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연수 金衍洙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스무살』『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장편소설『꾿빠이, 이상』『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밤은 노래한다』등이 있음. larvatus@netian.com
장편연재 3
바다 쪽으로 세 걸음
13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밤의 칠정(七情)을 알게 됐으므로. 칠정이란 기쁨, 성냄, 근심, 깊은 생각, 슬픔, 놀람, 두려움으로 이뤄져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내가 알던 밤의 감정은 오직 두려움뿐이었다. 나는 밤의 기쁨이나 성냄, 혹은 밤의 근심이나 슬픔 따위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날 목에서 피를 흘리는 형을 안은 시오를 따라 달려가노라니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귀신들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귀신들은 하나같이 충신이거나 효자거나 열녀거나 절부인 것처럼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채 구멍이란 구멍으로는 죄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귀신들과 눈이 마주친 내가 그 자리에 멈춰서 한걸음도 떼지 못하자, 앞쪽 어둠속에서 시오가 나를 불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한번 더 나를 채근했다. 형을 어깨에 둘러멘 시오가 내 쪽으로 와서 피 묻은 손으로 내 뺨을 후려치고 난 뒤에야 내 말문이 막혔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왼뺨에 피가 묻고 비린내가 풍기자, 귀신들은 아래턱을 움직이며 소리없이 웃더라. 죽은 듯이 시오의 어깨에 늘어져 있던 형과 마찬가지로 나도 곧 삼강의 세계로 들어올 사람처럼 보였던 게지.
귀신은 우리가 찾아간 명례방 곽의원의 집에도 붙어 있었다. 거기 바람벽에는 군기시 앞에서 팔다리가 잘려나간 노란 초립의 사내가 고독한 표정으로 앉아서 물끄러미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떨어져나간 목은 다시 붙였으되 팔다리만은 너무 먼 지방으로 내려가 여태 찾지 못했는지 그저 상체뿐이었다. 그런 몰골로 그는 “왕후장상에 영유종호리오까?”“왕후장상에 영유종호리오까?” 그 말만 되뇌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피부를 채 갖추지 못해 내장이며 핏줄이며 힘줄 따위가 다 비치는 그 투명한 몸속이 햇살 아래 꿈틀대는 잉어의 비늘처럼 영롱한 빛을 뿜으며 아래위로 울렁거렸다. 그때부터 속이 메스껍기 시작했는데, 그게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식이던 솔잎노인의 학풍이 사후세계까지 이어지는 걸 확인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에게 피부가 필요한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기 때문인지는 나로서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내가 덜덜덜 떨면서 그 사내를 가리키자, 형의 목에 난 상처를 살펴보던 곽의원이 그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법 잘 그렸지? 개중에는 배꼽이 너무 툭 튀어나왔다고 말하는 작자들도 있지만, 사상과 오행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의 잠꼬대 같은 소리지. 원래대로 그리자면 저거보다도 훨씬 더 둥글게 그려야만 하는 거야. 뭣도 모르는 상놈들이야 항상 뱃가죽이 등짝에 들러붙어 있으니 오장(五臟)이 오행(五行)을 따른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저 같은 줄 아는 거지. 염병에 걸려서 당장 북망산 가는 날이 오늘내일 해봐야 내 말이 귓구멍에 가서 걸릴까 말까. 끄끄끄.”
자수성가한 내력 그대로 매사에 남 깔보기를 좋아하는 곽의원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그친 뒤에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그건 죽은 초립의 사내가 아니라 사람의 뱃속에 든 내장과 척추 따위를 그린 해부도였다. 효자는 되고 싶으나 차마 자기 살을 벨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곽의원을 소개해주고 싶다. 오행의 섭리로 최소한 병신이 되어야만 나온다는 의금부의 친국청(親鞫廳)에서도 살아나온 사람이니 그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라는 데 나는 은화 3백냥을 걸 수 있다. 그 방 역시 임금이 직접 심문한다는 공포의 친국청과 다르지 않았다. 죽은 듯이 창백한 얼굴로 누운 형의 옆에는 곳곳에 검은 먹으로 혈을 표시해놓은, 갓난아기만한 크기의 나무인형이 나란히 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역모를 꾀하는 자들이 속출한다면 반드시 빛을 발할 게 분명한 날카로운 작두가, 구석 책상에는 크기별로 줄을 세워서 꽂아놓은 침들이,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면 들보에는 내장만 빼고 그대로 말려 시커멓게 변해버린 두꺼비와 지네와 검은 뱀이 매달려 외풍이 들 때마다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의 뼈를 잘 말린 뒤에 숯으로 만들어 겨우내 화로에 태우면서 한기를 덜었던 방이 있다면 아마도 그런 방에 배었을 고린내 같은 게 가득했다. 가히 턱이 없어서 항상 웃는 듯한 표정의 백골들이나 동트기 전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에 들렀다 갈 만한 방이었다고나 할까.
