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반도에서의 근대와 탈근대

 

민주주의, 성장논리, 農的 순환사회

 

 

김종철 金鍾哲

『녹색평론』 발행·편집인. 전 영남대 영문과 교수. 저서로 『시와 역사적 상상력』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간디의 물레』, 역서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등이 있음.

jckim@greenreview.co.kr

 

 

많은 사람들에게 지난 12월 대선은 심히 곤혹스러운 선거였다. 실제로 선거결과는 많은 유권자가 아예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거나, 투표를 했다 하더라도 마지못해 누군가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선거를 통해 누군가가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한 민의(民意)의 반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심각한 언어왜곡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기는 비록 30%의 득표율이기는 하나, 상대후보들에 비해서는 압도적인 표를 얻었으니까 자신이 국민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은 듯한 착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지 모른다.

그런 탓인지, 아직 새 정부가 구성되지도 않았건만, 소위 인수위원회가 새로운 정책안이라고 내놓는 것을 보면 전부 문자 그대로 무소불위의 전제(專制)권력이 아니면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정작 선거 직전에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듯했던 이른바 대운하 프로젝트는 온갖 논리적인 모순이 폭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행될 기세이고,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 분명한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이 공공연히 제시되는가 하면, 드디어는 한국인들이 자기 땅에서 자기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한국어를 버리고 외국어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기상천외의 ‘영어공교육’ 정책이 운위되기에까지 이르렀다. 궁금한 것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국가정책이라고 내놓는 사람들의 정신구조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실제 집행 여부를 떠나서, 실로 상식을 벗어나도 너무도 벗어난 이러한 프로젝트를 아무리 반대여론이 있다 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강력하게 밀어붙이겠다는 자세를 노골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권력의 방자한 모습이다. 이것은 명백히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도 없는 전제적 발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른바 ‘민주화 이후’ 시대라는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로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민주화’는 성취했으니까 다음 과제는 ‘선진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지난 20년이 올바른 의미에서 민주주의 사회였는지는 잠시 불문에 붙여두고, 지금 권력의 독주를 견제할 만한 정치적 대항세력이 사실상 몰락의 위기에 내몰린 상황에서, 우리는 이러한 위태로운 사태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들 자신의 안이한 인식에-부분적으로나마-기인한 것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직선제만 쟁취하면, 쿠데타만 없으면, 그리고 정기적으로 투표장에 가서 칸막이 속에서 아무 간섭을 받지 않고 도장을 찍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따지고 보면 히틀러도 나뽈레옹 3세도 선거에 의해서 등장했던 전제권력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할 필요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하기는 통치권의 행사라는 이름으로 여론-특히 사회적 약자들의 의견-을 쉽게 무시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의 정부에서도 고질적인 습관이 되어왔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심각하게 훼손하면서까지 한미FTA를 밀어붙인 노무현정권의 경우일 것이다. 한미FTA는 사회적 약자와 자연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마지막 합법적인 수단마저도 박탈해버릴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명박의 대운하 못지않은 폭력적 기획이라는 것이 많은 설득력있는 양심적 증언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예에 비추어 충분히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협정에 대한 풀뿌리 차원의 반대 목소리는 조금이라도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는 권력이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드물게 간곡하고 강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관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마저 비웃고, 노무현은 기어이 자기 고집대로 협정체결을 완료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참여정부’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가 폭로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오늘날 우리의 민주적 역량은 독선적 권력의 횡포를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견실한 것이 아니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지금에 와서 우리가 새삼 민주주의의 위기 운운하는 것도 실은 우스운 노릇인지 모른다. 지난 20년 동안 ‘민주화 이후’ 시대 전체에 걸쳐서 민주주의가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바가 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왔다고 보는 것이 정당한 판단일 것이다. ‘참여정부’에 의한 한미FTA체결은 아마도 그러한 추세 속에서 이 나라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후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 비록 정권교체가 되고 집권당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권력 엘리뜨들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 실질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난 10년 동안 정부나 집권당에 들어가 활동했다고 해서 그들이 속한 정당 혹은 정파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한 것을 두고 ‘진보진영’의 패배를 운위한다면 그것은 실로 가소로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알다시피, 그들은 기득권세력과 온갖 소소한 국면에서 쓸데없는 정치투쟁을 벌이면서도 민중생활의 보다 근본적인 차원, 즉 사회경제적인 정책방향에서는 완전히 의기투합해서, 엘리뜨 중심의 글로벌 시장경제 씨스템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신념에 충실하거나 굴종해왔고, 그 연장선에서 한미FTA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반민중적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저항해온 유일한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도 이번 선거에서 참패를 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는 민주노동당의 패배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정치적 식견이 없다. 