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벽사 이우성의 삶과 학문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저서 『실사구시의 한국학』 『이조시대 서사시』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편서 『이조한문단편집』(이우성과 공편) 『신편 백호전집』 등이 있음. lim1767@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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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이라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학자·지식인으로서 한평생 살아오면서 명성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를 아는 이들은 대체로 경외의 마음을 품고 있다.
이우성 선생은 창비와 인연이 깊은 편이다. 『창작과비평』에 일찍이 사론적 성격의 글들이 실리고 좌담에도 몇차례 참여해서 지적 감명을 불러일으킨 바 있으며, 『이우성 저작집』 전8권이 간행된 곳도 창비다. 그 존재가 일반 독서대중에게는 창비를 통해서 많이 알려졌던 것 같다.
그는 『창작과비평』 30주년을 기념하는 휘호로 ‘법고창신(法古刱新)’이라는 네 글자를 써주셨다. 이를 도예품으로 제작하여 당시 축하연에 온 사람들에게 기증해서,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기억하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법고창신’은 본디 연암 박지원이 박제가의 문집에 붙인 말로, 옛을 본받되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의미다. 새로운 창조는 옛에 근본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뒷날 창비는 기본방향을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로 표방한바 이는 ‘법고창신’과 통한다고 보겠다.
선생은 금년 5월 12일에 92세로 영면하셨다. 지금 세상을 떠나신 선생의 삶의 발자취 및 인간자세를 짚어보면서 그가 어떤 학문을 추구했던가를 대략 정리해보려고 한다.1 후세에 이우성이라는 학자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데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곁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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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관뚜껑을 덮어야 안다.” 속담이지만 나는 여러모로 음미해볼 말로 생각하고 있다. 인간이란 그 생애가 마감된 뒤에라야 판정이 나게 된다는 뜻이겠는데 그것은 공정한 평가를 전제하고 있다. 예전에는 장례시 관 위를 덮는 명정(銘旌)에 무엇이라고 쓰느냐, 그리고 후일 묘비에 무슨 말을 새기느냐에 의해서 평가가 정해졌다. 이때 정해지는 평가는 공론을 듣고 정론을 도출하는 절차가 따랐던 것이다. 예전이라고 요즘 비아냥거리는 말로 오르내리는 ‘주례사 비평’처럼 과장된 평가도 없지 않았을 터이니, 유명한 시인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묘비에 부풀려진 문구가 새겨지는 작태를 두고 “빗돌이 입이 없어 다행이지 입이 있다면 왜 말이 없겠느냐”는 풍자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그 시절엔 공론으로 정평을 도출하는 사회기반이 있었다. 그것이 관행으로 지켜졌기에 장례문화는 그런대로 격조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근대사회로 넘어와서 우리가 지금 늘 경험하듯 전통적인 공론장은 해체되었고 물질주의가 만연하여 제대로 된 평가는 원천적으로 기대하기조차 어렵게 된 상황이다.
벽사 선생의 경우 우리가 알다시피 일생을 단 한순간도 다른 길로 나간 일이 없이, 학자로서 올곧게 살아오셨다. 선생의 위상은 오로지 그 자신의 학자적 자세와 학문적 성취로 이루어질 것임이 물론이다. 나는 선생을 논평하기에는 제자 된 입장에서 외람스럽고 그럴 역량을 갖추지도 못했다. 다만 선생이 평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쓰신 글을 읽은 처지에서 소회를 이야기해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벽사 선생과 제도상에서 사제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내가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성균관대의 교수연구실로 불쑥 찾아간 것이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우리 문학사에서 한문학을 연구해보기로 딴에 결심을 했는데, 그 시절에 한문학은 대학의 제도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서 이쪽으로는 아무도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한문학 분야는 황무지처럼 방치된 상태였으므로, 도대체 이런 것도 연구대상이 될 수 있는지, 하자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도무지 막막한 상태였다. 선생님은 길을 묻기 위해 찾아온 풋내기를 대해서 참으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연구실에서 나와 명륜동 길을 함께 걸으면서 시내버스를 탈 때까지 말씀이 끊이지 않았다. 하신 말씀을 지금 복원할 도리는 없지만 그날 해주신 말씀으로 나는 한문학을 전공으로 택하는 데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지금 회상해보면 그날 선생님과의 첫 대면이 학문하는 자로서 임 아무개가 형성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어언 52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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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으로서의 생을 마감하신 선생의 학자적 상(像)은 어떤 한 면모로 그려내기는 불가능하다. 우선 글쓰기 방식을 두고 말해보자면 그는 한문으로 시를 짓고 각체의 산문을 구사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서두에서 거명했던 『이우성 저작집』에서 『벽사관문존(碧史館文存)』 상·하 2책이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여러 저술에서는 진보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근대학문의 높은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와 동세대에서 한문 글쓰기에 능숙한 인물들이 드물긴 하지만 아주 없지 않았다. 그런데 벽사처럼 한문교양에 기반해서 근대학문의 높은 경지에 올라선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학자로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어떻게 이처럼 개성적인 자질이 형성되고 빼어난 역량이 길러질 수 있었을까 궁금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경상남도 밀양의 퇴로(退老)라는 마을에서 일제식민지시기인 1925년에 태어났다. 가계는 ‘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