“제기랄, 병 두번 걸렸다가는 네놈 손에 제명을 채우기 어렵겠다. 저게 침이냐, 칼이냐? 저렇게 굵은 놈으로 환부를 쑤셔댄다니 병은 둘째치고라도 살아남을 몸이 어디 있겠누? 필시 저 그림도 직접 배를 갈라보고 나서 그린 것이겠지?”
시오가 곽의원에게 어쩐지 무람없이 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원스레 쏘았다.
“몇년 만에 변성명해서 나타난 이 미친놈의 자식이 무얼 믿고 의원님께 환부 운운하는 것일까? 네 마누라마저도 네놈이 갑동이가 맞는지 의심한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던데, 지금 어디 한번 배를 째볼까? 지금도 간뎅이가 부었는지 안 부었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게지. 끄끄끄.”
“사람 백정 겉은 끔찍한 소리는 여전히 잘하는구나. 죽인다 죽인다 해도 예전에는 빈말이더니만 이제 칼과 침까지 구비했으니 내뱉는 말마다 사생결단이 나겠구나.”
“남만놈과 붙어먹은 이 종놈의 자식이 지금 해동의 편작더러 사람 백정이라고 말했나?”
곽의원이 딱히 내게 묻는 것도 아니면서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 바라보면서 말했다. 꼭 내게 동의를 구하는 것 같아서 나는 “해동의 편작이나마나 저 형한테는 곶감 하나만도 못해요”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그저 어버버버, 상처 입은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뿐. 곽의원은 너라도 입을 다물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보아하니 이 도련님은 피를 많이 흘렸는데, 사람 백정이 무슨 방법이 있어서 살릴 수 있겠나? 난 못하겠네.”
곽의원이 진맥을 보던 손을 내려놓고 돌아앉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시오가 당황한 듯, 얼른 말을 바꿨다.
“사람 백정이라는 말은 취소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본디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제대로 나오지 못해서 입 모양이 험하네. 그래서 내뱉는 말도 생김새가 안 좋아.”
“종놈이 의원님한테 반토막으로 말하는 것도 어머니 해산 핑계를 대려면 대려무나. 내가 무슨 해동의 편작이라고 다 죽은 사람을 살리겠나?”
“그래, 그래, 아니, 그러겠습니다. 내가 사과할 테니, 어서 좀……”
“입 모양은 험하게 생겨도 피리구멍에는 둘도 없이 딱 맞는다고 생각하겠지?”
곽의원이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시오에게 물었다.
“여보, 시오. 여보시오. 아무튼 이름이 이상해. 난 원래대로 갑동이라고 부르겠네. 갑동이, 나는 말이야 소원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건 편작의 침술을 구사한 명의가 아니라 피리소리로 귀신을 감동시킨 해동의 환이(桓伊)로 누대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야. 뭔 말인지 알겠나?”
시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떤가?”
곽의원이 재차 물었다.
“빌어먹을, 제기랄, 염병할. 딴 건 몰라도 피리만은 내가…… 에라이,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라, 아니, 하시오. 해동의 환이가 되든지, 해동의 환장이 되든지. 대신 이 도련님만은 꼭 살려내라.”
그러자 곽의원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암, 진작에 그랬어야지. 어디 보자. 분노와 슬픔이 서로 얽히고설키면 그 고르지 못한 기가 위로 솟구쳐 후두를 막아 하루가 지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사흘이 지나면 목구멍에 솜뭉치가 들어찬 것처럼 숨이 차고, 아흐레가 되면 음양이 다 끊어져 절명하게 되니 족소음경맥(足少陰經脈)에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내보내는 게 급선무인데, 이거 어쩌지? 이 도련님은 스스로 나쁜 피를 빼냈으니 더이상 내가 손볼 일이 없다네. 이대로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니 내가 더 할 일이 없네. 다만 그리하여 몸은 살게 됐으나 마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 마음 살리는 비방이 차차 필요할 것이네. 일단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급한 불은 꺼놓았으니, 보혈약은 차차 짓기로 하고. 우선은 저기 저 아기 도령의 막힌 후두부터 뚫어야만 할 것이야.”
