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이라는 서사
미중 패권경쟁 시대, 다시 돌아보는 동아시아론
백지운 白池雲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조교수. 저서 『항미원조』 등이 있음.
febwtly@snu.ac.kr
1. 중국의 부상과 동아시아론의 위기
지금 우리는 훗날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중대한 전환기를 살고 있다. 우끄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남중국해 및 대만해협에서 고조되는 긴장은 강대국의 충돌을 관리해온 차가운 평화의 체제가 근저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1940년대 미·영·소 세 강대국이 세계질서를 관리하는 얄타체제의 구상은 1950년대 미소 ‘평화공존’의 네오 얄타체제로, 1970년대 이후에는 미중 적대적 공조체제1로 변형을 거치며 지속되었다. 그러나 미중관계가 전략경쟁체제로 전환되고 러시아 변수까지 가세한 지금, 미래의 향방을 예측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인도-태평양 이니셔티브’ 두 거대한 지역전략이 대결체제를 잡아가는 목전의 형세는 적어도 다가올 미래가 미중 양국간 경쟁을 넘어 전세계 수많은 국가들을 행위자로 불러들이는 전면적이고 복합적인 아레나가 될 것을 예고한다.
이 거대한 변화에 직면하여 지난 30여년 지적·실천적 운동으로서 학계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동아시아 담론의 평가와 전망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지금의 변화된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대응하는 데 동아시아론이 여전히 적실한가 아니면 청산의 수순에 접어들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어느 쪽이든 동아시아론이 위기를 맞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창비가 발신했던 동아시아론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쇄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 속에 방향을 잃었던 한국사회의 저항담론에 새로운 창을 열어주었다. 사회주의권과의 국교 수립, 세계화의 바람 등으로 일상적·인식적 시야가 비약적으로 확대되면서, 동아시아론은 학문적 범주를 넘어 시민운동, 국가정책 담론으로까지 폭넓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담론으로서의 동아시아론이 어느샌가 일상 속 포화상태가 된 동아시아를 넘어서는 진전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정체상태에 들어선 것이 사실이다. 미중간 패권경쟁체제가 동아시아에 예의 냉전시대의 분열과 대결의 기억을 불러내는 지금, 탈냉전이라는 시대의 전환을 맞아 한국 지식계가 선도적으로 제기했던 동아시아론에 대한 점검은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동아시아론이 지금도 유효한가라는 무거운 질문의 타래를 푸는 두서를 2022년 『동방학지』 특집좌담에서 잡아보고자 한다. 잡지 200집을 기념하는 좌담2에서 창비 동아시아 담론의 발신자 중 하나였던 백영서는 최근 동아시아론이 위기를 맞은 원인을 두가지로 간추렸다. 첫째는 시대적 분위기의 변화이다. 동아시아론이 제기된 시기는 냉전적 대결을 넘어 탈냉전 화해의 분위기가 한국사회에 넘쳐흐르던 때였다. 사회 전반적으로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고자 하는 열망이 높았고 새로운 문명에 대한 관심도 컸으며 남북관계 또한 호전되는 추세였다. 그런데 이제 미중 경쟁체제가 본격화되고 기층에서도 서로에 대한 호감보다 혐오의 감정이 증대하면서 동아시아론이 급격히 설 자리가 좁아졌다는 것이다. 두번째 요인은 중국의 부상이다. 1990년대 당시만 해도 중국은 한반도의 남쪽에 갇혀 있던 반국(半國)이라는 지리적 상상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창이었고, 또 그런 중국을 상대화·역사화하는 데에도 동아시아론은 유용했다. 그러나 지난 10여년 중국의 급격한 팽창과 그것이 야기한 국제질서의 구조변화는 동아시아론의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백영서는 중국이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사적 문제가 된 상황에서 동아시아론 또한 지역적 시야에 더해 지구적 시야를 아우르는 갱신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좌담의 다른 참석자들의 지적도 경청할 만했다. 한기형은 한국의 동아시아 담론이 중국의 지식인과 사상적 접점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한 쑨 거(孫歌)의 글을 빌려, 동아시아론이 혹 한국에 안주하여 동아시아 지식계와 의미있는 교감을 주고받는 데 실패한 것은 아닌지 물었다. 이러한 지적은 지난 30여년 동아시아 학계와 시민운동의 활발했던 교류와 연대활동의 성과를 평가절하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오랜 교류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으로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일원인 중국의 지식계에 동아시아가 무게있는 화두로 자리잡지 못했다면 그 역시 진지한 성찰을 요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담론 자체의 한계라기보다 동아시아에 거하되 동아시아를 훌쩍 넘어서는 중국의 존재를 동아시아의 일원인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감당할까라는 동아시아론 본연의 난제이기도 하다.
김성보 역시 동아시아론이 직면한 곤경에서 중국 요인을 지목했다. 동아시아역사교과서 모임 등의 경험에 기반하여 그는 동아시아 지식인과 시민사회, 청소년들의 교감과 연대활동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보면서도, 거대해진 중국의 존재가 동아시아공동체를 사고하는 데 장애로 작용하지 않는지 우려를 내비쳤다. 아울러 중국의 팽창과 미중 충돌로 대표되는 21세기의 현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과연 동아시아론이 존재 의미가 있는가라는 그의 문제제기는 현재 동아시아론이 직면한 곤경의 정곡을 찌른다.
『동방학지』의 좌담은 동아시아론이 위기에 이르는 길목에 중국의 부상이 있음을 새삼 일깨운다. 필경 동아시아론은 냉전시기 견고했던 인식적 장벽으로 격절되었던 타자를 발견하고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 주체적 탈근대의 상을 모색하는 열정이었다. 동아시아론에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주변과 소수자의 시각으로 뿌리 깊은 민족주의를 질의하는 원심력과 더불어, 지난 세기 동아시아인의 시야와 사고를 제약해온 서구적 시각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각지의 생생한 역사적 경험과 실천을 상호 거울 삼아 새로운 주체성을 구축하려는 구심력이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 탓에 팽창하는 중국과 그로부터 자라나는 동아시아 내부의 균열과 갈등의 조짐에 대해, 동아시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