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신경숙 申京淑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1985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 『종소리』 『모르는 여인들』, 장편소설 『깊은 슬픔』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등이 있음.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너의 작별인사가 담긴 이메일을 받았을 때 나는 지금 너한테 가겠다고 했다. 너를 보러 가야겠다,고. 그것밖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의 청은 너에게 닿지 않은 모양으로 너에게서는 답변이 없었다. 이틀을 기다리다가 통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전화번호를 찾느라 그동안 너와 내가 주고받은 이메일들을 살펴보기 위해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이삿짐을 싸다가 발견한 앨범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듯 너의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 클릭한 이메일 앞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마당에 일이 많아서 도와주는 분을 구했는데 서른여덟살 된 러시아 남자가 왔어, 두 아이를 두고 이혼을 했다는 그 사람은 하루 종일 커피만 마시면서 너무 열심히 일해서 좀 쉬고 해요, 했더니 쉬는 건 부자나 하는 거예요, 하더라. 이메일을 읽다가 너에게서 손편지를 받았던 때가 떠올라 서랍 속을 뒤져 몇통을 찾아내기도 했다. 손편지는 주로 발굴지에서 쓴 것들이었다. 인근의 큰 시장에 가서 버섯도 사고 홍합도 사서 숙소로 돌아와 밥해 먹고 나른하게 앉아 있어. 비가 내려서 쉴 수밖에 없는 날이야. 비가 내리는 시장엔 사람이 많았는데 채소나 허브 생선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말고기로 만든 소시지를 파는 가게도 있었어. 말고기 파는 가게 앞에 살아 있는 말 한마리가 매여 있어서 한참 쳐다봤어. 결혼 후 너는 자주 앞으로 얼마간 연락이 되지 않을 거라고 쓰고 있었다. 터키의 발굴지로 팀을 꾸려 떠나는데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칠흑같이 어두우면 별무리는 더 빛나 보이고 달도 더 환하겠지, 불편할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대장인 팀이고 모두 결속력이 좋은 사람들이라 염려는 안 한다고. 그렇게 몇년 사이에 한달 두달 길게는 한계절씩 너는 너의 스승이며 남편인 대장이 꾸린 발굴팀의 팀원이 되어 시리아로 이라크로 물이 사라진 폐허의 유프라테스강 쪽으로 떠나곤 했다. 예전에 분명 읽었겠으나 처음 읽는 듯 여겨지는 이메일도 있었다. 나 독일로 올 때 십년쯤 공부라는 걸 하고 나면 훨씬 좋은 글 새로운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 어리석게도 말이야. 십년이 지나고 박사과정이 끝나고 나니 찾아온 건 무기력과 불안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나와의 조우였어. 너의 체념과 다짐이 서린 문구에 서늘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한국을 오래 떠나 있어서 시를 망쳤다고 하더라. 그런 말을 어딘가에서 읽을 때면 마음이 스산해지기는 하지만 읽고 쓰면서 사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지. 박사과정을 마치고 너가 결혼을 하고 집이라는 곳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너의 마음도 거기 있었다. 너가 살게 된 집은 마당이 아주 넓다고 했다. 전나무도 많고, 꽃도 많다고. 그곳에선 집이 한국처럼 재산목록의 첫 순위로 들어가는 대상이 아니어서 집값이 비싸지 않아 마당 넓은 집에 살 수 있는 거라며 서울에서 살았던 작은 옥탑방, 광화문 스튜디오, 지하 방들을 생각하면 지금이 거짓말 같다고 했다. 나이가 든 집이라서 그런지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생기긴 한다고도 했다. 수도관이 고장 나서 물이 지하실에 고이기에 사람을 불러 고치고 있는데 큰 공사는 끝나고 이곳저곳 작은 수리들이 남았다고도. 너가 전화를 여러번 한 날도 메일에 적혀 있었다. 전화를 여러번 했어, 네 생일이랑 주소 좀 알려고, 내년부터 네 생일을 챙기려고 해. 너 물병자리 아니니? 곧 생일인 거 같은데… 우리가 언제부터 전화가 아니라 이메일로만 연락을 하게 되었는지 헤아려봤으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의 전화번호를 폰의 연락처에 입력하고 전화를 걸어보았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이메일을 썼다. 너에게 가고 싶다고 그냥 너의 곁에 가만히 있다가 오겠다고. 너의 집 근처의 호텔에 방을 얻고 너를 하루에 한번, 두번, 혹은 세번만 보고 오겠다고. 작별인사 이후로 너에게서는 답신이 없었다. 나는 또 이메일을 썼다. 오늘은 일요일 밤이고 내일이 월요일이네. 날이 밝으면 가능한 빠른 날로 비행기표를 끊으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기차를 타고 너의 집이 있는 도시의 역에서 내리겠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너에게 갈게. 내가 가도 되는지만 알려줘. 점점 말이 짧아졌다. 너의 집에도 봄이 왔겠구나. 너가 좋아하는 마당에도 나무에도. 그것들 곁에서 잠깐씩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내게 줘. 아무 말도 안 해도 좋아. 한번은 봐야지,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냥 얼굴이나 서로 보게,라고 썼다가 지웠다.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우고 남아 있는 말 너를 한번만 볼 수 있게 해줘 한 문장만 써서 보냈다. 생각이 날 때마다 전화를 걸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신호음뿐이었다. 나는 작년 가을 전에 너에게서 받은 이메일을 찾아보았다.
