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민족예술의 원형 찾기와 미래상 세우기

김윤수 교수 정년기념간행위 편 『민족의 길, 예술의 길』, 창작과비평사 2001

 

 

박래부 朴來富

한국일보 심의실장 parkrb@hk.co.kr

 

 

동포 친구의 권유로 90년대 초 일본 오오사까의 동양도자미술관을 찾은 일이 있다. 들어서자 그의 권유가 왜 그렇게 간곡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 미술관은 일본인들이 한국과 중국, 일본의 옛 도자기 수백점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국보급에 해당할 우리 도자기가 줄 이어 전시돼 있는 그곳은 마치 우리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만천하에 보여주기 위한 공간 같았다.

조형미가 빼어난 우리 도자기들이 일본에 있게 된 데 대한 분노 섞인 탄식이 마음속에서 절로 나왔다. 또한 ‘조선 도자기에, 조선 미술에 매혹됐던 일본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여!’ 하는 감탄도 새삼 새어나왔다. 그 미술관은 야나기와는 별 상관이 없었으나, 한·중·일 3국의 도자기를 비교 전시함으로써 3국 도자기에 대한 그의 미감과 평가가 거짓이나 과장이 아님을 실물로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의 예술은 의지의 예술이며, 일본은 정취의 예술이었다. 이 사이에서 숙명적으로 비애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 조선의 예술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아주 약한 자의 미라고 낮춰 봐서는 안된다. 만일 저 셸리의 유명한 시구가 진실이라면 그것은 미의 극치인 것이다.”(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의 미술」, 1922)

김윤수(金潤洙) 교수 정년기념기획간행위원회가 펴낸 『민족의 길, 예술의 길』은 민족예술의 원형을 찾아보고, 그것을 거름삼아 시간의 유구한 흐름에도 마모되지 않는 민족예술의 미래상을 세우려는 목표와 함께 기획된 산문집으로 이해된다. 이 책을 보며 예전의 삽화가 떠오른 것은 오오사까의 미술관에서 중국·일본의 예술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우리 예술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우리 도자기의 미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거기에 한국인을 감동시킨 아름다운 요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지하·채희완은 미학으로 정리된 우리의 미감이 야나기 무네요시와 고유섭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대담을 시작한다. 이들은 야나기가 지적한 선·비애·백색·쓸쓸함 등 여성성을 극복되어야 할 요소로 파악하던 시기와 이를 다시 흡수하고 인정해야겠다는 지금의 생각을 비교하고 있다. 또한 ‘구수한 큰 맛’ 등에 주목한 고유섭의 밝은 미학이 보완되어야 하며, 김윤수·김지하가 같이 만든 ‘현실동인 선언’에서는 역동성과 남성성, 사회적 진보를 추동하는 힘으로서의 한(恨) 같은 한국미의 다른 면을 부각시켰음을 상기한다. 이들의 대담은 우리 미의식의 뿌리를 한(恨)과 정(情), 사랑, ‘활동하는 무(無)’와 무기교, 상고시대부터 있어온 생명사상·생태사상 등에까지 더듬어봄으로써 원형 찾기의 큰 그림을 그려 보이고 있다. 이들은 또한 중국·일본 예술가와 달리 기교나 완벽성을 추구하지 않고 서툴게 그린 무기교의 감성을 자유정신과 ‘멋’에 연결시켜 살피고 있어 흥미롭다.

113-361최원식 역시 「멋에 관한 단상」에서 한국인의 ‘멋’이라는 독특한 미적 감성구조를 분석하고 있다. 처음으로 멋에 주목한 신석초는 멋이 공리적인 ‘맛’에 비해 무용성(無用性)을 본질로 삼는다고 보았다. 신석초의 균형적 멋론은 멋의 일탈적 성격을 강조한 이희승에 의해 승계되지만, 이희승은 다시 조윤제에 의해 비판받는다. 이 논쟁의 종합을 시도한 이가 「‘멋’의 연구」를 발표한 조지훈이다. 최원식은 멋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는 최근의 현상에 대해 주목한다. 채희완·임석재 등의 글에서 나타나는 민중미학적 요소에 적극적 관심을 표시하면서, 멋론을 비판적으로 되살려볼 만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어찌 보면 멋에 대한 적극적 재발견·재평가를 시도하는 것은 민족민중예술을 추구해온 주역들의 에너지가 90년대 이후 많이 소진됨으로써 목소리가 차분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질풍노도 같은 80년대를 보내고 난 뒤, 절박했던 시대적 요청과 당위성에서 한발 물러난 여유를 바탕으로 그들의 미학이 역사 속으로 내면화하는 단계라는 긍정적 인상을 더 강하게 받게 된다.

이 책에 회고적 성찰과 먼 미래에 대한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평가가 덜 된 형태로 남아 있거나, 현재진행형의 예술장르에서 분출되는 발언들이 더 많다. 송두율은 보편성 있는 심미적 체험을 세계에 전달해줄 수 있는 참다운 ‘민족예술’의 예를 윤이상의 음악과 이응노의 추상회화에서 발견한다. 그들은 민족문화의 통일성과 외국문화라는 다원성 사이에 놓인 긴장을, 예술이라는 범주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전달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천규석의 두레굿 이야기는 다소 폐쇄적인 진단과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이상주의로만 치부할 수 없는 공동체적 문화의 대안을 담고 있다. 굿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떠들썩하게 치르는 공동체 활동으로서, 대중적 몰입과 신명을 불러일으키며, 건강한 사회통합적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쇼비니즘은 경계되어야 하지만, 여기서 아직도 유효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 비판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의 비판은 대중문화가 개인을 고립시키고 분자화함으로써 파시즘적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헌정하는 기념문집임을 감안하더라도, “반(半)봉건적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적 소외와 비인간화를 극복하고자 고민”(염무웅 「견수 30년」)해오며 많은 예술장르에 영향을 미친 미학자·미술평론가 김윤수에게로 집약되는 후배·후학들의 신뢰와 열정의 강도는 놀랍다. 춤과 음악, 미술, 연극, 문학 등의 분야에서 망라된 필자들은 저항적 민중정서가 큰 축을 이루었던 1970〜80년대를 헤쳐온 역정과 추억, 다양한 성취를 성찰하고 있는데, 언제나 자신들 뒤에는 정치한 이론을 바탕으로 실천적 삶을 살아온 김윤수가 버티고 있었음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있다. 때로는 감상적이기도 하지만, 그 글들은 대부분 체험적 진정성으로 아름답게 반짝인다.

민족예술에 대한 점검이 필연적으로 통일 이후를 포괄하고 상정하는 모색과 반성이라고 볼 때, 이 책은 든든한 징검다리 구실을 할 것이다. 강성원의 지적처럼 민족예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다양한 정서와 체험, 개인과 공동체적 가치관의 조화,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이 큰 그림으로 모자이크될 때 윤곽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