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기태 金起台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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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교양
종료령이 울리면 학생들은 교실을 빠르게 떠났다. 곽은 출석부와 태블릿PC, 두세권의 책, 황동 클립으로 묶은 학습지를 상아색 에코백에 넣었다. 두꺼운 직물을 단단히 박음질한 가방이었다. 그걸 구매한 런던의 고서점을 잠시 회상하면 교실이 텅 비었다. 몇몇 책상 위에는 수업 중 배부되었던 학습지가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것들을 반듯하게 모아 교실 뒤편 분리수거함에 넣을 때면 가정통신문도 앱으로 배부되는 시대인데 자신의 수업은 너무 많은 종이를 소모하지 않나 고민했다.
복도는 이동하는 학생들로 소란스러웠다. 꼭 다음 수업 교실로 향하는 건 아니었다. 친구를 만나려고, 간식을 사 먹으려고, 혹은 그냥 움직이는 게 즐거워서 움직이는 듯 보였다. 곽은 좁은 계단을 내려가다 체육수업을 마치고 올라오는 한 무리의 십대들 사이에 갇히고는 했다. 땀과 열기와 웃음 속에서 곽은 “실례합니다”라고 말하며 가방을 품에 안았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 나오는 ‘늙은 교수’를 떠올린 날이 있었다. 현실과 괴리된, 정체된, 그래서 화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고 해설되는 이미지. 그 늙은 교수는 적어도 ‘노-트를 끼고’ 강의에 출석하며 밤마다 육첩방에서 시를 쓰는 성실한 제자를 두었다. 나는 늙지도 않았고 교수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늙지도 않았고’ 부분의 판단은 유보했다.
수년 전 수업시간이었다. 시였는지 소설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수능 대비 교재에 수록된 70년대, 혹은 60년대 작품이었다. 억압적인 권력에 훼손된 개인의 자유를 형상화하며 반성과 실천을 독려하는…… 식의 설명을 마쳤을 때 맨 앞줄 학생이 질문했다.
“선생님도 민주화운동 했어요?”
곽은 학생이 박정희정권 때 무엇을 해보았냐고 묻는 건 아니며, 늦춰 잡아 전두환, 그러니까 80년대쯤을 상상했다고 가정했다. 그 시대에 자신이 한 일이 있다면 하나, ‘태어나는 일’이었다. 곽은 자기가 그렇게 늙어 보이는지, 학생이 근현대사 연표 학습을 게을리한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지루한 수업 분위기가 전환되길 기대하며 분유나 기저귀 같은 단어가 포함된 유머로 대답했다. 2종의 주름 개선 화장품을 추가해 피부관리 루틴을 체계화했다. 가끔 혼자 재치있는 대답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했냐고 묻지 그래요?” 같은 말. 미시사를 포함한 세권의 역사서를 읽고 ‘인간이란 자기가 살지 않은 과거는 뭉뚱그리는 관성이 있다’고 메모했다. 세대론은 의심스러운 도구였지만 젊은 사회학자의 저서는 고교생들의 심성 구조를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마흔살이 된 지금, 곽은 ‘동시대’라는 단어에 소유권이 있다면 자신보다는 십대들의 지분이 크다는 걸 납득했다. 교사는 어린 학생들과 생활하며 유치해지기 쉬운 직업이라고들 했다. 퇴행보다는 조로(早老)가 나았다.
생각은 생각이고 시간은 시간이었다. 충분한 연금 수령액에 도달하려면 15년은 더 일해야 했다. 그 연금을 실제로 받으려면 25년이 남아 있었다. 따지자면 곽은 교무실에서는 젊은 축이었다. 대표전화와 가깝고 방문자들에게 등을 보이는 자리. 도서전에서 받은 머그와 저녁 산책을 하다 구입한 스투키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면 힘이 빠졌다. 밀린 보직 업무를 시작하기 전, 의자에 몸을 묻고 수업을 돌아봤다. 연주하던 기타를 부수거나 관객에게 주먹을 날린 적이 있는 록밴드들의 음악을 한두곡 이어폰으로 들었다. 오아시스가 인터뷰에서 “우리는 예전에 끝났어”라며 위악적으로 남긴 말은 재미있었다. 그걸 이렇게 바꿔서 속으로 읊기도 했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그러니까 엿 같은 월급이나 내놔.’
냉소는 독이었지만 적당히 쓰면 자기연민을 경계하는 데에 유용했다. 머그에는 『노인과 바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탕비실에서 향 좋은 커피를 내리며 그 문장이 자신에게 사치라는 걸, 자신은 패배는커녕 파괴되지도 않았다는 걸 분명히 해두었다. 아쉬운 월급이었지만 임금노동자 평균 수입에 비하면 넉넉했다. 법으로 고용을 보장받고 실적의 압박이 없으며 냉난방이 원활한 공간에서 일했다. 자잘한 연수나 업무가 있긴 해도 방학은 방학이었다. 일년에 두달을 쉴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았다. 균형감각, 계급의식, 뭐라고 부르든 견지해야 할 미덕이 있다면 푸념은 자제해야 했다. 게다가 한국은 대다수의 국민이 십년 이상 공교육을 받는 선진국이므로, 명절의 친척집이든 독서모임이든 포털 댓글란이든 모두가 학교와 교사에 대해 나쁜 기억 하나쯤은 있었다. 병원에 가봤다고 의사의 일을, 은행에 가봤다고 은행원의 일을 다 아는 건 아닐 텐데 다들 지나치게 비난한다는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그만큼 지난 시대 교육이 남긴 상흔이 큰 탓일지도 몰랐다. 곽은 사람들에게 물을 따라주고 냅킨을 건넸으며 겸손하면서도 정직하고 싶어서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교사는 감사한 직업이고, 가끔은 아주 감사한 직업이에요. 학생에게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예요.”
