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민족문학의 결여, 리얼리즘의 결여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 ②1

 

 

김형중 金亨中

문학평론가.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이 있음. unabomber5@hanmail.net

 

 

화염의 강 메우기

 

보기에 따라, 소설 속의 ‘여담’(digression)은 그것이 작품의 중심서사를 제대로 방해할 때, 오히려 찬사를 받기도 한다. 가령 란다 싸브리(Randa Sabry)에게 여담은 “중성(中性)과 파편성(바르트), 컬렉션의 분기(分岐)와 기이한 부분집합(세르), 열린 작품과 가능성의 범주(움베르토 에코), 파레르공(데리다), 싱커페이션(장―뤽 낭시), 유토피아, 반전, 재개, 그림에서 프레임과 프레임의 증가(루이 마랭), 이야기/담화의 경계선들, 곁텍스트성과 메타텍스트성(쥬네트) 같은”2 개념들의 태반(胎盤)이 된다. 그에 따르면 굳이 ‘명품’의 유기성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여담은 텍스트의 다성적(多聲的) 풍요로움을 보장하는 중요한 보물창고다. 알다시피 이 개념들은 ‘중심에 대한 주변의 반란’이라고 하는 후기근대론의 주요 테마가 텍스트 차원에서 상징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문학 외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원군을 마련해두고 있기도 하다.

배수아(裵琇亞)가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2003) 작가 후기에서 “어느 순간에 달콤한 멜로디에 의존한 크리스마스 선물용 바이올린 음악의 선율이 참을 수 없게 여겨질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는 글 속에 담긴 스토리 자체를, 혹은 그런 선명한 스토리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글을 내게서 가능한 한 멀리 두고 그 사이를 뱀과 화염의 강물로 차단하고자 했다”(198면)라고 하며 반서사적 소설(아닌 소설)을 쓰겠다고 공표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도 아마 이런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백낙청(白樂晴)은 아주 많은 공을 들여가며 이 작품을 관통하는 “교활하다 싶을 정도로 치밀한 운산과 정교한 복선을 깔고 펼쳐지는 서사”3를 찾으려고 시도함으로써 작가의 의도에 반하는 작품읽기의 모범을 보여준다. 사실 ‘찾기’보다는 ‘꿰매기’에 더 가까울 정도인 그의 서사에 대한 집착은 다소 안쓰러워 보일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그가 꿰매기 작업에 앞서 스쳐지나가는 어투로 “다소 저급한 비평방법일지 모르나”라고 하며 자신의 서사요약 작업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낼 때,사실 그 말은 전혀 겸손이 아니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해서 그는 배수아 소설에서 정교한 서사를 찾아냈거나 꿰매어냈을지는 몰라도 배수아의 음악에 대한 조예와 감수성,M의 보편언어와 절대음악에 대한 비극적인 추구와 같은 여담적인 요소들(사실 이 소설의 대부분의 매혹은 여기서 비롯된다)은 체계적으로 삭제된다. 오로지 앙상한 연대기적 서사의 추출을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마치 은하수로부터 별자리 하나를 추출하기 위해 나머지 무수한 별들의 빛을 무시하거나 사라지게 해버리는 행위와 같다.

그럼에도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서사가 있다는 사실, 그래서 배수아의 의도와는 달리 서사란 소설의 어쩔 수 없는 기본요소란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느냐고 강변한다면, 백낙청이 거론하지 않은 중·단편들, 가령 「훌」(『문학동네』 2002년 겨울호)에 대해, 「마짠 방향으로」(『문학과사회』 2003년 봄호)에 대해, 그리고 「회색 시時」(『현대문학』 2003년 10월호)에 대해서는 어찌할 것인가 반문해볼 수도 있겠다. 「훌」의 세 주인공(셋 모두 훌이어서 도대체 어떤 훌이 이 훌이고 저 훌인지 소설 중반에 와서야 가닥이 잡힌다)이 보낸 노동절 휴일 전후의 며칠은 어떠한 ‘극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마짠 방향으로」의 서사는 『에세이스트의 책상』보다 더 파편적이다. 시간상 역순의 형식을 취하는 서사는 기본이고, 아예 역순의 서사에도 포함시킬 수 없는 어느날 어느 시간 어떤 건물에서 잠깐 일어난 익명의 사람들간 대화나 말다툼이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오로지 ‘고독’과 ‘쓸쓸함’의 분위기를 위해 제시될 뿐이다. 아무리 백낙청처럼 꿰매기 작업을 감행해도 일관된 시간의 연속을 형성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회색 시時」에는 소설적 서사가 시작되기 전에 시간에 대한 그리고 기억과 죄의식에 관한 무거운 수필 형식의 기나긴 여담이 소설의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다, 이어지는 서사마저 오로지 우리말에는 없는 ‘미래완료 시제’가 가능하겠는가를 탐구하는 실험에 바쳐지고 있을 뿐이다. 화자는 말한다. “미래의 일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지나간 것인 듯 과거시제를 사용해서 말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고 분명히 아직 겪은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것들을 전부 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현대문학』 2003년 10월호 107면) 그러고는 기억과 죄의식에 관한 긴 여담이 이어지고 나서, 등장인물 수미를 중심으로 한 서사가 진행된다. 그러나 그 서사는 미래에 일어났던 일을 과거처럼 이야기하기를 실험적으로 보여주는 ‘예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다.

