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미학에서 감각론으로

 

 

진중권 陳重權

평론가.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저서로 『미학 오디세이』 『춤추는 죽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폭력과 상스러움』 등이 있음. MKYOKO@chollian.net

 

 

아이스테시스(aesthesis)의 역사. 고대 그리스에서 아이스테시스는 이데아 세계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그 세계를 바라보는 지적 직관에 비해서는 인식론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중세에 아이스테시스는 인간을 죄로 이끄는 쾌락과 결합된 것이라 하여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격하되었다. 근대에 이르러서 미학이라는 학문의 탄생과 더불어 비로소 아이스테시스가 부활하나 이때조차도 아이스테시스는 여전히 추상적 사유, 이성적 판단, 합리적 추론의 아래에 놓인 ‘저급한 인식’으로 규정되었다. 이런 합리주의 에피스테메(episteme) 위에 선 미학은 헤겔에게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거기서 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으로서 개념적 인식의 하위에 배치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6〜95)의 『감각의 논리』(Francis Bacon: La logique de la Sensation, 1981)는 ‘아이스테시스에 대한 이성의 우위’라는 이 수천년 묵은 전통적인 도식을 뒤집는 극적인 반전이라 할 수 있다.

 

 

감각의 존재론

 

들뢰즈에게서 아이스테시스는 이성과 합리성에 선행하여, 그 바탕에서 그것을 비로소 가능케 해주는 어떤 근원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감각의 논리』라는 표현은 그 안에 들어 있는 ‘논리’라는 낱말 때문에 (바로끄와 로꼬꼬 시대의 감각의 부활을 배경으로 탄생한) 바움가르텐(A.G. Baumgarten)의 『아에스테티카』(Aesthetica)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들뢰즈의 감각론은 바움가르텐의 감성론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바움가르텐이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감각을 이성의 아래로 포섭해 그것을 인식론적으로 구원하려 했다면, 들뢰즈는 포스트-프로이트적 유물론이라는 관점에서 감각을 존재론적으로 복권하려 한다. 들뢰즈에게 ‘감각’(sensation)이란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인식론적 의미의 ‘지각’(perception)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각’이 감관을 통해 들어온 것을 정신으로 올릴 때에 발생하는 인식론적 현상이라면, ‘감각’은 그보다 원초적인 것 즉 감관에서 정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몸으로 내려가는 존재론적 현상이다. 들뢰즈에게 감각은 유기체의 몸과 바깥의 환경이 접하는 삼투막에서 진동처럼 발생하는 어떤 유물론적 사건을 가리킨다.

그 사건이란 영미의 철학자들이 생각하듯이 단지 생리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에게 ‘감각’이란 곧 세계가 주어지는 방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세계가 ‘세계’로서 주어지는 방식, 후썰(E. Husserl)의 표현을 빌리면 ‘사상 자체’가 주어지는 근원적인 사건을 말한다. 들뢰즈의 감각론은 메를로뽕띠(M. Merleau-Ponty)의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의 영향 아래 그것을 포스트-프로이트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메를로뽕띠는 근대의 주객 이분법에 기초한 데까르뜨적 코기토(Cogito)를 비판하며 거기에 “신체의 코기토”를 대립시킨 바 있다. 그는 주객의 분리를 전제하는 ‘관조’라는 시각적 모델에 근거한 전통적인 지각론의 정학(Statik)을 비판하며, 거기에 ‘살’(chair)이라는 신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촉각적 지각의 동학(Kinetik)을 대립시킨다. 메를로뽕띠의 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형상(form)과 질료(matter)라는 고전적인 구분을 지각에 적용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지각하는 주체를 그것이 소유하고 있는 관념의 법칙에 따라 감각적 질료를 ‘해석’하거나 ‘해독’하거나 혹은 ‘질서부여’를 하는 의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게도 되었다. 질료가 형상과 함께 ‘잉태’되는 것이라는 말은 결국 모든 지각은 어떤 지평 안에서 일어나며,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세계’ 속에서 일어난다 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각과 지각의 지평을 ‘문제로 설정’하거나 ‘인식’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행동 속에서’(in action) 경험한다. 결국 지각하는 주관과 세계와의 의사 유기적 관계는 원칙적으로 내재성(immanence)과 초월성(transcendence)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관계다.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옮김, 서광사 1989, 55〜56면)

 

지각 속에는 ‘내재성과 초월성의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말하자면 내가 지각을 하는 순간에는 ‘내가 눈앞에 보고 있는 꽃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의식이 주관적으로 구성해낸 것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그 지각의 내용을 “문제로 설정”하거나 ‘인식’으로 끌어올릴 때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지각 속에서 세계는 아직 실재론과 관념론의 해석을 받지 않은 채로 그냥 주어진다. 그리하여 지각 속에는 관념론과 실재론이라는 근대적 안티노미(antinomy)를 극복할 탈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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