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북송사업과 탈냉전기 인권정치

 

 

테싸 모리스―스즈끼 Tessa Morris-Suzuki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 태평양-아시아학 대학원 일본사 교수. 국경지역, 지구화, 그리고 동아시아의 이주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ReinventingJapan: Time, Space, Nation (M. E. Sharpe 1998)을 비롯하여 『邊境から眺める: アイヌが經驗する近代』(みすず書房 2000), 『自由を耐え忍ぶ』(岩波書店 2004), 『過去は死なない:メディア·記憶·歷史』(岩波書店 2004, 영어본 Verso 2005) 등이 있다. tessa.morris-suzuki@anu.edu.au

ⓒ Tessa Morris-Suzuki 2005 / 한국어판 ⓒ (주)창비 2005

 

*본고는 2005년 5월 24일 토오꾜오대학에서 개최된 학술대회 ‘한반도의 공존과 동북아시아 지역협력(朝鮮半島の共存と東北アジア地域協力)’에서 발표된 내용을 본지의 요청으로 수정 보완한 것이다. 원제는 “Repatriation and the Politics of Humanitarianism in the Cold War and Beyond”이다.

 

 

전쟁에서 냉전으로

 

1945년 5월, 오끼나와 전투가 끔찍한 인명 손실을 입히며 맹위를 떨칠 무렵, 트루먼 미 대통령은 OSS(CIA의 전신)로부터 영문을 알 수 없는 메씨지 하나를 받았다. 5월 7일 리스본의 일본 공사(公使) 이노우에 마스따로오(井上益太郞)가 중개자를 통해 포르투갈에 있는 OSS 요원에게 접촉을 해온 것인데, 당시 포르투갈은 중립국으로서 추축국(樞軸國)들과 긴밀한 연계가 있었고 그 때문에 2차대전중에 관례에서 벗어난 첩보활동이 종종 행해지던 곳이었다.1

OSS를 거쳐 최종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된 이노우에의 메씨지는 다음과 같았다.“일본은 본국 영토를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전쟁을 그만둘 준비가 되어 있다. 이노우에는 소련에 대항하는 미국과 일본의 ‘공동의 이해’를 강조했다. 하지만 무조건 항복은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2

머지않아 다시 이노우에는 일본의 항복 가능성에 관해 미 당국자를 만나 논의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OSS에 따르면 “이노우에가 이번에는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강화조약의 실제 조건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다고 밝혔다”고 한다.3

이런 막후외교는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패하기 전 몇달간 일본 외무성 관리들이 숱하게 시도한 것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1945년 상반기에는 바띠깐, 스위스, 스웨덴, 그리고 소련을 통해서도 미국과 접촉했다. 대다수 역사가들에게 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강화(講和)타진 시도들이 20세기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슈, 즉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원폭 투하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정당했다는 주장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4

하지만 리스본의 사례는, 못지않게 중요하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20세기 역사의 단편인, 1959년 이래 일본에서 북송(北送)된 재일조선인들의 ‘귀국사업’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공한다. 리스본 공사 이노우에가 1950년대 이 송환사업의 중심인물로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에 내민 ‘강화타진 시도’들은 주로 일본 외무상 시게미쯔 마모루(重光葵)와 그의 젊은 측근 오까자끼 카쯔오(岡崎勝男, 태평양전쟁 말기 외무성 조사국장)가 관련된 외무성 내의 한 집단에서 주도한 것이다.5 이노우에는 학창시절 토오꾜오대학의 선배 오까자끼를 통해 이 집단과 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시게미쯔와 오까자끼는 일본에 대한 주된 위협이 소련이라는 인식을 공유했고 협상을 통해 미국에 항복하는 것이 소련에 종속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노우에는 벨기에·미국·폴란드·유고슬라비아·포르투갈에서 외무관으로 일했지만 전쟁 전 그의 주요 업무는 동아시아 공산주의에 관한 연구였다. 1930년대 초에는 외무성 아시아국 2과에 근무했는데, 그곳에서 그의 주된 임무는 ‘중국공산당에 관한 조사’6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노우에의 재직기간에 이 부서에서 펴낸 보고서의 조사대상은 만주의 조선인 좌익게릴라 그룹들인데, 그중에는 나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지형에서 갑산파(甲山派)의 핵심을 이루는 인물들도 들어 있다.7 흥미로운 점은, 이 게릴라운동의 신진세력 가운데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의 청년이 있었고 그는 이내 김일성(金日成)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8

1945년 8월 일본이 마침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이노우에는 토오꾜오로 돌아가서 전전(戰前)의 경험을 십분 활용하여 외무성의 아시아 공산주의 권위자로 자리를 잡았다. 1955년에는 외무성에서 은퇴하여 일본적십자사에 국제부 책임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적십자사에서 그가 담당한 업무는 일본 정보기관과 깊이 연루된 외무성 관리로서의 오랜 경험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그의 경력을 고려해보건대 이노우에가 태평양전쟁 외교무대에 잠시 등장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전전 일본의 식민주의적 확장과 전후 냉전시대 일본정치를 이어주는 고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이 고리는 다시 집단북송을 주도한 세력들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이즈음에 자민당 정치인이 된) 오까자끼는 송환을 뒷받침할

  1. 열의가 지나쳤던 OSS 장교들이 리스본의 일본대사관에 침입하여 암호첩을 훔쳐낸 유명한 사건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이 외교관련 암호의 보안을 한층 강화하는 바람에 장교들의 상관들만 더욱 곤란해졌다. Bradley F. Smith, The Shadow Warriors: OSS and the Origins of the CIA, New York: Basic Books 1983.
  2. 1993년 9월 22일 CIA의 역사 재검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공개가 승인된 자료집, Memoranda for the President: Japanese Feelers의 1945년 5월 31일자 “Memorandum for the President”에서 인용. www.cia.gov/csi/kent_csi/docs/v09i3a06p 참조.
  3. 같은 글.
  4. 가령 Gar Alperovitz, Atomic Diplomacy:Hiroshima and PotsdamThe Use of the Atomic Bomb and the American Confrontation with Soviet Power, London and East Haven: Pluto Press 1994. 이 책의 초판은 1975년에 출간되었다.
  5. 강화타진 시도와 관련된 시게미쯔의 역할에 관해서는 重光葵 『昭和の活動』 1952 참조. 재판(再版)본은 『重光葵著作集 1』, 東京: 原書房 1978.
  6. 「日赤外務部長になった井上益太郞」, 『朝日新聞』 1955년 7월 2일자.
  7. 「最近支那及滿州關係諸問題摘要」, 1933년 12월, Japan,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rchives 1868~1945, SP series, reel 64 (오스트레일리아국립도서관 mfm G5929).
  8.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New York: the New Press 2004, 109~1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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