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볼턴의 강대국 정치와 남북관계의 이행기 자율성
이정철 李貞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공저 『현대 북한학 강의』 『북미 대립』 등이 있음.
rheeplan@ssu.ac.kr
하노이회담 이틀째인 2019년 2월 28일 오전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던 시점, 존 볼턴(John Bolton)은 실내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던 자신들과 달리 김여정 부부장은 열대의 습도와 더위를 견디며 꿋꿋이(stoically) 야외에 서 있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쓰고 있다. 판이 깨질지도 모르는 불길한 상황에서 김부부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하에서는 볼턴 회고록(The Room Where It Happened, 2020)에 깨알같이 숨어 있는, 그래서 언론이 주목하지 못한 감춰진 진실들을 중심으로 2018년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협상의 숨은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굳이 볼턴의 김여정 부부장에 대한 평가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현 상황 해석을 7·10 김여정 담화로 마무리하기 위한 설정 정도로 이해하기 바란다.
1. 볼턴의 강대국 정치와 알려지지 않은 깨알 진실
트럼프 행정부 ‘어공’(어쩌다 공무원) 4수생1 볼턴이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적개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2002년 북미회담 당시 미 국부무의 대담한 접근법(bold approach)을 파탄 내고 북핵문제를 플루토늄 문제로부터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로 전환시킨 장본인이다. “8월의 어느 날,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이었던 볼턴이 서울에 들어옵니다 (…) 그는 이태식 외교부 차관보를 만나 모종의 ‘정보’를 전합니다. 한국 정부 내 안보 진용이 바짝 긴장합니다. ‘북한 고농축 우라늄 계획의 심각성’이 담긴 정보를 전했기 때문입니다.”2 그 때문에 2002년 켈리(J. Kelly) 국무부 차관보의 평양 방문은 북한의 핵 시인 논의로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2차 북핵위기로 이어진다.
북한에 대한 그의 악연은 2006년에 재연된다. 북한의 1차 핵실험에 대해 2006년 10월 14일 유엔제재 결의안 ‘1718호’가 채택되자 북한 박길연 유엔 주재 대사는 ‘갱단 같은 행위’라며 제재 거부를 밝히고 퇴장해버린다. 당시 유엔 주재 미국대사로 있던 볼턴은 이에 발끈, 유엔은 북한을 축출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곧 이어진 미국 중간선거에서 대승해서 상원을 차지한 민주당에 의해 볼턴은 12월에 유엔 대사직을 떠나게 되었다. 북한의 저주라고 할까, 볼턴이 북한과의 숙적의식(rivalry)에 빠지게 된 결정적 순간이라고나 할까?
종전선언이 실패한 까닭과 ‘six p.m. text ’
그로부터 12년을 떠돈 볼턴이 2018년 4월 9일 백악관으로 되돌아왔을 때 누구보다도 긴장한 건 북한이었을 것이다. 볼턴 보좌관은 이미 진행 중인 북미정상회담 논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개입으로 시작된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 논란은 예정된 6월 북미회담을 파탄 직전까지 내몰았다. 이때 5월 26일 원포인트 남북정상회담과 이어진 한국정부의 극적인 중재로 북미정상회담의 모멘텀은 되살아났다. 이후 김영철 특사의 방미와 친서로 불씨를 되살린 북한은 드디어 6월 12일 싱가포르정상회담을 갖게 되었다.
당시 김영철 특사의 방미 소식에 당황한 볼턴은 김영철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 자체를 막기 위해 분주히 노력했다. 뉴욕회담만 허용하자는 1차 저지선이 실패하고 백악관회담이 확정되자, 오벌 오피스(oval office) 회담을 반대하는 것을 2차 저지선으로 삼았다. 결단의 책상(resolute desk)이 있는 오벌 오피스에서 김영철 특사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는 것 자체를 북한 권력에 대한 정당화로 생각한 볼턴의 반대는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심지어 1시 15분부터 2시 45분까지 한시간 반이나 이어진 특사 면담에 볼턴과 펜스(M. Pence) 부통령은 배석조차 허락되지 못해, 둘 다 충격을 받았다고 자조하는 장면은 이후 이어질 북한과의 새로운 숙적 관계를 보여주는 전초전이었다.
이렇게 되살아난 세기의 싱가포르회담에서 미국은 장문의 공동선언안과 단문의 형식적 공동선언안(short statement)이라는 두개의 시나리오를 들고 갔다. 북미 실무진이 사실상 합의에 도달한 초안(six p. m. text)을 들고 오자 볼턴은 추가 요구사안을 관철하기 전엔 대통령이 서명해서는 안 된다며 폼페이오(M. Pompeo) 국무장관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추가 요구사안이란 하나는 유엔제재 결의안 1718호를 합의안에 명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인 피랍자 문제 해결을 다루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자신이 유엔 주재 미국 대사였던 2006년 10월 채택한 것으로 CVID라는 문구를 처음으로 포함한 그 유엔 결의안이었다. 싱가포르회담 직전인 2018년 5월 CVID라는 표현 때문에 회담 결렬의 위기까지 갔던 북한이 받을 수 없는 구절을 볼턴이 또다시 강요한 것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일본인 피랍자 문제를 북미공동선언에서 다루라는 볼턴의 생떼 같은 요구였다. 북일회담도 아니고 북미회담에 일본인 문제를 집어넣는다는 발상은 미국의 안보보좌관이 얼마나 일본에 경도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미국 실무팀이 북한에 창피를 당했다는 세간의 평가가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밤샘 협상에서 미국의 수정 요구 때문에 양국은 이미 합의된 초안을 폐기하고 짧은 합의문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우리가 아는 싱가포르공동선언이고, 공동선언 논의의 핵심이었던 종전선언문안은 영문화까지 근접했지만 결국 최종 합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곧이어 7월 7일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후속조치를 논의했지만, 김정은 위원장을 면담하지 못한 채 귀국했고 북미는 추가합의에 실패하게 된다.
백악관 정상회담 무산과 볼턴의 활약
이후 8월 백악관의 결단으로 한미군사연습 연기가 결정되자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낸다. 이른바 ‘러브레터’로 알려진 유명한 편지다. 이 편지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미국으로 초청해 백악관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갖자는 논의를 시작한다. 이에 놀란 볼턴은 백악관회담 불가론을 내걸고 9월 뉴욕회담론을 권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총회 시기 북미정상회담이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걸며 논란을 벌인다. 8월 말 폼페이오 장관의 실무 방북이 결렬되고 이 논의가 공전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9월 10일 친서는 또 한번 백악관 내부 논쟁을 촉발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9월 10일 친서를 받아 재차 북미정상회담 개최론을 펼치자, 볼턴은 ‘선 실무회담, 후 정상회담’론을 들고나와 사력을 다해 정상회담을 막는다. 이번엔 아예 노골적으로 정상회담을 막기 위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