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과 새로운 주체

 

민족문학의 ‘정전 형성’과 미당 퍼즐1

3·1운동 100주년과 문학의 ‘자율성’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묵시록과 계급: 백민석의 폭민과 최진영의 여자들」 「리얼리티 재장전: 다른 민중, 새로운 현실 그리고 ‘한국문학’」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1. 새로운 주인공

 

돌아오는 봄과 함께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100년이라는 상징성도 이 역사적 기념비에 대한 환기력을 높여주지만 그것이 한층 특별해진 이유는 촛불혁명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광장을 빠져나간 뒤에도 촛불대오는 정권교대를 넘은 ‘권력교체’를 통해 남북의 내부개혁은 물론 분단체제, 나아가 세계질서의 재편을 견인하는 동력으로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다.2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비폭력 평화시위로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한반도 남쪽의 촛불혁명이 어째서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각별하게 만드는 사건인지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문학이라는 자리에 오면 두 사건 사이의 관계는 더 묘연해 보이는 듯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9월 19일 능라도 5·1체조경기장에서 행해진 정전 이후 최초의 남한 대통령 연설을 되짚어보고 싶다.3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비핵화와 전쟁종식, 평화체제 건설에 대한 남북정상의 의지를 육성으로 표명했다는 획기성 말고도 여기에는 눈여겨볼 지점이 하나 더 있다. 2007년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변경한 데서 드러나듯 문학담론에서조차 종적을 감추다시피 한 ‘민족’이 그날의 짧은 연설문에 열차례나 반복 등장한 사실이다. 촛불혁명이 다시 불러낸 ‘민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냉전체제의 시발점이자 마지막 출구인 한반도에서 ‘민족’은 분단체제 변혁의 고리로 언제든 새롭게 환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일단은 언어와 역사를 공유해온 남북의 주민 대다수와 재외동포를 아우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족’에 새겨진 이데올로기적 요철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평양연설 또한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거나 신화적 민족주의의 소산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없지 않다.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는 대목은 사실관계에 비춰서도 비약일 수 있다. 최근의 예멘 난민사태를 떠올리면 ‘민족’은 ‘아(亞)제국’의 바리케이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 현실과 문맥에 대한 감안 없이 민족이라는 말만 나오면 차별과 배제의 ‘민족주의’나 파시즘적 대중동원을 떠올리는 것도 타성이다. 몇가지가 고려되어야 한다. 평양연설의 ‘민족’은 어디서 누구를 상대로 발화되었는가. “평양시민 여러분”과 촛불시민들이 받은 느낌이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 어느 편에서나 그것은 달라진 세상에 대한 또렷한 실감을 운반하고 있는 말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요컨대 평양연설의 ‘민족’은 세상이 변했다는 감각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다. 분단 또는 분단체제라는 낡은 현실이 남북 주민들의 선택과 실천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하다는 주체적 감각의 회복이야말로 새로운 현실의 핵심내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한 평양연설의 핵심은 망설임 없이 쓰인 합성어 ‘민족자주’에 있다. ‘민족’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주인공의 이름이고 ‘자주’는 앞으로 이 주인공들이 만들어나갈 새로운 이야기의 방향이다. 그것은 촛불광장에서 내내 외쳐진 ‘헌법 제1조’를 타고 시간을 거슬러 민족자결(民族自決)의 대세 아래 작성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는 기미독립선언서(1919)의 장중한 첫 문장에 우리를 마주 세운다. 식민과 분단으로 한 세기나 유예된 3·1운동의 비전은 촛불혁명을 통해 자기실현의 어떤 단계를 뒤늦게, 그리고 새롭게 맞이하고 있다.

 

 

2. 3·1운동과 점진혁명

 

3·1운동이 민족해방을 우선순위로 두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선언서는 민족해방 또한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임을 잊지 않음으로써 운동의 목표가 민족해방을 필수요건으로 하되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상회하는 것일 수밖에 없음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아래로부터의 동학농민운동과 위로부터의 갑오개혁으로 1894년 들어 정점에 이르렀던 자주적 근대적응의 동력은 반외세 반봉건의 해방론에서 멈춘 전자의 근시안과 개량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경장내각의 외세 의존적 오류로 결국 봉쇄되고 말았다. 그에 비한다면 “인류행복”의 보편이상과 결합하면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동양평화 그리고 세계평화라는 구체적 매개항을 제시하고 그 불가분의 관계를 명시한 3·1운동은 1차대전 이후 변화된 국제정치적 조건에 대한 순진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1894년’의 실패를 한 단계 넘어선 것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의 인적구성(천도교계 인사들과 만해 한용운의 존재)이나 민중적 참여의 규모 그리고 시기적 인접성으로 볼 때 ‘1894년’은 3·1운동의 숨은 기반이었지만 전자가 일국적이었던 데 비해 후자가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진전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4

