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이일영 『뉴노멀 시대의 한반도경제』, 창비 2019

분단 문제를 돌파하는 실현 가능한 경제학

 

 

류동민 柳東民

충남대 교수, 경제학 rieudm@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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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사회과학으로서의 야성을 잃고 체제관리기술로 길들여진 지는 오래되었다. 분과학문으로서의 눈부신 발전이 전문가들로 하여금 거대담론을 논의하기 어렵게 만든 데에도 까닭은 있다. 요컨대 학문 내적 수준의 심화가 경제학 본연의 문제제기를 찾아보기 힘들도록 만드는 역설인 셈이다. 앙상한 몰골만 남은 거대담론은 이따금 정치가들의 구호로서만 일회용품처럼 소비된다. 그러므로 이일영의 『뉴노멀 시대의 한반도경제』는 매우 소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보기 드문 경제학 저작이다. 민족경제론(박현채)과 분단체제론(백낙청)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성장전략과 체제혁신, 지역발전전략에 이르기까지 구체적 수준의 정책제안까지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경제론은 그 뿌리 중의 하나를 1960년대 통일운동에 두고 있는바, ‘이남 전기, 이북 쌀’이라는 당시의 구호에서 보듯이 분단으로 말미암아 괴리된 민족경제와 국민경제를 일치시킴으로써 온전한 국민경제를 달성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글로벌화가 공기처럼 우리의 삶에 스며든 현재 시점에서 이러한 일국적 문제설정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상식이다. 여담이지만 최근의 소득주도성장론은 민족경제론의 계승·발전적 측면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는데, 저자는 그것이 애초에 일국적 거시경제/복지국가 모델에 기반을 둔 이론이므로 잘못이라 비판한다. 분단체제의 규정을 강하게 받는 한반도 상황에서는 적절한 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반도경제(체제)는 세계체제, 분단체제, 일국적 국내체제(남한과 북한)라는 세가지 층위와 정치적·군사적 영역과 경제적 영역이라는 두가지 핵심부문으로 이루어진다. 즉, 세가지 층위와 두개의 영역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총체가 한반도경제인 것이다. 요컨대 분단모순을 아예 하나의 체제구성 요인으로 올려버리는 분단체제론을 충실하게 계승함으로써 민족경제론의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셈이다.

그렇다면 민족경제론의 흔적은 한반도경제론의 어디에 남아 있는 것일까? 평자는 모종의 자기 완결적 네트워크를 바람직한 것, 적어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규범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 속에서 그것을 읽었다. 저자가 말하는 ‘동아시아 (자본주의) 모델 2.0’에서, 적어도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동아시아 경제(물론 한국경제도)의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동아시아가 예외적으로 개방된 네트워크 형태로 산업집합체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으로의 네트워크 집중과 위계적 대기업 주도라는 특성은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생산네트워크를 “위계적이고 비대칭적·비완결적인 모습”을 띠게 만들었으며, “이 네트워크를 좀더 수평적이고 대칭적인 형태로 개선하는 데서 혁신과 전환의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97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뉴노멀이 개입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2008년 위기 이후 전세계적으로 나타난, 그리고 한국에서도 두렷해진 저성장과 불평등화의 추세는 미국과 중국 간의 대립, 새로운 기술진보 등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성장체제가 작동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즉 과거에는 비정상이던 것이 이제는 정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로서 한국경제의 성장전략 혹은 체제혁신전략은 좀더 균형화된 발전을 위해, 비대칭적 네트워크의 공백을 메우면서 기존의 노멀, 예컨대 대기업 중심이나 국가 중심의 위계적 체제를 혁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쉽게 예상되는 비판 하나는 모든 네트워크가 궁극적으로는 비대칭적인 형태로 진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아마도 맑스경제학자라면, 저 유명한 불균등발전 명제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그런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꿈이라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는 내내 평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물음은 왜 굳이 ‘한반도’라는 공간에 집착해야 하는가였다. 저자가 여러차례 강조하듯이, 분단체제는 그 상위개념으로서의 세계체제, 하위개념으로서의 일국적 체제와 연결된 총체의 한 마디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놓인 분단체제로서의 한반도경제에만 집중함으로써 복합적 총체를 혁신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예를 들어 남북 양국체제론을 비판하면서 저자는 헌법 33조와 4조 영토조항의 변경은 분단체제와 세계체제의 변동 이후에나 다룰 수 있는 문제라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분단체제를 주어진 대전제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가? 일부러 비판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자면, 현실에 대한 정교한 분석의 결과로서 분단체제가 제시된다기보다는 분단체제라는 선험적 개념에 기초하여 현실을 설명하려는 일종의 주객전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물음을 떨치기 어렵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네트워크, 4차산업혁명, 커먼즈, 뉴노멀 등은 굳이 ‘한반도’를 거론하지 않고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개념과 현상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의문은 더욱 커진다. 시장과 기업의 양자택일을 넘어서서 하이브리드로서의 네트워크 조직이 중요하다거나 공유자산의 공공적 활용이 중요하다거나 하는 것은 한반도경제론의 문제의식과 독립적으로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경제민주화를 발전모델의 전환이라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정책패키지로 이해하는 것은 반대의 방향으로, 즉 한반도 내지는 동아시아의 문제로부터 일반론적인 문제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저자의 의도는 결코 아니겠으나, 경제민주화를 동아시아의 특수한 문제로 왜소화함으로써 자칫 서구 혹은 진정한(?) 자본주의에서는 경제민주화가 이미 달성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수준에서 제시되는 발전전략들, 부품소재장비 공급업체의 글로벌 가치사슬에의 편입, 네트워크 요소를 강화한 산업정책이나 커먼즈를 만들어내는 혁신가의 역할, 분권형 발전을 위한 지역연합 등은 매우 의미있는 제안이다. 한국사회과학의 천형이라고도 할 분단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려는 남다른 안목을 유지하면서도 이러한 정책방향을 과연 어떻게 실행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이 책의 강점이 있음은 물론이다. 평자의 딴죽걸기는 그러한 강점이 더욱 정교한 논리를 통해 빛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