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북한동포돕기운동의 현장에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함께한 10년
강영식 康英植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국장. kangys8770@hanmail.net
사실 이런저런 일로 북한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 북한에 대한 솔직한 생각과 경험, 미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필자가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이 1999년 1월이니까 햇수로 벌써 10년이 되어가고 방북 횟수도 정확히 기억하기 어려워 대강 1백번을 넘나든다고 말하고 다닐 만큼 어느덧 북한은 나에게 또 하나의 생활터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10년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면서 대북지원활동을 해오면서도 남에서나 북에서나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활동하기가 쉽지 않고 행동거지 하나하나도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남북간의 관계가 아직도 돌발적이고 비본질적인 일들로 가다 서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관계이기 때문일 테고, 우리 사회의 대북인식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부정적이고 차가운 인식들이 널리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자신들에 대한 부분적인 고언이나 애정어린 쓴소리조차 선뜻 수용하기 어려워하는 북한의 경직성도 우리를 한층 더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처럼 인도적 차원에서 시작된 대북지원운동이 10년을 경과하면서, 과연 우리 사회의 북한동포돕기운동이 그동안 무엇을 변화시켰는가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 때이다. 특히 이명박정부의 등장과 함께 남북관계와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변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시민사회의 대북지원운동과 평화운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기도 하다.
북한동포돕기운동의 시작
국제사회와 남한사회의 대북지원은 1990년대 초반부터 간헐적으로 진행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95년말 북한당국의 큰물피해 지원요청에 호응하면서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94년 김일성 주석 조문파동으로 빚어진 남북간 대치상태가 조금도 풀리지 않아 당시의 김영삼정부는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조차 규제했고, 따라서 남한 시민사회의 대북지원은 주로 종교계 일부에서 해외동포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진행되는 극히 미미한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1996년 봄부터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과 처참한 실상이 사진과 영상을 통해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는 북한동포들이 겪는 고통을 더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고 그간 북한의 어려움을 모른 체하고 방치했다는 양심적인 가책과 고민 들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범국민적인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위해 96년 6월‘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출범하게 된다. 당시에는 아무리 인도적 차원이라 해도 북한동포돕기운동 자체를 불온시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 누구도 쉽게 대북지원의 필요성을 주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특정단체 중심이 아닌 기독교·불교·가톨릭교·원불교·천도교·유교 등 6대 종단과 각 분야의 시민사회단체가 범국민연대운동으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출범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대국민 캠페인에 들어가기도 전인 그해 9월 강릉 잠수함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발함으로써, 힘들게 추진된 북한동포돕기운동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무기한의 휴지기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근 반년간의 휴지기를 극복하고 북한동포돕기운동이 재개된 계기는 1997년 3월 10일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서영훈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등의 원로들이 공동으로 63빌딩에서 개최한‘북한의 식량위기를 염려하는 사회 각계인사 옥수수죽 만찬’이었다. 극도로 악화된 남북관계를 여하튼 평화적 분위기로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의 뒷받침 속에 당시 옥수수죽 만찬은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한겨레신문과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추진한‘북한동포돕기 옥수수 10만톤 보내기 범국민캠페인’이 급속도로 확대됨으로써 북한동포돕기운동은 되돌릴 수 없는 남한사회의 중요한 민족운동·시민운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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