유인 에너지의 ‘문제화’를 짚어보며 어쩌면 문학이 가장 확신하지 못하는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가 지닌 이행의 역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올바른 정치와 예민한 윤리가 아니고, 현재의 비판과 미래의 예시도 아니며, 심지어 ‘다음 시대로 진입하게 해줄’ 느낌마저 아니라, 느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그 자체가 문학에서 가장 흐릿하게 존재하는 게 아닐까.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는 기후위기가 곧 상상력의 위기임을 말하며 사회와 자연을 그려온 소설적 관습에 따르는 한 기후위기나 인류세의 지구란 개연성을 초과하는 사태로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19 하지만 라뚜르는 “평온하게 보편적 근대화의 지평선을 향해 있던 사람이 어떻게 자진해서 세 번째 유인자를 향해 방향을 틀겠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의 실마리를 소설을 통해 설명한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응시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 소설, 「큰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서」에 나오는 영웅 같은 처신을 하는 사람이다. 그 유일한 생존자와 다른 익사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로포텐 제도 출신의 나이든 뱃사람이 소용돌이 속에서 잔해물의 회전을 냉정히 주시했다는 점이다. 배가 심연으로 빠져 내려갈 때, 빈 나무통에 매달려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탈출이 가능하다고 믿고, 떠다니는 난파물 조각 모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나이든 선원처럼 빈틈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면 왜 어떤 잔해들은 바닥에 가라앉지만 어떤 것들은 그 형태 때문에 생명을 건질 도구가 되는지 문득 이해할 수 있게 된다.(70~71면)

 

‘난파물 조각 모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야말로 문학이 언제나 해왔고 또 해나갈 일이다. 이제 ‘탈출이 가능하다고 믿고’ 그 ‘빈 나무통’을 새로이 응시하자.

 

 

  1. 정주아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참조. 인용은 56면.
  2. 황정아 「리얼리즘과 함께 사라진 것들: ‘총체성’을 중심으로」, 『개념비평의 인문학』 창비 2015, 227~28면. 따옴표 안의 대목은 Fredric Jameson, Valences of the Dialectic, Verso 2010, 299면, 77~78면.
  3. Slavoj Žižek, Less Than Nothing: Hegel and the Shadow of Dialectical Materialism, Verso 2012, 523면.
  4.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10~11면.
  5. 『뉴래디컬리뷰』 2022년 가을호 참조. 이하 이 책의 인용은 괄호에 면수만 표기.
  6. 최진석 「역사 이후, 새로운 사회계약의 탄생」, 같은 책.
  7.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Verso 2006 참조. 인용은 각각 26면, 25면.
  8. 박인성 「SF는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같은 책.
  9. 황규관 「문학과 사상, 그리고 문학 사상」, 같은 책.
  10. 이런 진단에도 불구하고 그가 감각 또는 정동을 사유와 엄밀히 분리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점을 특별히 따져 물을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11. ‘근대의 괴로움’은 백낙청의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황규관이 근대적응이란 ‘근대의 괴로움’으로 읽어야 “조금 더 민중적인 상태를 표현”(88면)할 수 있다는 대목과 이어진다. ‘언어 이전의 고통’은 김수영의 표현이다. ‘근대적응’, ‘근대의 괴로움’, ‘언어 이전의 고통’이 그렇듯 등치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12.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이하 이 책의 인용은 괄호에 면수만 표기.
  13. 그런데 이 영화에서 우주선을 타고 유유히 떠나는 대통령을 위시한 특권층과 그들이 꼼짝도 못하는 초거대기업가들보다 더 눈길을 끄는 집단이 언론인들이다. 우주선에 타지도 못할 그들이 체현한,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거의 ‘순수한’ 니힐리즘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섬뜩하다.
  14. 라뚜르가 ‘객체-지향 정치’를 옹호하며 ‘대지’가 “인간 행동의 환경 또는 배경”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66면, 강조는 원문)임을 강조하는 만큼이나, 그것을 향해 방향을 틀고 에너지를 그쪽으로 집중시키는 우리의 행위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렇듯 ‘대지’ 유인자로 향하는 경로 위에 전선을 새로 긋고 로컬과 글로벌 유인자에 끌렸던 이들을 이 새 전선으로 방향을 틀게 만드는 일은 이 책의 영어 제목인 ‘Down to Earth’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15. D. H. Lawrence, “The Future of the Novel,” Study of Thomas Hardy and Other Essay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154면.
  16. Slavoj Žižek, The Parallax View, MIT Press 2006, 342면. 바틀비의 ‘급진성’에 이처럼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론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가진 문제적 성격을 밝힌 논의로는 한기욱 「근대체제와 애매성: 「필경사 바틀비」 재론」, 『안과밖』 2013년 상반기호 참조.
  17. ‘단순재생산’이 갖는 대안적 의미에 관해서는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참조할 수 있다. “헤겔은 ‘악무한’(bad infinity)과 ‘선무한’(good infinity)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선무한은 스스로를 영원무궁하게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이다. 선무한의 수학적 표현은 원이다. 그런데 원이 나선이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사태는 통제불능이 된다. 자본은 지금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고 있다. 어떻게 해도 그 무한성을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통제불능이 되는 것이다. 그저 멀리, 더 멀리 나아갈 뿐이다. (…) 악무한이야말로 자본의 속성이다. 우리는 선무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맑스는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재생산의 본질과 사회질서의 재생산, 그리고 우리가 재생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자본』 제1권과 2권 모두에서 그는 단순재생산의 선무한성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데이비드 하비 「실현의 위기와 일상생활의 변모」, 백영경 옮김, 『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 94면.
  18. 프레드릭 제임슨 「유토피아의 정치학」, 『뉴레프트리뷰 2』, 길 2010, 371면. 권여선의 같은 책에 실린 또다른 소설 「봄밤」을 금욕과 쾌락의 두 유토피아적 충동의 얽힘과 연관 지어 분석한 글로는 졸고 「소설의 철학, 그리고 ‘다음은 뭔가?’」, 『문학동네』 2016년 겨울호 533~36면 참조.
  19.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1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