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스티븐 로 『철학학교』1·2, 창비 2004

미로의 철학학교, 영원한 여정의 건물

 

 

권희정 權希貞

상명사대부속여고 교사 redpride@chollian.net

 

 

철학

스티븐 로(Stephen Law)의 『철학학교』(The Philosophy Gym, 하상용 옮김)는 미로로 이루어진 철학의 건축물이다. 이 미로는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연상케 한다. 보르헤스의 미로는 각각 독립된 방들로 무한히 이어져 있으며, 각 방은 전체의 중심이다. 이 도서관에 들어선 사람은 방들을 따라 끝없는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예로부터 미로는 그 자체로 우주이며, 지식의 심연이고, 삶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의 여정을 의미해왔다. 인간과 세계에 관해 탐구하면서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지적 탐험의 공간인 셈이다.

『철학학교』에 들어선 여행자들 또한, 이 건물 속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로질러 돌아다니건 매우 치열한 철학적 문제를 만나게 된다. 여행자가 거쳐가야 할 교실은 총 25개로 나뉘어 있지만, 그 안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서로 연결되고 확장되면서 커다란 진리의 망을 이룬다. 꼭 교실의 순서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여행자는 원하는 곳이면 아무 곳에나 머무를 수 있다. 입구도 출구도 정해진 스케줄도 없이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으로 운영되는 학교이다. 각 방 안에서 다루는 주제는 세계의 기원, 신의 존재, 시간의 인식, 예술의 정의, 기계의 사고, 타인의 마음 등 언뜻 보기에도 골치 아픈 내용들이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선뜻 들어서기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이 가진 뛰어난 미덕은 각 교실의 내부 씨스템을 전문 철학자가 아닌 일반인의 수준에 맞추어 구성한 점이다. 교실들은 공연장이자 토론장인데, 들어서면 곧바로 연극이 시작된다. 한 교실에서는 하느님과 기독교 신자가 동성애 문제를 가지고 서로 성경을 들이대며 논쟁을 벌이고 있다. 기발하고 신선한 설정이다. 다른 교실에서는 서기 2100년의 로봇과 그 주인이 기계와 인간이 가진 마음의 차이에 대해 논쟁을 한다. 또다른 곳에서는 치과의사와 환자가 타인의 마음(Other mind problem)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토론한다. 25개의 교실에서는 이렇듯 누구나 궁금해하고 상상가능한 사례를 철학의 중심문제로 삼아 치열하게 다룬다.

공연의 막간에는 전문 철학자들이 나와서 훈수를 둔다. 데까르뜨, 칸트, 흄, 비트겐슈타인, 버클리 등 쟁쟁한 철학자들은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출연한다. 그들은 화려한 명성에 걸맞지 않게 손님이다. 주연은 오히려 부부, 친구 등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유명 철학자의 사상을 검토하거나 비판하면서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스스로 사고하기’를 강조하는 장치이다.

여행자는 이 토론극을 보면서 ‘누가 더 좋은가’가 아니라 ‘누구의 논증이 더 나은가’를 따져보게 된다. 그리고 해답보다는 논거를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의 잘 짜인 논증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논쟁자들은 모두 ‘말발’이 보통이 아니다. 독자가 따라가기 숨찰 때는 어김없이 삽화가 등장하여 난처함을 덜어준다. 그림은 논증의 내용을 압축해주기도 하지만, 느닷없이 또다른 충격을 던져주고 도망가기도 한다. 기나긴 철학적 논변을 단지 그림 하나가 통째로 대신할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는 『철학학교』지만 명확한 결론이나 해결책에 도달하는 교실은 없다. 오히려 따져보아야 할 더 복잡한 조건들이 한 아름씩 남는다.저자는 논리적 궁지에 봉착한 난제들을 재확인하고 정리할 뿐이다. 사고 실험을 따라가며 지적 경련을 경험한 학생 중에 뚜렷한 정답이 없어 답답함을 느낀 사람이 있다면, 다음 두 가지 행동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주연들이 풀지 못한 문제를 가지고 주변사람들과 함께 직접 토론해보는 일이다. 철학은 ‘활동’이며, 이 책을 활용하는 최선의 방법은 ‘참가’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사고를 재검토하고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것(extreme thinking), 저자인 스티븐 로의 애정어린 부탁이 이것에 닿아 있다.

다른 하나는, 각 장의 마지막에 저자가 제시해주는 가이드라인을 따라가보는 일이다. ‘생각 넓히기’에 나오는 저자의 조언들은 독자가 체계적인 논증 코스를 부담없이 따라가도록 도와준다. 예를 들어 ‘귀납적 지식에 대한 회의주의’를 다루고 있는 2권 2장의 마지막 안내방송을 들어보자. “1권의 3장과 8장에서는 다른 형태의 회의주의를 소개합니다. 3장에서는 외부세계에 대한 회의주의를, 8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회의주의를 다루고 있지요.”(57면) 이러한 안내는 회의주의에 대한 다차원적 이해를 유도하고 여행자가 또다른 교실로 찾아가게 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2장에서 생긴 궁금증을 가지고 8장으로 찾아가는 여행자는 한층 새로운 인식으로 미로를 탐색할 것이다. 논점을 따라 행하는 ‘교실 넘나들기’는 문제를 유기적 관점으로 보게 하고, 경쟁 이론이나 논증 방식에 대한 탐색능력을 키워줄 것이다. 마치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경험을 제공한다. 모든 지식은 연결되어 있고, 각각은 독립적으로 성찰된다. 이렇게 주제나 논증을 따라, 새로운 문제의식을 따라 돌고 도는 미로여행은 우리들을 더 깊은 심연으로 영원히 유랑하게 만든다.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학제적이고 근원적 인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그 형식과 내용을 탁월하게 일치시키고 있다.

하지만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없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세계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시간여행은 가능할까?” “왜 내일도 태양이 떠오르리라고 기대할까?”와 같이 철학적으로는 중요하나 일반인이 선뜻 중요하다고 여기기 어려운 물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인이 이 질문들에 대해 궁금해했다 할지라도 스스로 알아서 삶과 연관된 중요한 문제로 깨닫기는 어려울 것이다. 각 장의 도입부는 일반인이 그 주제에 호감을 갖도록 하기보다는 철학적 논변을 깔끔하게 전달하기 위한 내용으로 시작된다. 철학적 무게와 대중성의 확보라는 두 가지 요건을 전자는 내용에 후자는 형식에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5장의 텍스트가 전부 즐겁게 읽히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주제로의 친절한 안내가 다소 부족한 까닭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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