하지만 그 패배의 주된 요인이 민주노동당 자신의 내부에 있었다고 보는 시각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지금 연일 보도되고 있는 것처럼 민주노동당이 자기쇄신의 필요와 그 방법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분에 휘말려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안다. 이 분쟁의 결과 심지어 민주노동당 자체가 해체되어버릴 가능성도 크다는 우려의 목소리들도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내부적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이번 대선에서의 참패 원인을 민주노동당 자신의 한계로만 돌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이 좀더 견실한 내부구조를 갖추고, 유권자들에게 좀더 신망있는 당으로 비쳐졌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지지를 확보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의 그러한 성공은 극히 제한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나라의 다수 대중은 ‘국익’ 혹은 ‘국가경쟁력’이라는 덫에 걸려 자신의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데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진보적’ 가치가 압도적인 다수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실제 상황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반대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진보적 가치에 대해서 얘기하고, 민주주의에 대해서 말하면 조소(嘲笑)를 당할 뿐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시대에 실망한 대중들 사이에서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냉소주의가 이미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는 저널리즘의 보고가 나온 지도 한참 되었다. 흔히 이런 보고를 인용하는 식자(識者)들은 소위 민주세력의 집권기간에 대중적 빈곤현상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빈부격차가 심화됨으로써, 대중이 민주주의나 ‘진보적’ 이상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식으로 해석해왔다. 이와같은 해석이 물론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이 정말로 민주주의를 원치 않는다는 것은 진실일까.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냉소적 태도는 혹시 좀더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원망(願望)의 왜곡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오늘의 대중적 소비수준이 결코 낮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빈곤이 문제라고 하지만, 지금 절대적인 궁핍 때문에 사람들이 돈이 된다면 도덕도 윤리도 민주주의도 다 헌신짝처럼 버리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경제적인 빈곤이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주인(主因)이라고 보는 것은 흔히 있는 상투적인 관점이지만, 따져보면 이것보다 더 위험한 관점도 없다고 할 수 있다. 흔히 근대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중산층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의 유명한 말에 덮어놓고 동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경우 ‘민주주의’란 서구근대의 소산인 자유주의적 대의제 민주주의를 가리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협소한 의미로 국한시킬 때, 그 필연적인 결과는 근대 이전의 서구세계를 포함해서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풀뿌리 민중사회에서 지속되어왔던 여러 형태의 좀더 실질적이고 활력있는 민주주의를 완전히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위험한 편견에 빠지기 쉽다. 위험하다는 것은, 그러한 편견으로써는 참다운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전망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간단히 말하여, 민중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다운 민주주의의 성립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민중이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립과 자치의 조건이다. 요컨대 노예의 삶을 강제당하지 않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사람들이 흔히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심화·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갈수록 민중의 자치·자립의 역량을 근원적으로 훼손하고,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끝없이 확대재생산한다. 이것은 극히 단순명료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특히 근대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늘 일정한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나 인간다운 생활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민주주의를 지금 당장 민중이 누려야 하고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언젠가 여건이 성숙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문제로 치부한다. 그 결과, 의도든 아니든 그들은 민중의 자치와 자립이라는 이상의 실현 가능성을 끊임없이 미래의 어떤 지점으로 연기하는 ‘노예소유주’의 정치철학에 동조하는 것이다.

물론 빈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빈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좀더 세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지금도 절대적인 빈곤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빈곤은 시급히 해소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지금 갈수록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기가 어려워져가는 상황에서 저소득층의 생계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포함해서, 오늘날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는 가난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나 써비스의 절대적인 결핍 그 자체로 인한 궁핍감이라기보다는 ‘생활의 질(質)’의 열악함에서 오는 고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