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민족문학론과 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
‘창비 비평’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김명인 金明仁
문학평론가. 평론집 『희망의 문학』 『불을 찾아서』 등이 있음. CRITIKIM@chollian.net
1. 창비의 ‘문학’ 특집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에서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라는 제목으로 오랜만에 문학특집을 기획했다. ‘오랜만’이라는 말에서 어폐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근래에 들어서 대략 한해에 한번 정도 문학특집을 했기 때문에 ‘아주 오랜만’이라고는 할 수 없겠죠”(이 특집의 ‘편집자 대담’에서 임규찬이 한 말)라는 응답이 바로 따라나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감 아니겠는가. 여기서 ‘오랜만’이라는 말 속에는 그 나름의 속내가 들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를테면 ‘창비다운’이라거나 ‘본격적인’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창비가 1년에 한번꼴로 문학특집을 기획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창비의’ 문학특집으로 간주하기 힘들었다는 뜻이 된다.
2003년 봄호(119호)의 ‘지구시대 한국문학의 안과 밖’, 2001년 겨울호(114호)의 ‘한국문학의 오늘, 민족문학의 새로운 구도’, 2000년 겨울호(110호)의 ‘21세기 문학의 향방’, 1999년 가을호(105호)의 ‘근대극복의 언어를 찾아서’ 등 큼지막한 제목들로 문학특집이 이루어졌지만 그 특집들이 2000년대 초반의 한국문학의 실상을 제대로 포착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창비식’의 관습적 고담준론으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더 많이 주었음을 어쩔 수 없다. 그 속에는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 지구화시대의 한국문학에 대한 고민, 이산(離散)문학에 대한 관심 등 나름대로 ‘창비’의 모색들이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1970년대와 80년대에 창비가 보여준 어떤 강력한 구심력이 느껴지지 않고 대신 변해가는 세상의 뒤꿈치를 간신히 쫓아가는 피로한 공룡의 뒷모습만이 어른거리는 형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번 특집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이전의 가장 가까운 기간 내에 ‘창비다운’ 문학특집의 마지막 모습이라면 만 5년 전의 1999년 여름호(104호) 특집 ‘세기의 갈림길에 선 우리 문학:90년대 비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최원식의 「문학의 귀환」, 이영진의 「90년대라는 가설, 황무지를 구원하는 견딤의 미학」, 신승엽의 「벗어날 수 없는 일탈, 머무를 수 없는 定住」, 윤지관의 「90년대 정신분석」 등 총론·시론·소설론·비평론 등의 꽉 짜인 구성으로 역사로부터 탈주하는 90년대 문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감행한 이 특집은 80년대 이전 세대의 90년대 문학에 대한 본격적 문제제기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은 것이었다. 나도 이 특집을 읽고 이제 본격적으로 80년대와 90년대의 생산적 대화를 위한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기뻐했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이 특집의 예각적인 문제제기는 이미 그때부터 논쟁적 긴장 자체를 버거워하는 90년대 후반의 연질화될 대로 연질화된 문학풍토의 늪 속으로 실종되어버렸지만, 그 기획 자체는 창간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전통의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여전한 건재를 알리는 모처럼의 귀중한 징표였다고 할 수 있다.
그후 5년, 다시 문학담론의 중심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창비 편집진의 고심의 결과로서 제출된 기획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는 편집인부터 편집자문위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7명의 창비 사람이 ‘올인’하다시피 참여한 90년대 문학에 대한 또 한번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5년 전의 특집이 ‘싸움걸기’쪽에 가까웠다면 이번 특집은 ‘말걸기’ 혹은 ‘이해하기’에 가깝다는 차이가 있다. 과연 그 ‘말걸기’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여전히 7,80년대 민족문학론의 아성으로서의 지위를 자의건 타의건 포기하지 않고 있는 창비는 한사코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원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90년대 이후의 문학에 대해서 이제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일까. 혹은 건네고 싶은 것일까.
하긴 1999년의 비판적 싸움걸기에도 불구하고 창비는 이미 90년대적인 것들과 깊이 ‘내통’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1990년부터 『소설 동의보감』을 1백만부 이상 찍어내면서 창비는 어쩔 수 없이 90년대적인 것들과 한배를 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소설 동의보감』의 ‘문학사적’ 의미에 관해서는 이번 특집의 필자 중 한 사람인 최원식(崔元植)의 언급이 있지만,1 그러한 문학사적 의의는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소설 동의보감』의 의도하지 않았던 베스트쎌러화는 소설이 백만부짜리 베스트쎌러가 되는 시대, 즉 90년대 특유의 현상인 문학작품의 히트상품화 추세를 열어젖힌 것이었다.