그렇게 말하고 곽의원은 몸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침들을 하나하나 꺼내 등잔불에 비춰봤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침 같은 건 맞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어버버버라는 소리뿐이었고, 그 소리에 곽의원은 더더욱 침을 놓아서 실어 증세를 고쳐야만 하겠다고 말했다. 손을 내저으며 무릎으로 뒷걸음치는 내 몸을 시오가 꽉 붙들었다. 곽의원이 선택한 침은 도낏자루로 쓸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나는 내 몸이 여섯 조각으로 잘리는 광경을 상상했다. 군기시 앞에서 그 처형 장면을 볼 때처럼, 나는 글을 아무리 배워도 역모 같은 건 절대로 꾀하지 않을 테니, 정말 착하고 순한 완으로 살아갈 테니 한번만 살려달라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눈에는 한번에 싹둑 잘라내면 좋으련만 술에 취한 망나니가 제멋대로 휘두른 칼에 반쯤만 잘린 채 너덜너덜해진 내 목의 살이며 핏줄이며 뼈 같은 것들이 보였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생각할 즈음, 마침내 곽의원이 침으로 내 목을 찔렀고, 목구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더니 입에서 검고 끈적끈적한 핏덩어리가 툭 튀어나왔다.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물인 듯 장판지 위에 떨어져서는 조금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그 핏덩어리에서 핏물이 번졌다.
“이 아이의 목숨은 일단 구하게 된 것이네.”
곽의원이 말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생겼다. 그때부터 나는 웃기 시작한 것이다. 아래턱이 떨어져나간 귀신들처럼. 하하하하. 곽의원과 시오가 미친 듯이 소리내어 웃어대는 나를 어쩌지 못하고 빤히 쳐다봤다. 남들보다 두배나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 나는 80대 노인보다도 더 늙어버렸다. 그래서 옛일을 생각하면 기억이 아득해 그게 진짜 일어난 일인지 망상 속에서 내가 지어낸 얘기인지 헷갈릴 때가 많지만, 이 사실만은 분명하다. 곽의원에게 침을 잘못 맞은 뒤로 나는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 즐거울 때도 웃었지만, 슬플 때도 웃었다. 나중에 형은 내가 폭소를 터뜨릴 때면 그게 좋아서 그런 것인지 슬퍼서 그런 것인지 몰라 답답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렇게 자꾸 울어야 할 때 웃게 되면, 나중에는 나 자신마저 헷갈리게 된다. 과연 나는 지금 기뻐하는 것인가, 슬퍼하는 것인가.
그러니 웃다 지쳐 잠든 내가 이런 꿈을 꾸게 됐다면 아버지는 기뻐했을까? 아마도 기뻐했을 것 같다. 그 꿈속에서 뻘건 빛으로 물든 얼굴로 크게 웃은 것으로 봐서는. 그건 사대부의 어엿한 자제나 꿀 수 있는 꿈이 분명했다. 그 꿈이라는 건 한장의 목판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선들이 흐릿하고, 그림 속의 얼굴은 자세하지 않아서 장담할 수 없었는데도, 나는 그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이 나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림 속에서 네번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내 모습은 칼로 목판을 깎아내어 만든 선으로 남았다. 첫번째. 맨 아래 오른쪽에서 그림 인간이 된 나는 충신인 아버지가 역적의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자, 의금부 바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두번째. 그 그림 인간은 대각선 왼쪽 위의 여백으로 올라가 이번에는 차가운 얼음 위에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패도를 높이 치켜들고 제 목을 찌른다. 세번째. 목에 칼자국이 난 채로 어진 임금께서 그 효성을 높이 사서 내린 정표(旌表)를 받기 위해 약간 위쪽으로 걸어간다. 네번째. 여전히 목에 구멍이 난 나는 마지막으로 맨 위쪽으로 움직여 옥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를 위해서 잔치를 베푼다. 그렇게 그림 인간이 된 내가 한번 자세를 잡을 때마다 그림 속에 그 흔적이 남아 오른쪽 아래에서 점차 위쪽으로 보면 이야기의 순서를 알게 된다. 이로써 완은 『삼강행실도』에 효자로 오르게 됐으니, 어찌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효자 완의 상처라고는 목에 난 칼 구멍뿐이라는 사실(그림에서는 피 한방울도 튀지 않았다)이 좀 불안했다. 할머니가 누누이 말했다시피 효행의 길은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자해의 길이 아니었던가? 