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불쌈꾼 백기완의 한살매

 

 

임진택 林賑澤

문화운동가. 마당극 연출가, 판소리 명창. 저서 『민중연희의 창조』 『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 『이야기와 소리로 만나는 전태일』(공저) 등이 있으며,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 「다산 정약용」 「오월광주 윤상원가」 등의 사설을 쓰고 작창·공연함.

directlim@hanmail.net

 

 

2021년 2월, 백기완(白基琓, 1933~2021)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다. 백기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선생에 대한 추모의 발길과 더불어 선생의 일생을 함축한 수식어들이 거론되었는데, 대체로 ‘우리 시대의 어른’ ‘거리의 투사’ ‘백발의 투사’ ‘민중의 벗’ ‘조선의 3대 이야기꾼’ ‘장산곶매’ 등이었다. 그와는 달리 ‘불쌈꾼’이라는 수식어가 특히 눈길을 끈바, 그것은 혁명아(革命兒)·혁명가(革命家)를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돌아보니 백기완 선생의 삶은 과연 ‘불쌈꾼’으로서의 한살매(일생)였다. 이 글은 선생이 떠난 자리에서 뒤늦게 ‘불쌈꾼’의 한살매를 되돌아보는 새김글이다.

 

부심이

‘부심이’는 백기완 선생의 어릴 적 덧이름(별명)이다. 선생은 ‘노나메기’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같은 이름으로 계절마다 작은 책을 내던 중, 2005년 『부심이의 엄마생각』이라는 책을 따로 써냈다. 이 책에 담긴 글에 의하면, ‘부심이’는 선생의 어릴 적 덧이름으로 옷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무슨 옷인가 하면, “파아란 풀빛 바지에 빠알간 대님, 빠알간 저고리에 풀빛 고름의 옷”인데, “그것을 떡하니 입고 눈보라 치는 허연 뜰에 나설 것이면 마치 꽁꽁 얼붙은 겨울을 한사위로 갈라치는 새싹 봄빛같이” 드러난다고 한다. 선생의 설명을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부심이’는 ‘눈이 부신 옷’이면서 ‘눈이 부신 옷을 입은 아이’, 다시 말해 ‘새싹 봄빛같이 눈이 부신 아이’를 일컫는 이름이었다고 생각된다.

선생의 어머니는 늘 어린 아들이 스스로 생각을 더듬을 수 있게 말뜸(화두)을 던져주시곤 했다. 선생이 어렸을 적 어머니로부터 듣고 머릿속에,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뜸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아무리 단 엿이래도 땅에 떨어진 건 주워 먹는 게 아니다.”

“사내 녀석이 돌을 던져야지 소쿠리나 집어던지는 게 아니야.”

“제 배지만 부르고 제 등만 따스고자 하면 키가 안 커.”

“굶주린 남의 배를 채워주려면 제 배는 좀 주려야 하는 게야.”

“살 맞은 짐승은 산으로 가고, 칼 맞은 사람은 사람한테 온다.”

꽁꽁 얼붙은 겨울을 한사위로 갈라치는 새싹 봄빛같이 살라고 어머님이 덧붙여주신 이름 ‘부심이’! 기완은 이 덧이름을 새김말(좌우명)로 삼아 평생을 살았다.

 

마당굿

내가 백기완 선생을 처음 뵌 것이 1973년이던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졸업미필자’로 남아 연극 활동을 하고 있던 내가 그때 막 출범한 대학가 탈춤운동과의 결합을 모색하고자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 사무실을 찾아가서였다. 심우성 선생의 한국민속극연구소는 당시 명동 어느 건물 3층에 있었는데, 내가 친구 김민기(「아침이슬」의 작사·작곡자)와 함께 그곳을 찾아갔을 때 마침 심선생은 출타 중이었고 전혀 예기치 않은 딴 선생을 만났으니 그분이 바로 백기완 선생이다. 두분 선생이 한 사무실에서 나란히 책상을 놓고 활동하고 계신 것을 우리는 모르고 간 것이었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나는 거기 앉아 있는 어떤 사내를 보자마자 첫눈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에게서 백두산 범의 기상을 느꼈기 때문이다. 백두산을 가본 적이 없고 범을 직접 본 적이 없는 내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백범사상연구소’라는 명칭으로 인해 어떤 착각이 있었을까? 김구 선생의 호 백범(白凡)은 ‘백정처럼 천한 평범한 백성’이란 뜻이었음에도, 나는 백기완 선생이 백범 김구같이 범의 기상을 이어받은 분이 분명하다는 예감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백기완 선생이 진한 황해도 사투리로 우리에게 던진 말씀은 뜻밖에도 정치나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민속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탈춤에 관심 갖고 운동을 한다고? 거 아주 근사하구나야. 그런데 말이야, 지금 와서 전수합네 하는 탈춤 이거는 관아의 아전들이나 했던 것이고 진짜 민중의 탈춤, 마당굿은 따로 있디.” 처음 듣는 견해인지라, 나는 조심스럽게 선생께 질문했다. “마당굿이라구요? 진짜 탈춤, 마당굿은 무엇이며, 어떻게 다릅니까?” 그러자 선생은 그 자리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선생의 생각을 포효하듯 꺼내놓으셨는데, 그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참으로 놀랄 만한 시각이었다.

“요즘 어디 탈춤을 보면 맨 처음 먹중이 나와서 춤추지 않네? 춘정을 못 이겨 나왔다고 하면서 드러누워 꿈틀거리는데, 그기 다 가짜야. 원래 그기 멍석말이춤이야. 멍석말이가 뭐이냐 하면 양반 지주 놈들이 말 안 듣는 머슴을 멍석에 말아 패 죽이는데, 원한 품고 죽은 머슴이 참나무 짝짝 갈라 터지는 소리를 장단 삼아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몸부림이 멍석말이춤이디. 요새 살풀이춤이라고 하는 거, 그것도 다 기생춤으로 변질된 거이야. 액은 쫓고 살은 푼다고들 하지마는, 살풀이춤은 본래 살을 뽑아내는 몸부림이디. 적이 쏜 화살이 어깨에 박히면 꿈틀하면서 그 살을 잡아 뽑아내고, 등에 와서 박히면 다시 그 화살을 잡아 뽑아내고…… 이렇게 맺힌 건 풀어내고 박힌 건 뽑아내는 동작이 살풀이춤이라고. 우리 춤의 근원은 꿈틀거리는 몸부림이디. 그리고 그런 몸부림의 판을 일구어내는 것이 ‘마당굿’이야. 양반 아전들한테 붙어서 알랑대는 기 아니고 그 억압을 까부숴서 현상을 타파하는 민중의 판이 ‘마당굿’이디.”

대학가에서 이제 막 탈춤을 발견하고 탈춤운동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아직 마당극·마당굿이라는 용어마저 생겨나지 않았던 시기에, 민속학자도 아닌 백기완 선생의 일갈(一喝)은 전혀 예기치 못한 충격이었다.

 

쇠뿔이

1973년 12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영구집권 유신체제를 획책하던 삼엄한 시기, 칠흑 같은 판을 돌연 갈라치며 자신을 옥죄고 있던 쇠사슬을 끊고 나선 ‘쇠뿔이’가 있었으니 바로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었다. 장준하와 백기완을 잡아들이려고 군사독재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