해가 가기 전에 너에게 다시 소식을 전하고 싶지만 혹 연락이 닿지 않으면 잘 지내고 있겠거니, 생각해주렴.
그때 나는 그 문구를 한참 들여다보며 아직 가을도 전인데… 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긴 했다. 너가 살고 있는 나라의 정부에서 꽤 오래전부터 주택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를 태양열로 대체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너도 그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 시기에 맞춰 미처 못한 집수리도 더 할 계획이라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인가, 넘겨짚어보다가 너가 연락을 하지 않으면 내가 하면 되지, 생각하며 끼어든 걱정을 접어두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아도 사는 일은 때로 전화 한통 이메일 한통 보낼 틈이 없이 흘러가기도 한다. 너에게서 정말 연락이 없네, 오늘 밤엔 이메일을 써야지, 하면서 시간이 또 흘러갔다. 그러다가 너에게서 먼저 이메일을 받았다. 오랜만에 해가 바뀌고 난 뒤에 받은 것이었다. 그렇게 오래 연락이 끊긴 건 처음이었다. E가 아이슬란드에 왔다가 너가 사는 곳에 들렀다는 것이 첫 문장이어서 E는 또 너를 만났겠구나, 부러움이 일었다. E를 반가워했을 너를 생각하니 금세 좋아져서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이야기도 많이 하고 함께 밥도 먹었겠지. 너의 시를 번역하는 분이 빠리에서 와 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너의 시를 불어로 옮기는 번역자는 어떤 사람일까? 잠깐 생각도 해보았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꽤 오랫동안 나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고, 아직도 내가 걱정할까 망설이고 있다고 할 때까지도 내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그대로였다. 작년 6월에 나는 위암을 진단받았단다,라고 쓴 너의 문장을 읽었다. 불시에 누가 던진 수류탄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배가 너무 아파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는데 며칠 이런저런 검사를 하더니 위암이라고 하더구나. 수술 전에 네번의 항암치료를 받았고, 수술은 여덟시간이 걸렸는데 위 전체와 식도의 한 부분과 임파선 몇개를 잘라내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네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그 기간이 육개월이 넘게 걸렸다고. 그사이 나는 많이 말랐어… 나 자신도 놀란 마음과 함께여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어,라고 쓰여 있었다. 병원에는 두달 반 정도 있었으며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많은 날들이었다고. 이런 일들은 지나간 것이고 지금 현재는 이렇다라면서 1월 23일 다시 CT 촬영을 받아야 하고 그걸 통해 정말 종양이 현재 너의 몸에서 사라졌는지 확인을 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의사들은 낙관적이고 너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고 만일 종양이 남아 있다면 항암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고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계속 삶은 살아야 하니까 잘 견디려고 한다,고 쓰여 있었다. 