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부풀어 오르는 모녀서사

 

 

전기화 田己和

1990년 서울 출생. 2018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황정은 다시」 등이 있음.

octobervoice@naver.com

 

 

모녀서사의 독법

 

“태후마마 관이 혼전에 계신데 진양이 어찌 높은 집을 생각하겠습니까?”

드디어 좌우로 하여금 낮은 집을 정리하여 상중에 거처하는 움막을 차리고, 거적을 깔고, 흰 띠를 둘렀으니, 궁중과 궁인이 꾸민 것이 한 떼의 흰 구름 같았다. 공주가 상복을 벗지 않고 사시곡읍하니 그 소리가 슬퍼서 사람이 차마 듣지 못할 정도였다. 공주가 반드시 기운이 다 떨어진 후에야 곡하기를 그치고, 한 그릇 미음을 하루에 한 번 마셨다. (…) 공주가 다시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밤낮으로 눈물을 흘렸다. 시부모가 슬프게 생각하여 친히 이르러서 권유하면 공주가 사례하고 음식을 맛보고 말을 하여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시부모가 돌아가면 다시 베개에 몸을 던졌으니 쓸쓸히 돌아가신 모친을 생각하면서 아득히 모친을 따를 것 같았다.(『유씨삼대록』 2, 한길연 외 옮김, 소명출판 2010, 185~86면)

 

조선후기 고전소설 『유씨삼대록』에서 진양공주는 어머니의 죽음을 지극히 슬퍼하며 점차 몸이 쇠약해져간다. 진양공주의 남편과 그의 가족들은 그녀가 마음을 돌이켜 건강을 회복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일 뿐이라며 점차 쇠약해지는 몸을 받아들여 결국 세 아이를 남겨둔 채 25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소설 속 인물들에 의해 대효(大孝)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추앙되는 여성인물, 내리사랑보다 치사랑을 행하며 ‘어머니 됨’보다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하는 어머니의 형상은 지금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다.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여성을 재현하는 소설에서 ‘딸’이거나 ‘누나, 여동생 혹은 언니’거나, 때로는 ‘아내이며 며느리’이거나, 때로는 ‘어머니’이고 ‘할머니’이기도 한 여성인물이 서사 내에서 어떠한 지배적 관계 정체성을 부여받는지는 통시적 변화를 겪어왔다. 이를테면 18세기에 창작된 소설의 진양공주와 같이, 자신의 세 아이를 남겨둔 채로도 죽음을 통해 어머니에게 효를 완성하는 어머니 형상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감내하며 무조건적인 헌신을 보이는 어머니상은 비교적 근래에 한국인들의 심상에 자리 잡은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어머니’에 대한 일정한 통념이 구성되고 자리 잡는 과정에서 그 통념에 어긋나는 다양한 어머니상들은 제자리를 부여받기보다는 인식 너머로 배제되어온 것이 아닌가. 특정한 어머니상이 대표적인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승인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어머니들의 구체적 얼굴과 그 표정을 들여다보려는 노력 역시 너무 방치되어온 것은 아닌가.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 이후 모성이 특별히 강조되며 가정 내 여성들이 어머니로 위치 지어지기 시작했다는 논의1)와 더불어, 한국문학사에서 재현된 엄마의 형상을 계보화하고자 한 시도2)를 참고해볼 수 있다. 후자는 모성신화와 결부되며 탈역사화되어온 어머니상에 대한 역사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글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계보의 마지막에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창비 2008)를 배치하며 이 소설을 일종의 ‘종착지’로 설정하는 동시에, 소설 속 엄마 형상을 순수-증여론자로 읽어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엄마를 순수-증여론자로 읽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어머니상이 계보의 종착지가 될 수는 없다. 최근의 소설들은 ‘무한한 사랑과 초인적 헌신’의 제공자로서의 어머니상을 재정립할 새로운 계보를 형성하며 더 멀리 나아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난 십여년간 엄마를 재현하려는 시도들이 지속되는 가운데, 구체적인 육체를 가지고 현실을 대면해나가는 엄마의 형상들은 점차 다양해졌다. 현재 한국문학장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엄마에 대한 재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3) 특히 주목할 만한 모녀의 이야기들이 제출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여기의 문학장에서 목격되는 여성서사의 폭발 가운데에서도 엄마에 대한 재현에 주목하며 모녀서사를 적절하게 배치해볼 필요성은 다름 아닌 소설들 자체로부터 제기된다. 여자들이 태어나 최초로 관계 맺는 여자, 요컨대 딸과 엄마의 관계는 어떤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오래간 문학사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져온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 문제처럼, 소설 속 어머니와 딸의 관계 또한 세대론적 관점에서 읽혀왔을까?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호명되어온 세대들은 언제나 몰젠더적으로, 남성 중심으로 재현되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더불어 모녀서사 속 어머니와 딸이 각각 한 세대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읽힌 경우는 드물다는 의심이 먼저 덧붙는다.4) 기실 이러한 의심은 크게 이상하지 않다. 청년세대가 보통 남성으로 재현되어왔으며,5) 부정(否定)하면서도 동시에 계승하여 새롭게 구축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기성세대 또한 남성 가장으로 상정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친살해 신화의 베일을 벗겨내며 부자서사 대신 부녀서사에 주목하는 새로운 독법이 제시되는 국면에서,6) 동시대 문학에 나타난 모녀서사의 양상을 거칠게나마 살피는 일 또한 기왕의 한국문학사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던 결절점들에 대한 새로운 계보화의 가능성을 조망할 수 있게 해주리라 생각한다.

