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애란 金愛爛

1980년 인천 출생.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달려라 아비』가 있음. brokenname@empal.com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내게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서울의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열차 안의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 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에서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자동문 위, 노선표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불이 켜지는 노선표였다. 낯선 지명의 점들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 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말로 된 성좌의 이름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서울의 손금. 서울에 온 지 7년이 다 돼가는데, 그중에는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지하에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안내방송을 들을 때마다 나는 구파발에도, 수색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서울이 너무 넓은 탓이 아니라, 내 삶의 영역이 너무 좁았던 탓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별자리에 깃든 이야기처럼, 그 이름처럼, 내 좁은 동선 안에도― 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열차는 긴 꼬리를 그으며 수도를 헤엄쳐갔다. 도시의 불빛들. 그 안에는 분명 입시학원들도 있을 터이다. 서울엔 크고 작은 학원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얘들아, 우리별은 자전할 때마다 크기가 조금씩 작아지며― 하얀 분필가루들을 우주 곳곳으로 흩날리고 있지 않을까. 강사생활 10년에 지문이 닳은 한 선생이 조금 전 정차한 역 어디에선가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밤. 열차문이 열리자, 깊고 찬 가을바람이 덜컥 들어왔다. 보강에 지친 강사들이 입 안에 털어넣는 목캔디 향처럼, 맵고 알싸한 바람이었다.2005년 가을, 이제 스물여섯. 강사경력 3년차 이력서를 들고, 나는 며칠 전 학교 도서관에서 마주친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

나는 도서관 컴퓨터로 채용결과를 알아보고 나오던 참이었다.

“내 얼굴이 왜?”

수줍은 듯 한쪽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내게, 친구는 눈을 뚱그렇게 뜨고 말했다.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어.”

 

열차 안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의정부 ‘북부행’이라는 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나는 우리 모두가 아주 멀고, 추운 나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창문에 얼비치는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좀 까칠하고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문득 내가 모르는 얼굴이 나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원면접을 마치고 집에 가는 중이었다. 학원이라면, 이미 학부 2학년 때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나갔던 터라, 나름대로 이력도 있고 자신도 있었다. 한때는 아예 전문적인 학원강사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훗날 고향친구들이 ‘지금 뭐하냐’고 물었을 때 ‘학원 나간다’고 하면 왠지 부끄러울 것 같았다. 동네마다 보습학원이 너무 많이 생겨난 탓에, 대학만 졸업하면 웬만해서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학원강사였다. 일반 직장인보다 고소득을 올리는 유능한 강사도 많지만, 한편으론 ‘먹물들의 막장’이라고 은근히 폄하되곤 하는 것도 학원이었다. 학원의 규모나 대우도 천차만별이어서, 나는 학원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따금, 좁고 어두운 학원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면, 내가 쓰는 화장실이 나를 말해주는 것만 같아 울적해지곤 했다.

 

내가 강사직을 그만둔 것은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땐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놀게 될지 몰랐다. 내 학과성적은 항상 4.0이 넘었고, 토익점수도 900점 이상이었다. 나는 성격도 원만했고, 나름대로 창의적인 인간이라 생각해왔다. 그래서 처음 서류심사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원래 몇번씩은 다들 떨어진다잖아?’ 하고 생각했다. 두번째로 심사에서 떨어졌을 때, ‘혹시 자격증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운전면허를 땄다. 또 한번 서류심사에서 떨어지자, ‘혹시 내 인상이 안 좋나?’ 해서 사진을 다시 찍었다. 열번 넘게 떨어지자, ‘혹시 내 전공이 국문학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영문과에 다니는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영문과도 마찬가지야. 요새 영어는 아무나 하거든.” 철학과에 다니는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네가 나보단 낫지 않니?” 그 말을 똑같이, 법학과에 다니는 친구에게 하자 그는 꽁초를 힘껏 빨며 웅얼거렸다.“그것도 옛날 얘기지. 요샌 고시도 잘사는 집 애들이 잘 붙어. 고시는 장거리경주라 누가 뒤를 받쳐줘야 하거든.” 시험에서 한 스무번쯤 떨어졌을 때, 나는 ‘내가 너무 눈이 높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작지만 건실한 회사에 원서를 부지런히 넣었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서른번째 낙방을 했을 때, 두 손으로 머리통을 감싸안고 중얼거렸다.