낙관적인 마음이 병을 좀더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기를 바라기에 산책도 하고 작은 일들을 조금씩 하고 있고 다행히 남편이 잘 견뎌주고 있다면서도 남편도 그사이 아파서 병원에 삼주 입원해 있다가 11월에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담담히 알렸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 좋지 못한 소식을 꼭 이렇게 전해야 하는가 싶은 생각은 여전하다면서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다. 차마 더 빨리 소식을 전하지 못한 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소식 또 전하겠다고 끝을 맺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낮의 바람 소리도 골목으로 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도 다 끊기고 내 책상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나는 적막이 불러일으킨 긴장을 깨기 위해 목울대를 억지로 움직여 음, 소리를 내보았다. 내가 방금 읽은 것들은 무엇인가. 어떤 책의 문장을 읽은 것인가, 아니면 혹 내가 방금 어떤 문장을 쓴 것인가. 너의 소식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고 내가 글을 쓰는 중이거나 혹은 책을 읽는 중인 것 같은 혼란을 불러왔다. 너가 암이라고? 다시 골목의 트럭이 지나가는 소리가, 세면장의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노트북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려 창 쪽을 보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내가 심은 나무의 굵은 가지들이 한밤 폭풍에 부러지고 찢겨나가고 두 발을 딛고 있던 모든 땅이 균열을 일으키며 흔들릴 때 절벽에 서서 저 아래 묶여 있는 배를 내려다본 적이 있다. 검푸른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조각배를.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그것은 마치 한걸음만 옮기면 내가 쉴 수 있다고 고통과 불면의 밤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순간 마음에서 물결처럼 인 생각이 한쪽 발을 붙잡았다.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자. 내가 암에 걸렸다고. 그러니 견디자고 견딜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그런데 너가 암이라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앞집 담장 안의 소나무 위에 내려앉아 있던 까치가 다른 나뭇가지로 옮겨 앉는 게 보였다.
아이슬란드로 가는 길목인지 아니면 돌아오는 길목인지에서 너를 찾아갔다는 E에게 만나자고 문자를 보냈다. E가 곧 너의 연락을 받았느냐고 물어왔다. 받았지만 믿을 수가 없네,라고 답을 보냈다. 저녁에 마주 앉은 E가 놀랐지요? 물었을 때도 실감이 나야 놀라지, 했다. E는 예, 그럴 거예요,라고 했다.
—선배 책 불어로 번역하는 분을 제가 좀 알아요. 여행 중에 그분과 연락이 닿았고 선배도 보고 싶고 해서 그분과 선배를 만나러 가기로 했죠. 예전에 우리가 같이 갔던 그 기차역까지 선배가 나왔어요. 저만큼 선배가 걸어오는데 한눈에도 사람이 너무 작아진 거예요.
—원래 작았잖아?
—예, 그래도 더 작아져서 날아갈 것 같이 작아져서… 제가 별일 있지요? 물었더니 나 위암 수술했어… 남의 말 하듯이 툭 그러더라구요. 어젯밤에 폭풍이 좀 있었어, 하는 투였어요. 좀 멍해져서 그 일에 대해서는 더 묻지도 못하고 있다가 돌아올 때 어느 틈에 선배에게 좀 무뚝뚝하게 말했습니다. 혼자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요. 선배 상태를 알릴 사람한텐 알려야 하는 거라구요. 낯선 타국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혼자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요. 딱 집어서 선배에겐 꼭 연락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뭐라고 해?
—여기가 나한테 왜 타국이야? 하더니 알지, 알아… 그랬어요.
