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제20회 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

 

 

임국영 林國榮

1989년 경기 안산 출생. indra885@naver.com

 

 

볼셰비키가 왔다

 

 

그들이 장례식장에 나타난 것은 새벽 세시 무렵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선뜻 실내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나 역시 그들을 들이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성은 남자 셋 여자 하나였다. 그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는 흠잡을 데 없는 스킨헤드였다. 스킨헤드는 스칸디나비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텁석부리였으며 키가 작은 편이었으나 몸이 단단해 보였다. 또다른 남자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30대를 넘길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나이가 짐작되지 않는 것은 순전히 헤어스타일 때문이었다. 먹칠한 바가지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풍성하고 둥근 머리모양이었던 것이다. 특히 앞머리는 코를 덮을 지경이었다. 마지막 남자는 밝은 오렌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고 왼쪽 귀에 짐승의 이빨 같은, 새끼손가락만한 까만색 피어스를 달고 있었다. 앳된 얼굴로 미루어봤을 때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눈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니라면, 바가지는 바지가, 오렌지는 재킷이 유광 가죽 재질이었고 둘 다 기타 케이스를 메고 있었다. 여자는 평범한 대학생 같은 외모였다. 머리 모양도 옷매무새도 말끔했으나 실은 이 무리에서 가장 수상한 사람이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움직일 때마다 쇳조각끼리 짧고 경쾌하게 부딪는 소리, 그러니까 이를테면, 아니 이를테면이 아니라 그냥 탬버린 소리가, 탬버린이 아니고서는 날 수 없는 소리가 그녀의 가방에서부터 들렸던 것이다. 그들은 조문을 왔다기보다는 무대를 찾아온 듯했다. 기어코 그들은 신발을 벗었다.

어떻게 오셨느냐는 말을 어떻게 꺼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가 아니라 왜냐고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킨헤드가 자신들을 오빠의 지인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먼저 빈소로 들어갔다. 오빠는 불쾌한 일을 겪은 듯한 표정이었다. 양 볼이 불만으로 부풀어 있었고 눈빛은 사나웠다. 고등학생일 때 찍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풋풋함도 버르장머리도 없는 얼굴이었다. 엄마는 지친 기색도 없이 영정사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관 뚜껑을 열고 오빠에게 뺨따귀를 올릴 것 같은 기세였다.

스킨헤드와 그 무리가 짐을 내려두고 영정사진 앞에 섰다. 스킨헤드가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오늘 보았던 그 어떤 조문객보다도 침통해 보였다. 그들이 오빠에게 절을 했다. 오렌지는 옆사람 눈치를 살피며 주춤거렸는데 절을 몇번 해야 하는지 몰라서 세배를 할 뻔한 모양이었다. 절을 마치고 그들은 우리와 마주 섰다. 나와 엄마는 크리스천이었으므로 묵례를 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절을 했다. 절을 한번 하고 난 뒤 오렌지가 다시 몸을 숙이려는 것을 바가지가 막았다.

비어 있는 식탁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바꿔 말하자면 아무 식탁 앞에 그들을 앉혔다. 늦은 시각이었다. 가까운 친척이라곤 외삼촌과 이모, 이모부뿐이었는데 모두 방에서 자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 앞에 음식을 부렸고 그들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육개장을 퍼먹었다. 그들 곁에 머물기도 빈소로 돌아가기도 싫었으므로 출입구 근처로 가 조문객 명부를 적는 탁자 앞에 앉았다.

오빠의 부고는 충격적이었고 아직까지도 충격적이기만 했다. 나는 엄마와 달리 울음이 나지 않았다. 엄마는 슬프다기보다는 울화통이 치밀어서 운 것으로밖엔 안 보였으나 나는 화도 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곤욕이었다. 무슨 기분을 느끼고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아홉살이 되던 해 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얼마 뒤 집을 나갔다. 말하자면 오빠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던 게 대략 8년이고 살지 않은 게 8년이란 얘기다. 이쯤이면 남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오빠가 내게 살갑게 굴었던 기억 따위는 없다. 그렇다고 나와 오빠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딱 잘라 말할 만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이상하리만치 인상이 좋지 않았을 따름이다. 내게 오빠는 방에서 잘 나오지 않는 음울하고 히스테릭한 소년이었고 격하게 표현하자면 밥맛 떨어지는 자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막상 부고를 들었을 때의 솔직한 소감이라고 한다면, 맞다, 그런 사람이 내게 있었지,였다. 그렇다고 이런 속내를 내비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심드렁한 기색을 드러낼 만큼 나는 멍청하거나 용감하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었고 가능하다면 슬퍼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다. 몇번인가 눈물을 머금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애도라기보다는 혼자서 하는 상황극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지경이었다.

통계를 살핀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러한 통계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열일곱은 상복을 입기에 다소 이른 나이라는 생각 때문에 조금 설렌 것도 사실이었다. 뭐라 해야 좋을지는 모르겠는데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삼촌이 말했다. 유가족은 상을 치르는 3일 동안 씻거나 잠들지 않고 빈소를 지키며 문객을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 고생스러운 의식을 치르는 이유는 몸을 피로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몸이 고되면 고인을 떠나보낸 슬픔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좁아진다는 얘기였다. 이상한 말이었다. 마음이 힘들 때 몸까지 괴롭힐 것은 또 뭘까 싶었다. 삼촌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다 하더라도 이 장례식은 완전히 아웃이었다. 찾아오는 사람이 이토록 적어서야 고될 일이고 뭐고 없었다. 멋쩍고 낯 뜨겁게 만들어서 슬픔을 잊으라는 의도라면 또 모를까. 심지어 고인의 지인으로서 찾아온 조문객은 저들이 처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쑥, 저들이 떠나고 나면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복 입은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것이다.

어느 틈엔가 오렌지가 옆에 다가와 있었다. 오렌지는 냉장고를 가리키며 마실 것을 꺼내도 되느냐고 어수룩하게 물었다. 내가 꺼내주겠다고 했으나 오렌지가 고사했다. 오렌지는 어전에서 물러나는 환관처럼 멀어졌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와 소주를 꺼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나는 오렌지의 동료들에게 시선을 옮겼고 오렌지를 지켜보던 그들 역시 나를 쳐다봤다. 천적의 동태를 살피는 미어캣 무리 같은 얼굴들이었다.

밥 먹을 때는 잠자코 있던 그들이 술을 꺼내든 순간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왜 아무도 없냐. 연락 누가 돌렸어? 저는 안 했는데요. 너도? 깜빡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내 잘못이다. 내가 했어야 했는데.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틈틈이 내가 연락을 돌렸어야 했어 이 망할 것들아. 우리도 정신없었잖아요. 혁태오빠 얘기 듣고 계속 연습실 짱 박혀서 울고 연습하고 울고 연습하고. 이거 봐요. 눈이 안 떠질 지경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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