“혹시 나는 정말 괴물이 아닐까?”

 

입사시험을 준비하며 나는 여러 노력을 했다. 한번은 인터넷을 뒤져 한 대기업의 인사과장이 ‘서류는 일단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한다’며 올려놓은 모범답안을 정독했다. 그런데 모범답안을 보니 그 사람은 자기소개서를 잘 쓴 게 아니라, 인생 자체가 잘 씌어 있었다. 만일 IT 회사에 서류를 낸다면― 나는 아마 포털싸이트에 대한 관심으로 자기소개서를 채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사다준 애플 컴퓨터를 분해하며 노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라고 쓸 것이다. 그는 취미도 ‘승마’였다. 나는 ‘독서’라고 쓰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 보편적이면서도 무난한 ‘영화감상’이라고 썼다. 한 선배는 내 이력서를 보더니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야 원, 콘텐츠가 없어, 콘텐츠가……”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선배, 콘텐츠는 어떻게 만들어요?”

학교 도서관에서 1년째 공기업 입사시험을 준비하던 선배는 커피를 사주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며 물었다.

“저기, 여자는 면접 때 인성을 본다던데.”

선배는 무릎 나온 ‘추리닝’ 바지의 보풀을 뜯어내며 말했다.

“인마, 여자는 얼굴이 인성이지.”

나는 공손하게 커피를 내밀었다.

“선배 콘텐츠는……?”

선배는 커피를 단숨에 마시더니 “만들긴 뭐로 만들어, 돈으로 만들지”라고 말한 뒤 삼선 슬리퍼를 끌고 유유히 사라졌다.

 

열차가, 대방을 지나 한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오늘 돌아본 학원 중 과연 몇곳에서 연락이 올지 계산해봤다. 물론 그중에는 연락이 와도,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곳도 있었다. 맨 먼저 간 학원에서는 원장이 초면에 반말을 했다. 그러더니 ‘나 안 만만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소파 팔걸이에 느슨하게 팔을 걸치고 면접을 봤다. 두번째 학원에서는 원장이 내게 ‘강의’란 무엇인가를 한 시간 넘게 강의했다. 나는 말이 많은 원장들은 그만큼 학원에 대해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참의 장광설 끝에 그가 부른 강사료는 그날 들른 학원들 중 최저였다.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학원에선 ‘애들은 때려야 한다’며 원장이 청테이프가 감긴 각목을 내 앞에서 휘둘러 보였다. 나는 얕은 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다음역은 노량진, 노량진역입니다”

 

1999년 봄. 그때도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멨던 빨간색 프로스펙스 가방을 바싹 끌어안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방 안에는 누가 절대 훔쳐갈 리 없는 학습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3월이니 뭔가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봄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뭔가 먼저 알아버리기에도 너무 이른 나이였던 때. 나는 장기판 위에 놓인 한 마리 말〔馬〕처럼 대책없고 수줍었다. 열차 안으로는 도심의 빛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차창 밖으론 한강대교와 올림픽대로, 크고 작은 빌딩들이 지나갔다. 스무살의 나는 ‘이야, 다리는 정말 다리가 많네?’ 하고 신기해했다. 오후 2시. 머리 위로 고요하고 오래된 태양계의 질서가 습관처럼 자전(自轉)하고 있던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바싹 조여들었던 나의 동공은 점점 크게 벌어져 하나의 상(像) 앞에서 멈췄다. 한강 너머― 호젓하게 솟은 빌딩 한채가 보였다. 온몸으로 푸른 하늘을 인 채, 수백 장의 금빛 비늘을 얌전하게 펄럭이고 있던 그것.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63빌딩이다.”

내 마음의 데시벨은 너무 낮아 누구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63빌딩이다―라고. 나는 63빌딩을 보자 이상하게도 서울에 온 것이 실감났고,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63빌딩과 관련된 웃지 못할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재수학원에 다닐 때의 일이다. 개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와 같은 단과수업을 듣던 아이가 강의실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그애는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나 지금 63빌딩이랑 좆나 똑같은 거 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따라와.”

아이들은 모두 우르르 학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두리번거리며 ‘어디? 어디?’ 하고 묻자, 그애는 한강 너머의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아이들은 다같이 그애의 손끝을 아득하게 바라봤다. 옥상 위에서 담배를 피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