『삼강행실도』에 오른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왕무자(王武子)의 아내는 병든 시어머니를 위해 다릿살을 베고, 석진(石珍)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 그런 (효행에) 미친 인간들이 모범사례로 등장하는 마당에 그 정도 자해로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우리 어진 임금께서 선뜻 정표를 내린다는 게 좀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맨 위쪽 마지막 그림에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잔칫상에 올라간 그릇마다 피가 고여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보게 된 그림의 제목은‘허완혈연(許宛血宴)’이었다. 아아아, 그건 마르내 허완이 억울하게 죽은 부모님과 할머니를 위해서 피의 잔치를 벌이는 그림이었다. 그때, 잔칫상 뒤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가 갑자기 일어섰다. 꿈속의 목판제작자는 이 부분에 공을 들였는지 그분들의 무릎에 박힌 사기조각과 골절되어 흐느적거리는 팔다리가 선명하게 묘사돼 있었다. 피투성이 몸으로 서서 그분들은 맛난 음식을 먹어서 참 기쁘다는 듯이 하하하 호호호 웃으시고는 그림 속 완에게 손을 흔들더니 몸을 돌려 그림 바깥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림 속 완은 그분들을 만류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원래 자세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상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먼 길을 간다면, 아버지나 할머니는 몰라도 어머니라면 한번쯤 다시 돌아와 완을 안아줄 텐데, 절대 매정하게 돌아서서 한번에 떠나실 분이 아닌데. 그렇게 이상해, 이상하다고 내가 생각하는 동안, 그분들은 모두 그림 속에서 빠져나가고 네명의 완과 휘장 속의 어진 임금만 남게 됐다. 네명의 완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고, 어진 임금은 난감하다는 듯이 부채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영영 이별이었다.
그로부터 몇달 뒤, 우리 형제가 거지꼴이 되어서 전국을 헤매고 다닐 때, 우연히 무슨 말인가를 나누다가 그날 형도 나와 똑같은 내용의 꿈을 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목판화 속의 그림 인간들이었지만, 형은 행장(行狀) 속의 문자들이었다. 내 꿈에서와는 달리 아버지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몸으로 형의 꿈에 나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붓에 핏물을 적셔서 종이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붓은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아버지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어 하얀 종이는 금세 붉은 글자로 가득 찼다. 아버지는 그 글을 형에게 읽어줬다고 한다. 글의 주인공은 한 남자였다. 아버지는 그 남자의 이름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의 조상은 어떤 자들이며, 그는 몇년에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등을 중얼중얼 되뇌었다고 한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이 꿈의 핵심은 아버지도 이제 솔잎노인과 같은 반열에 올라 아직 살아 있는 그자가 몇년에 죽게 되는지도 예언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형은 그걸 예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형은 그걸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형의 꿈에도 제목을 붙일 수 있다면, 아마도 그건‘허규혈맹(許揆血盟)’이 될 듯하다. 손을 흔들며 멀리 떠나는 부모님을 보면서 형은 뭔가를 계속 맹세했다. 그날 형이 꾸었다는 그 꿈, 나중에 내가 형을 비난할 때 제일 먼저 거론해 형의 마음을 발기발기 찢어버린 그 꿈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꿈속에서 형이 한 맹세에 대해서는 며칠 뒤 바로 듣게 됐다.
14
곽의원은 형의 목에 난 자상 부위에 쥐의 뇌를 바른 뒤, 그 위를 절인 물고기의 부레로 덮어 피를 멎게 만들었다. 그리고 들보에 매달아둔 말린 두꺼비를 내려 기와 두장 사이에 끼워넣은 뒤 불에 달궜다. 엄동설한인데도 두꺼비를 태우는 곽의원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내가 옆에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자, 곽의원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런 걸 어떻게 먹겠느냐고 말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이 녀석아, 조물주가 내신 이 세상 만물 중에 쓰지 못할 게 어디 있겠느냐? 그리고 모두 쓸 데가 있는 것이라면 약 아닌 건 또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그런 소리가 나와? 심지어 사람의 오줌과 똥도 다 약에 쓴다. 오줌은 기침을 그치게 하고 심폐를 좋게 해주며 눈을 밝게 하지. 똥은 말려서 쓰면 미쳐서 날뛰는 사람을 진정시키는 데 즉효고. 두꺼비 태워서 먹는 건 우리 의원들 사이에서는 산해진미에 속한다.”
