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베너딕트 앤더슨이 놓친 것과 얻은 것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

 

 

라디카 데싸이

Radhika Desai 캐나다 마니토바대학 정치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 Slouching Towards Ayodhya, Intellectuals and Socialism 등이 있으며 Economic and Political Weekly, New Left Review 등에 정당, 문화, 정치경제, 민족주의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기고하고 편서를 기획했다. 현재 미국 전략의 기원과 종말, 인도 자본가계급의 탄생에 관한 주제 등을 연구중이다.

 

  • 이 글은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2009.3.16)의 기고문으로, 원제는 “The Inadvertence of Benedict Anderson: Engaging Imagined Communities”이다. 지면 사정과 독자의 편의를 위해 필자의 확인을 거쳐 약간의 분량을 축약했다. 원문은 창비 영문판 홈페이지(www.changbi.com/english)에서 확인할 수 있다. ⓒ Radhika Desai/한국어판 ⓒ (주)창비 2009

 

 

소개가 필요 없는 유명인사처럼 베너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상상의 공동체』는 서평이 필요 없는 책이다.1 그 분야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고 또 누구나 거론하는 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평이 되는 셈이니까 말이다. 사실 민족주의에 관한 문헌에서‘상상의 공동체’만큼 자주, 또 널리 거론되어온 용어도 없을 것이다.‘상상의 공동체’가 이 용어의 창시자와 늘 같이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점 자체가, 이 용어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채택되는 현실을 입증한다. 하지만 『상상의 공동체』에 오랫동안 어떤 불편함을 느껴온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느껴온 불편함은 이미 많은 이들이 비판해온 개별 논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2 『상상의 공동체』가 적시한 목표들과 그 개념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 사이의 뭔가 맞지 않고 어긋나는 부분과 관련된 것이다. 이 불편함은 최근 더욱 심해졌는데, 마침 나는 지난 몇세기간 이루어진 민족주의의 진화를 좀더 넓은 역사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며 그러한 진화를 고찰하는 시도들에 대한 지적·역사적 조망 안에서, 『상상의 공동체』가 민족과 민족주의 발전에 어떻게 개입하고 또 어떤 공헌을 했는지를 자리매김하려던 참이었다. 여러 나라에 번역되고 두차례 개정된 이 책의 인상적인 역사가 상술된 후기가 실린 새 개정판 『상상의 공동체』를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후 25년이나 흐른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그간 내가 느꼈던 그 모호한 불편함이 어떤 것이었는지 좀더 선명하게 정리되었다.