기존의 모녀서사에 관한 독법에서 딸과 엄마란, ‘여성’으로서의 공통 경험에 기반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세대별 격차와 무관하거나, 관계가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여성’으로서 함께 연대해야 하고 또 연대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이해되곤 했다. 이를테면 장성규는 200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가족로망스의 변화 양상을 살피는 과정에서 김애란의 소설을 논하며, 소설 속 딸과 엄마가 이루는 ‘모계 가족’에는 가부장적 규범이 부재하며 여성적 연대가 새로운 구성 원리로 작동한다고 해석했다. 한편 강수환은 박완서와 김애란의 소설 속 딸들이 가부장제 안에서 ‘타자성과 부재’를 경험하면서 엄마와 여성으로서의 공통 의식을 공유하고, 이에 근거하여 가부장제라는 공동의 적대를 만들어낸다고 보았다.7)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혹 모녀서사에 관한 그간의 독법은 서사에 이미 드러나 있는 어머니와 딸의 차이, 그들의 미묘한 긴장과 갈등에 충분히 주목하는 대신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유대/연대라는 다소 납작하고 당위적인 해석으로 귀결하지는 않았나. 권력과 자원을 물려받는 자의 위치에 놓인 적이 없으므로 물려줄 수도 없었던 자들—어머니와 딸이 무엇을 주고받으며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더 천착하여, 그 복잡한 관계를 단순화하지 않고 읽어내야 하는 데 이르지 않았나. 이제는 각기 다른 모녀서사로부터 동일한 패턴을 읽어내는 독법을 넘어, 그 차이를 좀더 섬세하게 식별하며 모녀서사를 ‘역사화’해야 할 때가 아닐까. 모녀서사 속 딸과 엄마가 맺는 복잡한 관계를 해석할 언어가 충분히 주어져 있는가와 무관하게 이미 그 문학들은 우리 앞에 도래했으니, 비평이 할 일이란 그것을 가능한 한 직시하는 일일 테다.

 

 

엄마/세대

 

최근 한국소설에서 재현되는 엄마들은 제각각의 국면들을 마주하고 있는 듯 보인다. 육십 줄에 다다른 어떤 엄마는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 이를테면 자신의 딸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고민하며(김혜진 『딸에 대하여』, 민음사 2017), 이국에서 딸의 육아를 도와주던 어떤 엄마는 딸의 필요와 자신의 쓸모의 격차 앞에서 자신이 누구의 ‘곁’도 되지 못하는 현실을 직면하기도 한다(지혜 「곁」, 『자음과모음』 2019년 봄호). 한편 오륙십대 엄마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삼십대 엄마들 또한 자기 생의 각도를 조금씩 틀어가는 듯 보인다. 어떤 엄마는 잊고 있었던 자신의 아름다움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기도 하고(백수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어떤 엄마는 자식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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