E와 나는 저녁을 먹는 대신 어두워진 성곽 길을 따라 걸었다. E는 번역가하고 너를 만나서 너의 남편이랑 너의 책 번역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고 했다. 너는 아주 작아진 채로 그래도 많이 웃었고 아주 작은 양이지만 하루에 음식을 여러번에 나눠서 먹기도 했다고. 나는 E에게 너가 서울을 떠난 지 이십오년이 되었다는 것, 그사이 너는 서울에 겨우 세번 왔다는 것, 세번째 왔었을 때 너가 얼마나 단단해 보였는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E와 나는 그렇게 오년 전 함께 너를 만나러 가서 보았던 너의 모습들 중 좋은 것들만 회상했다. 너가 해준 음식들과 너와 함께했던 긴 산책들과 너의 안내를 받아 오래오래 걸어다녔던 너의 집 근처의 성당, 도서관, 학교로 이어지는 길들에 대해. 그러면서도 E와 나는 우리가 서로 한사코 어떤 이야기를 피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너의 집에 사흘 동안 머물렀을 때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무기력과 슬픔. 그래도 E와 걷고 이야기를 하는 중에 너의 지난 몇개월에 대해 얼마간 안도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폭풍이 좀 있었고 그 폭풍은 어제의 일이지 오늘 것도 내일 일도 아니리라고. 지나간 것, 더구나 나쁜 일들은 더이상 상기하지 말자고. E와 헤어져 집에 돌아와 책상의 흐트러진 것들을 바르게 놓고 먼지를 닦고 너의 책들을 책꽂이에서 꺼내 앞에 놓고 너에게 이메일을 썼다. 혼자 그렇게 아프고 수술받고 잘 견디었네. 잘했어. 다만 1월 23일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그때는 바로 그대로 알려줘. 그리고 썼다. 뭐라고 자꾸 말을 해. 내가 이렇다…라고 얘기를 해야 해. 서로 살고 있는 거리도 너무나 먼데 너가 아무 말도 안 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라고 쓰다가 울적해졌다. 너가 아픈 것만 모르는 게 아니지, 싶었다. 우리가 서른을 앞두고 있을 때 독일로 너가 왜 떠났는지조차 나는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는 항상 너가 곧 돌아올 거라고 여겼다. 너가 그곳에서 공부에 빠져 있을 때도, 너가 결혼을 했을 때도, 너가 고고학자로서 남편과 함께 발굴을 하러 유적지로 떠나는 삶을 오랫동안 보낼 때도 나에게 너의 집은 여기에 있지, 거기 있는 게 아니었다. 집이 여기 있으니 너는 돌아올 거야,라고 생각했다. 내게 너는 지금까지도 떠나서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서울을 떠나고 이십오년 동안에 너에게 생긴 일들 중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일들이 있긴 한 것일까. 내가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고 해도 나는 알고 싶어,라고 썼다.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무것도 모르니까, 있는 그대로 알려줘,라고. 말하는 순간이라도 너가 나은 기분이 들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을 해,라고 했다. 혼자서 그거까지 참지는 마, 나도 너가 아픈 것까지 모르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네,라고 쓰면서 아픈 사람을 두고 이게 무슨 억지란 말인가 생각했다.
다시 CT 촬영을 받아야 한다는 1월 23일이 하루 지난 후에 너는 소식을 전했다.
어제 진단을 받으러 갔는데 오늘에야 결과가 나왔어. 결과는 좋고 지금으로서는 더이상 종양이 없다는구나. 다음주부터 재활치료를 하러 가게 돼. 차근차근 몸을 추스를 준비를 해야지. 지난 시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고 어떤 문턱에 서 있었는데 그 생각은 지금도 그런 것 같아. 어제 거의 삼개월 동안 있었던 병원 건물을 다시 보니 덜컥 겁이 나기도 하더라. 아직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내 의지랑은 아무 상관 없이 지낸 시간이었으니… 다음 진단은 삼개월 후 그때까지 잘 지내야지 하는 마음. 운동도 많이 하고 잘 먹고… 걱정 끼쳐서 마음이 아리네. 사랑하는 마음, 더 소중하게 가져야지, 하는 마음만 든다.
나는 왜 그때 너에게로 가겠다,라고 하지 못했을까? 그때 너에게 가겠다고 했으면 너는 그러면 좋지… 했을 텐데.
1월 23일과 너가 다시 병원에 있다는 메일을 보내온 사이에 설이 있었다. 설 하루 전날 떡국의 고명으로 쓰기 위해 삶은 사태를 찢다가 말고 책상으로 가서 너에게 메일을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너가 혼자 겪은 일은 그야말로 지나간 폭풍이겠지, 생각했다. 삼개월에 한번씩 체크를 받아야 하는 일은 계속되겠지만, 우리는 아직 죽음 앞에 서로를 잃을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에게 서울은 설날 하루 전이라며 설날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을 썼다. 너가 서울에 살았을 때 평소에도 명절에나 만들 음식들을 별일 아니라는 듯이 차려내곤 하던 기억이 나서였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명절날에나 먹을 손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들어 같은 식탁에 앉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너가 어디에 있든 따뜻한 떡국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고, 새해에는 우리 건강하자, 써서 보낸 내 이메일에 너는 다시 병원에 있다,는 답을 보내왔다.
다시 병원에 있구나.