“우리 형은 식성이 까다롭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부모님과 할머니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형이 미쳐서 날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랄까. 제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형은 그 잿물을 하루에 세번씩 받아마셨다. 하지만 워낙 솔잎 같은 형편없는 음식으로 단련된 몸이라서 그런지 두꺼비 태운 잿물로도 형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과연 곽의원이 언제 똥을 말릴 것인가 궁금했다. 아마도 그때 형은 이 세상을 잠시 떠나 있었던 것 같다. 몸만 이 세상에 두고 정신은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가 있었던 게다. 그것도 너무 오래 가 있었던 게다. 그 뒤로 아홉 겹의 마음 중, 그 제일 안쪽에 있는 형의 마음은 영영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이 세상으로. 초희와 형과 내가 함께 올려다보던, 구월 초이튿날의 자미성 아래,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으로. 그렇게 해서 형의 마음 가장 깊은 부분은 텅 비어 있게 됐다. 형의 정신이 좀체 돌아오지 않자 당황한 곽의원은 오음(五音)으로 치료하면 된다며 한밤중에 피리를 불거나(그 피리소리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마저 정신을 잃게 만들 정도로 지루했다) 귀신으로 인해 생긴 병이니 명매기〔胡燕〕의 똥을 먹으면 된다며(드디어 사람의 똥을 먹기 직전 단계까지 도달한 것이다) 정월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제비집 속을 뒤졌지만, 모두 헛수고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대감들(주로 종기로 고생한)과도 말을 터놓고 지낸다는 곽의원이 뒷배를 봐준 덕분에 시오는 전옥서(典獄暑)에서 부모님과 할머니의 시신을 수습해 광희문 바깥 어느 염장이 집에 모셔놓았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곽의원은 마지막 수단으로 가슴에 맺힌 울혈을 없애는 약인 도체산(導滯散)을 짓기로 했다.
“그게 왜 마지막 수단인가요?”
그 말을 듣고 내가 곽의원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 그, 그게 나는 원래 개나 소나 다 생각할 수 있는 처방은 안, 안, 안하기 때문이다. 나, 나,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병을 고치고 싶은 것뿐이다. 하, 하, 하지만 한번쯤은 남들처럼 약을 지어도 괜찮겠지.”
당황하니까 곽의원은 말을 더듬거렸다.
“마지막 수단은 똥 아니었나요?”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곽의원 앞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미쳐서 날뛰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으니까. 처음부터 도체산을 지었으면 됐을 텐데, 그 알량한 자존심이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도체산에 들어가는 약재 중 사향을 구할 길이 없어서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동평관에 머무는 일본 사신들이 중국 운남성에서 나온 사향의 판로를 알아보고 있다는 소문을 시오가 듣고 왔다. 사향을 구하기 위해 시오와 함께 동평관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는 그 자존심 강해 대감이든 영감이든 예사로 반말을 쓰는 곽의원이 사실은 천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치 거머리처럼 사정없이 피고름을 잡아빼는 속칭 곽머리 침술은 모르겠으나 피리 부는 일만은 곽가보다 자신이 윗길이라는 말을 떠들어대던 끝에 시오가 들려준 이야기 덕분이었다. 곽의원과 시오가 서로의 피리 실력에 그토록 민감한 이유도 그때 들었다.
곽의원의 아버지는 본래 충주의 관노로 피리를 잘 부는 통에 장악원(掌樂院)에까지 들어가게 된, 보기 드문 악공이었다. 어머니는 정승집 사비였으므로 곽의원도 신분상 시오와 별다를 바 없는 사노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출세하면서 식구들이 모두 노비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른살이 되어 그 아버지가 종기로 앉아 있지도 못할 형편이 되자, 10년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아버지의 병든 몸을 상대로 고래(古來)의 침술을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게 환부를 침봉으로 절개해 피고름을 다량으로 뽑아내면 종기의 뿌리를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그 방법을 알아내기 전에 죽었는데, 소문에 따르면 종기로 죽은 게 아니라 급기야 종기를 만악의 근원으로 생각하게 된 아들이 종기와 함께 생살을 모두 도려내는 통에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죽었다고 한다. 나쁜 소문일 뿐 사실일 리는 없겠지만, 그 소문은 곽의원의 이름을 팔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삼강행실도』의 목판화들에 묘사된 이야기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그 나라에서, 제 살이 아니라 병든 아비의 생살을 잘랐다면 그게 비록 소문일지라도 곽의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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