이제 이 낱낱의 작품에도 여전히 ‘서사’가 건재함을 확인하기 위해 또다시 꿰매기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인가? 사실 그런 식의 각개격파는 배수아가 써내는 소설의 수만큼 자주 반복되어야 할 것인데, 그런 작업은 ‘꼼꼼히 읽기’의 전범은 여러차례 보여줄 수 있을망정 앙상하고 고집스럽단 소릴 들어도 별로 할 말이 없는 비평태도가 아닌가 싶다.

 

 

M의 성별

 

성차(性差)에 관한 관습적인 이해방식은 문장 수준에서도 관철된다. 반성되지 않을 경우 관습은 여성적 문장과 남성적 문장, 그리고 여성을 지칭하는 문장과 남성을 지칭하는 문장의 구분을 자명한 것으로 만들어놓는다. 물론 문장을 읽는 시선들 또한 극도로 자성적이지 않을 경우 관습적 성차를 그대로 용인한다. 가령, 김명인(金明仁)처럼 일류에 속하는 비평가의 시선 속에서도 “처음 만난 M은 키가 컸고 중성적이고 아름다웠으나 엄격하게 보였다”(『에세이스트의 책상』 82면)와 같은 문장이 즉각 M의 성별을 감별해내는 지표가 되는 처지를 면하지 못한다.4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인물에게 주어진 ‘중성적이었다’나 ‘아름다웠다’라는 술어들이 남성 인물에게 사용되어서는 안될 이유란 전혀 없다. 심지어 “이것봐, 거기 아가씨들! 힘쓸 만한 남자들은 다 여기 모여 있는데 거기서 뭐 하는 거야?”(『에세이스트의 책상』 112면) 같은 문장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가

  1. 이 글은 졸고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파라 21』 2004년 봄호)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혀둔다. 문체와 구성 또한 그 글과 가급적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글의 내용에 있어서는 창비 올해 여름호 특집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에 실린 백낙청, 최원식, 한기욱, 김영희 들의 글과 이에 대한 논평이자 비판으로 창비 가을호에 실린 김명인 및 김영찬의 글로부터 촉발된 바 크다. 특히 김영찬의 글은 이 글의 제목을 정하는 데 중요한 참조가 되었다. 그의 논지에 대부분 동의한다. 본문에서 그의 글을 많이 언급하지 않은 이유도 이미 동의하는 논의를 다시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논평할 기회가 없을 듯하여 미리 몇마디 여름호 특집의 서론 격인 ‘편집자 대담’에 대한 인상을 말해두는 것도 괜찮을 듯한데, 우선 문예지에서 문학관련 특집을 마련하면서, 문학관련 편집진이 ‘총동원’(나는 위압적이고 과장된, 게다가 일사불란함마저 느끼게 하는 이 말의 뉘앙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된 일이 일종의 ‘이벤트’가 될 만큼 대단한 일인지 의아했다. 했어야 할 일을 미루어두었다가 나중에서야 처리하는 형국임을 감안했을 때, 비록 ‘대대적’인 동원이 이례적이었다곤 하더라도 그 일을 치러내는 주체 입장에서는 좀 겸허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나마 “직무 소홀”이라거나 “무리한 구상” 같은 진정석의 자성적 어휘들이 눈에 띄어 다행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거론한 대상 작가들을 선별하고, 작가론을 쓸 필자를 선정하는 방식 또한 용두사미 격이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가령 “강영숙, 권지예, 김경욱, 김영하, 김연수, 김종광, 김종은, 민경현, 박민규, 배수아, 백민석, 윤성희, 이만교, 이명랑, 이응준, 이현수, 전성태, 정영문, 정이현, 조경란, 하성란, 한강, 한창훈 등”을 ‘가급적 많이’1차 거론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기획자측의 혜안을 높이 사야 할 줄 안다. 그러나 이후에 이들 중 여러 작가가 마치 심사에서 탈락하듯 떨어져나간 저간의 사정에 대한 마땅한 해명이 없고, 게다가 “강권” “강요” “게으른 탓” “필자가 영국에 있어서” 등의 이유로 “상대”가 결정되거나 어떤 경우 누락되는 과정에 대한 상술은 하지 않느니만 못했지 싶다.
  2. 란다 싸브리 『담화의 놀이들』(이충민 옮김), 새물결 2003,14~15면.
  3. 백낙청 「소설가의 책상, 에쎄이스트의 책상」,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34면.
  4. 김명인 「민족문학론과 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 『창작과비평』 2004 가을호 2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