그래서 하늘이 맑고 바람이 따뜻하고 학생들이 잠드는 5월의 어느날, 곽은 자신이 수업시간에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쳤다는 민원을 교장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다소 놀랐다. 분노나 환멸보다 잃어버렸던 무엇을 찾은 듯한 반가움이 먼저였다. 곽은 곤란한 표정의 교장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제가 뭘 가르쳤다고 하던가요?”
‘고전읽기’는 올해 처음 개설된 3학년 선택과목이었다.
곽의 또래들만 해도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종일 한 교실 한 자리에서 꼼짝없이 듣는 수업에 익숙했으므로, 곽이 요즘 고등학생들은 수강과목의 절반 이상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면 다들 신기해했다. 선택권을 주는 척만 하고 학교가 행정편의에 맞춰 배정했던 과거와도 달랐다. ‘학생이 주체적으로 진로를 설계해 각자의 적성과 흥미를 계발하도록 수요자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할 것.’ 그런 문장이 밑줄로 강조된 각종 지침과 사업안내가 문서함에 끊임없이 하달되었다. 대입종합전형에서도 자기주도성, 전공적합성 같은 평가요소가 부상한 지 오래였다. 학생이 무슨 과목을 택했는지에서부터 가늠되는 자질이었다. 있는 꿈도 없는 듯 주머니에 쑤셔넣고 문제집을 푸는 게 과거의 입시라면, 없는 꿈도 있는 듯 만들어서 스토리텔링을 하는 게 지금의 입시였다. 곽은 경쟁은 여전히 경쟁이며 선택은 기만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 주체가 자신의 결정에 따라 배우고 성장할 가능성이 마련되긴 했다는, 그런 원론적인 차원에서 새 교육정책을 얼마간 환영했다.
심리학, 여행지리, 영상제작의 이해, 세계문제와 미래사회…… 선택과목 안내서를 보다보면 학생들이 부럽기도 했다. 수능 문제집이 가득한 바구니를 책상 옆에 두고 기계처럼 정답과 오답을 솎아냈던 고교 시절을 돌아봤다. 순수할 정도로 반복적인 문제풀이도 나름의 근육을 남겼고, 드물게는 정서적 안정까지 제공했으므로 그 시절을 완전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졸업할 때까지 관심 분야의 책 한권 편히 읽지 못하는 걸 ‘공부’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동료들이 난색을 표했던 과목인 고전읽기에 곽이 자원한 건, 그 ‘공부’를 학생들과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고전읽기의 ‘고전’은 「관동별곡」처럼 수능에 나올 법한 고전문학을 지시하는 게 아니었다. 동서고금의 명저 모두를 뜻했다. 곽은 ‘지문’이 아니라 ‘책’을 다루고 싶었다. 객관식 문제를 내기 위해 토막 낸 소설이나 논문을 도식화하는 데에 학생들만큼이나 지쳐 있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보편적인 교양과 바람직한 인성을 형성하며, 학문이나 직업활동에 필요한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고, 읽기는 물론 말하기와 글쓰기 등 통합적인 국어 능력의 향상을 꾀한다.’
그런 과목 취지와 성취 기준만이 존재할 뿐 교과서도 개발되지 않은 과목이었다. ‘고전을 통해 자아와 세계를 이해한다’ 식의 추상적 기준에 뼈와 살을 부여해야 하는 건 담당교사의 몫이었다. 부담이 크다는 뜻이었지만 곽은 그 부담을 어떤 가능성으로 받아들였다. 새 학기를 앞둔 겨울방학을 수업준비로 보냈다. 출근은 하지 않았지만 베이글에 바질페스토를 바르는 아침부터 씽잉볼을 문지르고 잠자리에 드는 밤까지 스스로 묻고 답하며 수업의 얼개를 정리했다.
첫째, 인류의 지성사와 예술사에서 고유의 좌표를 차지하는 열권 내외의 도서를 선정한다. 핵심내용과 의의를 각각 3차시 내외의 강의와 학습지로 소개한다. 이러한 추천과 해설은 일종의 정전(正典)주의를 강화할 위험이 있으나 독서 경험이 얕은 학생들에게는 비계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학생들은 지망 전공이나 개인적 호기심에 따라 자유롭게 한권의 도서를 택해 읽는다. 추천도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실제로 책을 읽으며 꾸준히 독서록을 쓰는 시간을 마련한다. 2차 저작을 고를 수도 있고 발췌독을 해도 무방하다. 제한적으로 이해하더라도 온전한 책을 손에 쥐는 경험은 유의미하다.
셋째, 최종적으로 학생들은 읽은 책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담은 한편의 글을 쓴다. 주제 탐색부터 개요 조직, 집필과 공유와 퇴고까지 지원한다. 학습이란 입력뿐 아니라 출력도 포함하며,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오래 널리 읽힌 저작의 권위를 빌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의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전하기 위해 인용한다면 더 훌륭하다.
먼저 추천도서를 선정해야 했다. 곽은 현대문학 석사일 뿐인 자신의 독서 이력이 불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수학교사가 인공지능을, 윤리교사가 심리학을 담당하는 일도 흔해지고 있었다. 새 시대에 학생들이 요구받는 새 자질이 있다면 교사도 부담해야 할 몫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