지난번에 의사가 분명 몸속의 종양들이 없다고 했는데 그후에 복통이 와서 병원에 다시 왔다. 의사들은 항암치료의 후유증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췌장에 염증이 생겼다고 한다. 병원에 다시 온 지 열흘이 지났고 지금은 아침이다. 간호사가 와서 혈압 체온 등을 재고 피를 뽑고 곧 의사들이 아침 방문을 하겠지. 내가 있는 병동은 대학병원에서 조금 외진 곳인데 조용해서 좋긴 하다. 언제 퇴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병원에 입원하고 이런저런 검사를 다시 받았다. 암이 재발한 걸 의사들이 지난번 검진에서 못 보았나, 하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어. 그리고 종양이 아니라 점막이 헐고 염증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종양이 아닌 것에 안심하는 나를 보면서 아직 여기에 머무는 것이 좋은 모양이구나, 싶었단다. 네 메일을 읽고서야 설인 걸 알았어. 네 메일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네가 만든 설음식이 참 맛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설음식은 뭘까? 하는 생각을 하루 종일 했구나. 병원에서 나가면 또 쓸게.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지만 널 보는 언젠가,라는 시간이 이유가 되어 오늘 잘 지낼 수 있겠지. 오늘도 기분 좋게 하루라는 강을 건너자.
나는 그때 너에게 갈 수 있는 기회를 또 한번 놓쳤다. 너가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지만’이라고 쓴 것은 보고 싶다는 다른 말이었을 텐데. 상황이 더 나빠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후에야 행간을 읽는 내 어리석음. 너가 병원에서 다시 나왔을 때는 3월이었다. 병원에서 나오니 봄,이라고 했다. 이 메일 받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의사들은 나에게 삼개월 더 살 수 있다 한다. 암이 복막에 다 퍼졌다고. 더이상 메일을 쓸 수도 없기 전에 쓴다며 너와 만나서 행복했고 잊지 않을 거고 더 오랜 시간 같이 못해주어 미안하다고.
나는 기억한다. 너가 서울에 왔던 때 어느날의 늦은 밤을. 자정 근처에 너가 전화를 해서 우리는 옛날 우리들의 각자의 방이 있던 거리에서 만나 밤길을 걸었다. 이곳에서 아직 물소리가 난다, 너는 발밑의 하수도관을 가리켰다. 그곳에 살 적에도 너가 하던 말이었다. 대단하지 않아? 이 대도시의 지하에 저런 하수관들이 연결되어 끊임없이 뭔가 흐른다는 것이. 너는 울적한 얼굴로 남편과 마을의 묘지를 산책 나가는 날들에 대해서 말했다. 이제 남편은 발굴지로 갈 수가 없어, 파킨슨병을 앓고 있거든, 했다. 남편은 지층 단면도를 정말 잘 그려 작품 같아라며 웃었다. 우리가 발굴해서 박물관으로 보낸 도자기들 생각이 나네, 너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기도 했다. 발굴일지를 쓰는 날이 다시 올까? 너가 슬퍼 보여서 나는 올 거야, 병은 나으면 되는 거지, 했더니 너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네가 파킨슨병을 만만히 보는구나… 하면서. 시리아로 발굴을 가서 지낼 때는 거기 분쟁 때문에 위험할 때도 있었어, 그런데 신기하지, 남편은 그곳을 그리워해, 건강 때문에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되어서 더 그런 것 같아. 너는 남편이 먼 나라로 발굴을 떠나는 대신 병원에 다니는 날이 많아져서 바람이라도 쐬어주기 위해 마을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도자기 대신 많은 오솔길들을 발굴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다람쥐들이 도망도 안 가고 빤히 쳐다보는 잡목이 우거진 한 오솔길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는데 가장 많이 걷는 길은 그리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비석만 남아 있는 묘지들 사이를 걷다가 어느날부터인가 너의 남편이 비석에 새겨진 연도를 읽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 사람 1890년에 태어나서 1960년에 죽었군, 이 사람은 1857년 그리고 1899년… 묘지 사이를 걷다가 남편이 비문을 처음 읽던 날 너는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는 서울로 정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저 사람 나 없이 못 살겠구나, 이제 나의 집은 이곳이구나, 실감이 났어. 나는 손을 뻗어 너의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