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박정희신화와 박정희체제
조석곤 趙錫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 『한국 근대 토지제도의 형성』 『한국경제성장사』(공저), 주요 논문으로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압축성장을 위한 전제조건의 형성」 「농지개혁과 한국자본주의」 등이 있음. sgcho@sangji.ac.kr
역사는 전설이 되었고, 전설은 신화가 되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중에서
1. 머리말
영화 「반지의 제왕」은 이국적인(사실은 동양적인) 것에 대한 적의(사실은 공포)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재미있는 영화이다. 역경을 헤쳐가는 영웅들의 모습, 그들이 보여주는 숭고한 인간애 등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며, 때문에 영웅사관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영화를 비판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판타지니까.
그런데 영웅사관은 영웅의 어떤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비현실), 그의 실존적 자아를 부정한다. 그리고 영웅사관으로 표현되는 그 시대에 대해서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영화 속에서 역사가 신화가 되기까지는 2500년이 걸렸지만, 박정희(朴正熙)시대의 경제적 성취와 1987년 이후의 무기력함이 대비되면서 박정희는 너무 빨리 신화 속 영웅이 되었다. 이것이 그 시대의 객관적인 역사해석을 가로막는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1 이 글의 목적은 박정희체제를 역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박정희신화의 허상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 과제가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올바른 미래전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민족중흥’을 위해, ‘잘살아’보기 위해 ‘총화단결’하자는 박정희 슬로건이 사회적 합의의 소산은 아니었다. ‘지도(指導)’받은 자본주의는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을 20여년도 안돼 ‘국민소득 1000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의 나라로 만들었다. 하지만 성장의 이면에는 취약한 자본시장, 불균형 성장에 따른 양극화, 불모의 복지정책, 희생을 강요당한 노동계급 등이 감춰져 있었다.
박정희 사후에도 군부정권이 잠시 명맥을 유지했지만,1987년 이후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의 승리를 쟁취하였으며, 이후의 경제씨스템도 박정희시대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 글에서는 쿠데타 이후 1987년에 이르는 시기를 ‘박정희체제’, 그후를 ‘87년이후체제’라 부르기로 한다.2 ‘박정희체제’는 최근 들어 개발독재라는 개념으로 정착되어가고 있지만, 87년이후체제에 대해서는 이러한 합의가 없다. 1987년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개발독재 이후 그것을 대체할 축적구조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1987년 이후는 공통점을 갖는다.
사회과학이 현실에 대한 성찰을 기초로 더 나은 미래사회를 모색하는 학문이라면, 박정희체제를 분석하고 미래사회의 전망과 관련하여 그 체제를 평가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의 과제가 박정희체제 출발점에서의 과제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박정희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성장과제를 계속 추구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근대의 시대이면서, 협동과 혁신을 향한 새로운 모색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탈근대의 시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박정희체제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해한다 함은 그것의 형성·발전·소멸과정을 살펴본다는 것이며, 그것을 당시의 대내외적 여건을 고려하여 살펴본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박정희 개인의 특성과 관련한 ‘편승이냐 리더십이냐’라는 주제와 박정희체제의 운영방식과 관련한 ‘민주화냐 성장이냐’는 주제를 각각 살펴보고자 한다.
2. 박정희, 위험한 신화
3공화국에 관한 논의나 연구에서 박정희체제와 박정희를 동일시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는 정권의 권위주의적 특징 탓이지만, 그만큼 박정희신화가 기승을 부릴 여지가 많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산업화의 성공을 둘러싸고 ‘편승이냐 리더십이냐’는 논쟁이 있는데, 이는 체제의 성공을 박정희의 개인적 특징과 연결시킨 대표적 논의이다. 그런데 편승이든 리더십이든 적어도 산업화에 관해서는 박정희체제의 성공을 전제한 뒤 그것을 인간 박정희의 개성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박정희신화는 박정희체제를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 박정희의 차원에서 접근한 데서 출발한다. 인간 박정희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경우도 변절로 점철된 그의 인생역정에 촛점을 두는 경우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국의 대통령이 된 인간승리에 촛점을 두는 경우로 나뉠 수 있다. 이처럼 개인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느 측면이 강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질 소지가 있다.
하지만 3공화국의 의사결정에 박정희가 행사한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개성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다. 이승만정부의 반일주의(反日主義)가 박정희체제에서 무력화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3 박정희의 집권에서 죽음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에 의해 새롭게 주조되기도 했으며, 산업화의 방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 변화를 모두 박정희의 개성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큰 틀의 변화는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5·16쿠데타 당시 권력의 향배를 좌우할 결정적 열쇠를 쥔 것은 미국이었다. 이승만정권 붕괴 이후 민주당정권이 정국을
- 박정희신화를 부추기는 논자들조차도 박정희체제의 근본원칙과는 다른 주장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박정희체제는 ‘강한’ 정부에 의해 지탱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그와는 달리 규제완화, 시장의 부활을 외치는 최근 보수세력의 주장은 ‘약한’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박정희의 부활방식은 매우 ‘희극적’이다. ↩
- 국가에 의한 신용할당과 노동통제를 박정희체제의 근간이라고 생각한다면 1980년 전후의 정치적 격변보다 1987년 6월항쟁 전후의 변화가 더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해방 이후 한국자본주의를 시기 구분한 것으로, 유철규 엮음 『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역사와 위기』(함께읽는책 2003)가 있다. 1987년 이후 경제적 변화에 대해 유철규는 “내수시장의 역할이 재평가되었고, 미국 일변도의 수출시장 구성이 갖는 한계가 인식되었으며, 본격적인 한국자본의 해외진출이 시도되었고, 투자를 결정하는 주체가 정부로부터 민간대기업으로 바뀌어갔다”고 주장한다(유철규 「1980년대 후반 경제구조의 변화와 외연적 산업화의 종결」, 『박정희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함께읽는책 2004, 78면). ↩
- 친일―좌익―극우로 변신하였지만 일관된 것은 그는 항상 군인이었으며, 일본에 대한 일종의 숭배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준식은 군인·영웅·일본에 대한 숭배가 박정희가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사회관·역사관이고, 이 때문에 이승만정권 시절만 해도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지배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이던 반일주의가 박정희시대에 사라졌다고 보았다. 이준식 「박정희시대 지배이데올로기의 형성: 역사적 기원을 중심으로」, 홍석률 외 『박정희시대 연구』, 백산서당 2002, 19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