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 소설

 

불가능의 역설을 사는 소설의 운명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모욕의 바닥과 소설적 진실

 

김인숙(金仁淑)의 「조동옥, 파비안느」(『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에는 잠시 숨을 멈추고 소설 화자의 ‘말이 되지 못한 아픔’을 생각하고 살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이 특별하다 싶은 것은, “묘지의 글자들을 해독할 때면,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호흡을 완전히 정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는 화자의 진술이 그 자체 이 작품의 욕망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발굴과 해독(解讀)을 기다리는 묘지(墓誌)의 글자들에 자신의 소설 언어를 겹쳐놓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시도는 다소간 과장된 서사의 매듭을 적절히 여미면서 작품의 형식미를 끌어올리고 있다. 소설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브라질에서 날아온 한 장의 편지다. 16년 전 열여섯살 먹은 소녀였던 화자를 이혼한 남편에게 맡기고 브라질로 떠났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죽음을 전하는 포르투갈어 편지를 해독하는 과정과 670년 전 고려 땅에서 죽은 수령옹주의 묘지를 해독하는 과정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형식으로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수령옹주는 사랑하는 외동딸을 원나라의 공녀로 빼앗긴 뒤 아픔이 골수에 스며드는 ‘통입골수(痛入骨髓)’의 지경에 빠져 병들어 시름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게 화자가 한자 한자 숨을 멈추고 풀어낸 묘지의 내용이다. 문제는 수령옹주 묘지처럼 죽은 자를 따라 땅속에 묻힌 언어에 화자가 매혹되는 이유일 터인데, 고고학적이고 금석학적인 시선을 불가피하게 요청하는 ‘억압된 무엇’의 존재가 여기에 가로놓여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것은 브라질에서 날아온 편지가 해독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이미 오래전에 떠나온, 당신의 나라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이 편지를 쓴 ‘나’는 누구인가. 편지를 쓴 이의 나이는 만 열여섯으로, 화자와 어머니가 헤어져 살아온 햇수와 같다. 어머니가 브라질에서 두번의 결혼을 더 했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한 아이 같다. 그런데 농담 같기도 하고, 백주의 악몽 같기도 한 사연에 따르면 화자는 열다섯에 아이를 뱄고, 열여섯에 아이를 낳았다. 딸의 뱃속에서 아이를 꺼낸 것은 이혼 직후의 어머니였다. 화자는 출혈이 계속되는 몸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옮겼고 얼마 후 어머니는 브라질로 떠났다. 화자는 아이가 어머니의 손으로 ‘버려졌다’고 믿었고 더이상의 사정은 소설에 제시되어 있지 않다. 물론 편지를 쓴 이의 나이라든지 편지를 읽어나가는 화자의 태도가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접 진술이 극도로 억제되어 있어서 독자는 일정한 혼란 또는 오독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열여섯살의 출산이라는 사건은 그 전후 맥락의 의도적 삭제와 엽기성 탓에 현실감있는 서사 정보로 잘 챙겨지지가 않는다. 그랬기에 어느 순간, 편지를 쓴 아이의 존재가 16년 전의 그 사건과 겹칠 때 꾹꾹 쟁여왔던 소설의 슬픔이 증폭되고, 스스로를 ‘개잡년’이라고 부르며 세상의 모욕과 싸워왔던 어머니의 일생이 새로운 조명 속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 점, 말이 될 수 없는 슬픔을 행간화하여 묘지의 그것에 대응시키고자 한 작가의 서사전략이 그만큼 성공적이었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그런데 과연,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할 수밖에 없는 법인가. 브라질에서 날아온 편지란 지난 16년간 ‘끝없이 이어지는 나쁜 꿈’속에서 화자가 피하고자 했던 ‘억압된 것들의 귀환’일 터이다. 그러기에 편지의 발신인도 최종적인 의미에서는 화자 자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 사정은 편지를 쓴 이가 실제 16년 전의 ‘그 아이’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을 넘어선다. 동시에 같은 의미에서 수령옹주 묘지의 ‘통입골수’의 사연에 대해 그 수신인이 화자가 되는 것도 우연일 수 없다. 상징적 부채의 변제 혹은 청산을 둘러싼 욕망의 경제에서는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화자가 중앙박물관 금석문 전시실에서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있던 수령옹주 묘지를 ‘버젓한 실물’로 대면하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 “그것은 과연 사라진 적이 있기나 했던 것일까? 그것은 다만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혹시 사라져 알 수 없는 곳을 떠돈 것은 그녀 자신의 시간이었던 걸까.”스스로를 ‘개잡년’의 자리에 처형하면서도 “양쪽 팔에 아이 하나씩을 안고, 도도하지도 연약하지도 천박하지도 않게 웃고 있는”여인, 조동옥이며 동시에 브라질 이름 파비안느인 어머니의 새로운 발견이 가능했던 것은 그 ‘자리’와 ‘시간’의 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