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백낙청 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문학평론집 이외의 저서로 『흔들리는 분단체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 『21세기의 한반도 구상』(공저) 등이 있음. paiknc@snu.ac.kr
* 본고의 바탕이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사망 25주년이 된 작년 11월 호주 월롱공대학(University of Wollongong)에서 열린 ‘박정희시대: 25년 뒤의 재평가’(The Park Era: A Reassessment After Twenty-five Years)라는 국제학술회의에서의 기조연설문이다.(기조연설자는 두 명이었는데 경제분야를 주로 다룬 첫날은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이 맡았고 정치·사회·문화 분야에 치중한 둘째날이 내 차례였다.) 사전에 준비한 ‘How to Think About the Park Chung Hee Era’라는 제목의 원고가 회의자료로 배포되었지만, 실제 구두발표는 전날의 토의내용을 감안해서 약간 보완했으며 그후 이 발표에 가깝게 수정하고 몇개의 각주를 추가한 글을 2005년 2월 창비 홈페이지 영문판에 올린 바 있다(www.changbi.com/english/related/related22.asp). 본고는 주로 후자의 내용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지만 국내독자를 위한 글임을 의식해서 원문에 집착하지 않고 첨삭했다. 이 자리를 빌려 국제학술회의를 주관하고 필자를 초청해준 월롱공대학(당시. 현 호주국립대)의 김형아 박사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국제학술회의 ‘박정희시대: 25년 뒤의 재평가’ 주최측에서 나를 기조연설자의 한 사람으로 초청한 것은 아마도 박정희(朴正熙)시대에 대한 첫날 기조연설의 매우 긍정적인 평가와 균형을 맞출 비판적 내용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발표가 실제로 그런 비판을 담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른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강력한 최고경영자(CEO)로서 박정희가 지녔던 여러 장점에 대한 오원철(吳源哲) 전 청와대 수석 등 여러 사람의 주장 대부분을 나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다만 하나의 나라는 결코 기업체나 공장이 아니며 전혀 다른 차원의 고려도 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영어로 What to think가 아니라 How to think about the Park Chung Hee Era―라는 제목은 전문성은 물론 최소한의 교양독서조차 부족한 나의 고민을 반영한다. 제대로 된 평가를 하고 결론을 내리기보다 이 과제에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를 주로 생각해보려는 취지이다.
박정희시대가 박정희 개인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 박정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그 시대에 대한 평가를 크게 좌우함은 불가피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한국에서 박정희에 대한 반응은 찬반대립이 뚜렷하며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박정희시대를 직접 겪은 사람들이 아직껏 많이 생존하여 활동하고 있는바, 그중에는 박정희의 통치에 직접 가담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 통치의 덕을 보았고 상당한 기득권을 갖게 된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박정희 치하에서 고문과 투옥, 재산이나 기타 권익의 박탈을 겪은 희생자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을 함께 겪었거나 심지어 가까운 사람을 영영 잃어버린 가족과 친지 들도 있다.
그 어느 한쪽도 객관적 재평가의 최적임자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4반세기 뒤의 평가가 최대한으로 객관적일 필요가 있다고는 해도, 동시에 이런 살아있는 육성들에 귀기울이지 않은 어떠한 학문적 평가도 온전한 객관성을 자랑할 수 없다. 특히 피해자들의 육성을 들을 필요성이 절실한데, 이들의 육성은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억압되었던데다가 우여곡절 끝에 가청권(可聽圈)에 들어온 경우에도 학자들이 좋아하는 ‘객관적 자료’에 편입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 희생과 고난을 근대화 과정에서 어차피 불가피한 ‘부수적 손상’(collateral damage)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피해자들의 인간적 분노를 야기함은 물론, 학문적 작업의 수준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십상이다. 최근 들어 과거의 어두운 진실들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이를 외면했던 역사적 평가들의 객관성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개인적으로 나는 박정희독재의 피해를 특별히 심하게 입은 경우는 아니다. 다만 대학교수로서나 문학평론가로서, 또 잡지편집자이자 출판인으로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박정희시대의 탄압을 직접 경험하거나 근거리에서 목격한 바 있다.1 이를 근거로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 성취가 좁은 의미의 인권과 민주적 가치의 영역에 국한될 성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주화 자체가 경제발전에 대한 장기적 기여를 포함한다고 믿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더 논하기로 한다.
그러나 대체로 박정희 개인이나 박정희시대의 업적으로 거론되는 경제분야에 대해 민주화진영이 소홀한 면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민주화운동은 노동자의 권리와 공해억제를 주장하고
- 원래의 기조연설에서는 이른바 subject position 즉 ‘주체가 처한 위치’를 밝히면서 논술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조금 더 자세히 서술했으나 국내독자를 위해 그럴 이유는 없으리라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