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이라는 서사

 

미완의 문학사라는 가능성

‘문학성’ 회의론이 감추고 드러낸 것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평론집 『리얼리티 재장전』, 공저 『개벽의 사상사』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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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재난에 가까워진 국내정치 상황 때문인지 ‘눈 떠보니 선진국’은커녕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는 자조가 오히려 성행하는 요즘이지만 한국의 달라진 세계적 위상을 떠받치는 토대들은 그런대로 건재한 편이다. 이제는 한국이 서구문화의 일방적 수신처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새로운 문화와 가치를 전파하는 발신지가 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곤 하는 한류 열풍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작품 대신 콘텐츠라는 용어가 범람하는 데서 보듯 그것이 ‘성공한’ 문화상품 이상은 아니라는 진단에서부터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문명 전환의 잠재력을 지닌 무엇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평가들은 다양하지만, 한영인이 넷플릭스(Netflix)의 「오징어 게임」(2021)과 「지옥」(2021)을 분석하는 자리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를 가려내는 기준 가운데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이 드러내고 있는 말기적 증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영감을 얼마나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를 빼놓을 수 없을 것”1임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기준은 대중문화산업에 비해 자본에 대한 예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여겨져온 ‘순수예술’ 분야에 주로 적용되어왔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열어줌으로써 문화적 혁신”(한영인, 64면)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2016년 말 이후 촛불혁명을 통과하는 중인 한국사회에서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이 지닌 잠재력을 변별하는 데 목을 매야 할 이유는 없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한국사회가 집합적으로 이룩하는 협동적 창조의 양상”(같은 면)이 낡은 분할선의 어느 한쪽으로 제약될 수 없음은 물론, 그 분할선 자체마저 유동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한류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 한류의 발전이 한국사회가 이룩한 민주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신의 희생 속에 국민이 쟁취한 자생적 민주주의라는 데”2에 그 원동력이 있음을 간파한 김대중의 통찰은 어느 방향에서든 아직 유효하다.

그런데 관심의 초점을 이 글의 주제인 한국문학으로 좁혀보면 대중문화 부문의 활기와는 사뭇 다른 흐름이 포착된다. 한국문학의 세계적 위상이 점진적으로 높아가는 데 비해 국내적으로는 장기침체의 늪을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는 진단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찰에는 정확한 현실인식을 훼방하는 요소들도 더러 끼어 있어 주의를 요한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한국문학’의 범주를 너무 좁게 생각하는 사고습관이 개재되어 있다. 장기침체에 허덕이는 ‘한국문학’이라는 이미지에는 그림책과 동화를 포괄하는 어린이·청소년문학이 자주 누락되고 반드시 성인독자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보기 어려운 웹소설이나 장르문학 등 ‘대중문학’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특히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가 맨부커상을 수상(2016)한 이래 여러 해외 문학상 수상작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국내독자(당연히 성인독자를 포함한다)의 호응을 바탕으로 한 어린이·청소년문학 분야의 해외 진출과 문학상 수상은 그보다 더 활발했고 한국 장르문학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 또한 점차 커가고 있다. 소위 본격문학과 대중문학, 아동문학과 일반문학의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구획에서 한걸음 떨어져 나오면 조금은, 아니 어쩌면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의 한국문학의 침체란 한국문학 가운데서도 이른바 본격문학의, 침체 가운데서도 국내 시장실패 차원을 제한적으로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하다. 그런데 ‘본격문학’의 시장실패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에 이것이 지금에 와서 유독 강하게 의식되고 소환되는 특별한 조건이 따로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화, 드라마, 대중음악 등 여타 문화산업의 질적·양적 성장이 가져온 대비효과가 큰 몫을 차지하지만 내부 요인도 없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올수록 학계와 비평계에서 ‘문학성’에 대한 회의론들이 확산되고 있는 현상은 하나의 지표다.

문학성이란

  1. 한영인 「‘한류’와 협동적 창조의 가능성」,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51면.
  2. 장신기 「아시는가, 김대중이 ‘한류 개척자’였다는 사실을」, 오마이뉴스 2022.8.18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