이로써 창비는 그 ‘환멸의 90년대’에 대한민국의 주요 문학출판자본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90년대 문학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은희경 신경숙 하성란 김영하 성석제 등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소설계의 총아들은 문학과지성사나 문학동네만이 아니라 창비에서도 번갈아가며 장편소설이나 작품집을 내게 되는데 이는 7,80년대와는 현저하게 구별되는 현상으로서, 이를 종래 ‘민중적 민족문학’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여 발간작품을 준별하던 창비가 그 엄격성을 대폭 완화한 결과라고 하면 과언이 될까.
물론 이것을 상업주의와의 타협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는 상대적으로 ‘민중적 민족문학’작품 생산의 장기침체라는 요인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고, 앞서 거론된 작가들의 탈이념성은 90년대의 지배적 경향성의 노정일 뿐 그들의 작가적 역량 자체가 함량미달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는 ‘창비 비평’에 있다. ‘민중적 민족문학’이 90년대 이후 이러저러한 모색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자기갱신을 하지 못함으로 해서 마치 7,80년대 진보적 문학이념의 기지라고 할 수 있는 창비가 90년대 문학을 무원칙적으로 수용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왜 은희경이고 왜 신경숙이고 왜 김영하인가를 ‘창비 비평’이 시원스럽게 해명해주지 못한다면 창비의 이런 곤혹스러움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과연 이 특집을 계기로 해서 창비는 90년대 이후와의 편의적 내통이라는 혐의(?)를 벗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최소한 창비 나름대로 90년대 이후를 수용하는 내적 논리를 계발해내고 있는가. 이 특집을 읽기 전, 나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특집에 참여한 창비 진영의 비평가들의 글들을 따라가면서 궁금증도 풀고 공부도 하면서 일면 동업자적 차원에서의 잔소리도 곁들이는 정도로 읽혀지면 좋을 듯하다. 창비의 청탁의도도 이런저런 잔소리와, 경우에 따라서는 따끔한 쓴소리도 다 경청하면서 창비 나름의 당대 문학에 대한 담론의 물꼬를 터 나가겠다는 각오와 의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기에 할말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다.
2. 특집 기획의 문제점
이 특집엔 특이하게도 앞머리에 「왜 이 작가들인가」라는 제목으로 ‘편집자 대담’이라는 것이 실려 있다. 통상적인 경우라면 특집의 기획의도는 ‘책머리에’를 얼마간 할애해서 밝히는데 이렇게 따로 대담을 실어야 했다는 것은 좋게 보면 이 기획에 그만큼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이 되고, 나쁘게 보면 이 기획에는 필자들의 글을 그대로 싣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성에 차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창비의 ‘편집위원’인 임규찬(林奎燦)과 ‘자문위원’인 진정석(陳正石)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는 흥미롭다.
진정석이 이번 특집을 두고 “2003년 봄호 이래 꽤 오랜만에 다시 맞이하는 문학특집”이라고 하자, 임규찬이 그런 말 속에는 “‘창비가 문학을 소홀히 한다’는 평소의 무의식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받는다. 다시 진정석이 “‘창비 문학란에는 대체로 과감한 모험, 문학적 투기(投企)라고 할 만한 태도가 부족하지 않은가”라고 하자, 임규찬은 “정말 창비는 놓쳐서는 안될 어떤 문학적 흐름과 작가들로부터 뒤떨어져 있는 느림보인가” 하고 반문한다. 또 진정석이 지난 10년간은 ‘뛰어난 군소작가들의 시대’였다고나 할까보다고 하니까 임규찬은 아무래도 ‘뛰어난’ 보다는 ‘군소’라는 말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고 아퀴를 짓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약간의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한국 소설의)“일정한 유형별·주제별 범주화를 손쉽게 허용치 않는 상황”(임규찬)이기 때문에 아직은 “개별적인 작품성과에 대한 분석작업”(임규찬), 혹은 “작품에 대한 분석적 읽기”(진정석)가 절실하다는 데에 동의하고 ‘분석적 읽기’를 이 특집의
- 최원식 「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감각들」,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50면. 앞으로 이 글에 나오는 면수 표기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한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의 면수를 나타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