그럼에도 3·1운동은 혁명이 되지 못했다.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여러갈래지만 전망의 자주성을 뒷받침할 자력(自力)의 미비가 요점이다. 일제의 혁명예방 기획이었던 ‘문화통치’가 민중의 폭발에 반응해 교육·문화 운동의 제한적 공간을 연 사실은 알려진 대로다. 신민(臣民)도 노예도 아닌 “자주민”의 꿈은 이 공간에서 민족개조와 실력양성이라는 열쇳말을 징검다리 삼아 점진혁명(漸進革命)의 현실주의로 암행하거나 때로는 혁명을 괄호 친 수양(修養)의 타협주의로 물들어갔다. 실력양성론의 맥락에서 이 구분은 중요하다. 예컨대 전자의 노선을 이끈 도산 안창호와 그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후자의 노선을 대변한 춘원 이광수의 차이는 근원적이다. 도산은 말한다. “왜 우리들은 그같은 목표(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을 육성하는—인용자) 아래 굳게 맹약하여 모였을까요? 오로지 우리 한국의 혁명의 원기를 튼튼히 하여 그 역량을 증진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흥사단은 평범한 수양주의로 이루어진 수양단체가 아니라, 한국 혁명을 중심으로 하고 투사의 자격을 양성코자 하는 혁명훈련 단체입니다.”5 그는 안이한 단계론자가 아니었다. 흥사(興士)의 ‘사’는 비사회주의—반사회주의가 아니라—점진노선을 따르는 근대혁명가의 은유였던 셈이다.[6. 그는 1926년 7월 8일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의 점진론이 흔히 자치주의의 유혹에 빠지곤 하는 단계론과 다르며 일종의 중도 좌우합작 노선임을 천명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의 혁명이란 무엇인고? 나는 말하기를 민족혁명이라 하오. 그러면 민족혁명이란 무엇인가? 비민족주의자를 민족주의자 되도록 하자는 것인가? 아니오. (…) 우리가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하여 세울 국체 정체는 무엇으로 할고. 공산주의로 할까? 민주제를 쓸까? 복벽하여 군주국으로 할까? (…)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지금은 그것을 문제 삼아 쟁론할 시기가 아니오.” 「오늘의 우리 혁명」, 『독립신문』(1926.9.3); 『도산안창호전집 6권』(단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1. 이 글은 한국사회사학회와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학술대회 ‘3·1운동 100년, 한국 사회전환의 시공간 지평’(고려대 백주년기념관, 2018.11.2~3)에서 발표한 「민족문학의 ‘정전체계’와 미당 퍼즐」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2. 19대 대선이 치러지기도 전인 이른 시기에 ‘촛불’의 혁명적 새로움을 간파하고 그 진화경로를 정확히 예측한 글로는 백낙청의 「‘촛불’의 새 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를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잇단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이후의 한반도가 이미 ‘낮은 단계의 남북연합’에 돌입했음을 최근의 글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 촛불혁명시대의 한반도」(『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를 통해 명료하게 분석하기도 했다.
  3. 최초로 평양에서 연설한 남한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4개월 만인 1950년 10월 29일 평양시청 앞에서 5만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평양수복(1950.10.20)을 자축하는 기념연설을 했다.
  4. 3·1운동의 국제적 영향에 대해서는 김학재의 「3·1운동의 한 세기: 20세기의 비전과 한반도 평화」가 상세하다. 그는 3·1운동이 “세계사와 민족사가 결정적으로 조우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며 “동학과 서학이 연합”(신용하)해 정치적·종교적·계급적 차이를 극복한 최초의 민족통합 계기로 평가한다. 앞의 학술대회 자료집 134면 및 143면 참조.
  5. 안창호 「미주에 재류하는 동지 여러분께」(1929.2.8), 『도산안창호전집 1권』(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254면. 박만규 「이광수의 안창호 이해와 그 문제점: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69호, 2018, 283면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