이런 나름의 평가가 가능해지는 이면에는 『상상의 공동체』가 목표했던 연구과제들, 가령 nationality(민족 내지 민족적 소속, 국적), nation-ness(민족 또는 국민집단으로 성립되는 상태), nationalism(민족주의, 국민주의) 등의 개념(4면)이 이 책의 출판 후 겪어온 운명의 급격한 변화, 앤더슨 자신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에 의해‘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일도 포함되는 변화들에 기댄 바가 크다. 1983년에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나 1991년에 1차개정판이 나왔을 때 앤더슨은 “그토록 오랫동안 예언된‘민족주의시대의 종언’은 여전히 요원하며 실제로 민족됨(nation-ness)은 우리시대 정치생활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으로 정통성을 인정받는 가치”(3면)임을 주장했다. 그후 세계사적으로 복잡한 변화의 국면이 발생했으니, 쏘비에뜨연방이 여러개의 공화국으로 쪼개진 것과 지구화가 유행어가 된 것이다. (쏘비에뜨연방의 해체와 지구화 과정은 사실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이었다. 지구화에 내포된 가장 분명한 의미 중 하나가 바로 자본주의체제가 공산권으로까지 확장되리라는 것, 러시아혁명으로 달성하지 못했던 자본주의체제의 전지구적인 확산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현실을 어느정도 예견했던 사람들조차3 이 과정이 사실상 쏘비에뜨연방이 무너지기 십수년 전, 미국이 중국과 외교를 재개했던 시점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었던 듯하다.) 서로 긴밀히 맞물려 돌아간 이 두 변화는 민족 및 민족주의에 대해 대립되는 함의를 갖는 것으로 보였다. 공산주의체제가 몰락하면서 민족주의 정서가 팽배해지고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국가들로 유엔은 외형상 더 커진 듯했지만, 주지하다시피 국가조직과 국가간 경계를 지우는 상업화와 상품화를 내세운 지구화는 민족국가(국민국가)와 민족주의를 침식하면서 민족국가를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앤더슨은 적어도 1991년까지 민족과 민족주의의 중차대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무렵 앤더슨은 입장을 바꾸었는데, 문제는 그 입장변화란 것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그간 자신이 몰두해온 분석과 연구에 기댄 것이 아니라 (외국이주, 사회주의 몰락, 기술혁신, 수송 및 통신수단의 발전, 초국가적 투자 등의4 ‘지구화’로 인해 민족국가와 민족주의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일반의 통속적인 이해를 따른 결과라는 점이다. 지구화를 둘러싼 논쟁들, 지구화가 과연 민족국가를 무력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논의가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는데도5 앤더슨은 지구화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쏘비에뜨연방의 해체는 “경제적으로 허약한 군소 국민국가들만 낳았을 뿐이다. 어떤 국가는 신생국의 형태를 띠었고 또 어떤 국가는 1918년 구소련이 탄생하기 이전의 국가체제를 이어받았는데 어느 경우든 이런 소규모의 국민국가들이 탄생한 것은 여러 측면에서 25년 정도 뒤늦은 일이었다.” 이들 국민국가의 탄생이 “200년 동안 민족과 국가를 묶어온 단단한 하이픈(영어의 nation-state를 구성하는 하이픈-옮긴이)의 연결고리에 임박한 위기”를 뜻하는 “지구화의 흐름을 바꿀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국가의 지위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열망과, 국민들의 충성과 복종을 원하는 국가의 요구 사이의 연결이 더이상 과거처럼 확실하지 않게 되고 전지구적으로 이동이 자연스러운 생활의 한 장으로 자리잡으면서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휴대용 민족성”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Introduction,” 8면). 더 오래되고 더 확립된 국가들 또한 그들 나름의 문제를 지녔을 법하다. 특히나 기술혁신이 가속화되고 군비가 증가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말이다.

 

군사적으로 자국 시민을 보호할 수 없는 국가들, 자국민의 취업과 더 나은 삶을 보장할 여력도 없는 국가들이 여성의 몸과 학교의 교과과정에 대한 정책을 세우느라 골몰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권에 따르는 엄청난 요구를 감당하기에 충분한가?(같은 글 9면)

 

앤더슨의 새로운 입장은 쏘비에뜨 민족주의에 대해 복합적인 역사적 판단을 내린 홉스봄(E. Hobsbawm)의 태도와 겉보기

  1.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 Verso 2006, 2차개정판(초판 1983, 1차개정판 1991). 국역본 『상상의 공동체』, 윤형숙 옮김, 나남출판 2002. 원제를 직역하면‘상상된 공동체’인데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이 개념에 대한 과잉해석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겠다. 본문의 인용문은 이 글의 옮긴이가 번역했고 인용 면수는 원서 2차개정판의 것이다-옮긴이.
  2.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주된 비평을 간략하게 요약한 책으로 Umut Özkirmli, Theories of Nationalism (London: Palgrave 2000) 참조.
  3. Justin Rosenberg, “Globalization Theory: A Post-Mortem,” International Politics 42 (2005), 2~74면.
  4. Benedict Anderson, “Introduction,” Gopal Balakrishnan (ed.) Mapping the Nation, London: Verso 1996, 8면.
  5. Paul Hirst and Graeme Thompon, Globalization in Question: The International Economy and the Possibilities of Governance, Cambridge: Polity, 2nd ed. 1999; Robert Wade, “Globalization and its Limits: Reports of the Death of the National Economy are Freatly Exaggerated,” Suzanne Berger and Ronald Dore (ed.) National Diversity and Global Capitalism,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6; Radhika Desai, When Was Globalization? Origin and End of a US Strategy, London: Pluto 2009 (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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