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불온성, 절규성, 역사성

신경림·정희성·이재무 시인을 중심으로

 

 

김춘식 金春植

문학평론가. 동국대학교 강사. 주요 평론으로 「조각난 시간」 「역사의 폭풍」 등이 있음. achron@hanafos.com

 

 

1. 혼돈의 숲

 

신경림(申庚林) 시인의 시집 『뿔』(창작과비평사 2002)과 정희성(鄭喜成) 시인의 『시를 찾아서』(창작과비평사 2001)에는 각각 두 시인의 시론적 에쎄이가 실려 있다. 두 시집의 출간 시기가 일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두 시인 모두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이 에쎄이를 통해서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어떤 문제의식의 공유를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는 정희성 시인의 글이 1997년에, 그리고 신경림 시인의 글이 2000년에 씌어졌으므로 약 3년여의 차이는 있지만, 이 두 산문은 90년대 이후 퇴조하기 시작한 ‘민중시’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적 전망에 대한 모색을 핵심적인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급변하는 시대환경과 시의 부조화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만들고 있다.

변덕스러운 시대정신에 의해서, ‘사회성’의 내포와 외연이 급격하게 변동하는 와중에, 이 두 시인에게 피부로 다가온 근본적인 문제의식 혹은 위기감은, ‘사회성’이라는 것의 절대적 기준이 무너졌을 때, 시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의 글이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고, 정희성 시인의 글이 “시를 찾아나서며”인 점이 이것을 잘 나타낸다. 이러한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은, 실제로 ‘문학의 사회성’이라고 하는 단단한 공준(公準)의 붕괴와 약화과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문학에서 ‘사회성’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때 문학은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시인은 여전히 시인으로서의 사회적 의미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두 시인은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고 있다.

정희성 시인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작과비평사 1991)의 후기에서, “일상을 그냥 일상으로 치부해버리는 한 거기에 시는 없다. 일상 속에서 심상치 않은 인생의 기미를 발견해내는 일이야말로 지금 나에게 맡겨진 몫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외친다. 나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지 않고 당신들의 당신들의 당신들의 가슴을 울리기를 기대하면서”(105면)라고 했고, 『시를 찾아서』에서는 “내가 현실주의자가 되어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맞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우리의 낭만적인 환상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지 현실주의 자체가 문학적 이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인은 불가피하게 현실주의자가 되기는 하여도 본질적으로는 천진한 낭만주의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79면)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83면)라고 말한다. 이런 일련의 발언은 “말의 시끄러운 소란” “허울좋은 수사”로 전락해버리는 ‘자유’와 ‘민주’ 그리고 ‘시의 사회성’에 대한 ‘내면적 투쟁’을 암시하는 말로 여겨진다.1

그리고 가장 최근에 정희성은 “내가 내 땅에서 떨쳐버리지 못한 누더기를 인도라고 해서 버릴 곳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 세계로부터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날은 없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불연속적인 몇개의 이미지」, 『시와 사람』 2002년 봄호 150~51면)라는 발언을 통해서, 그러한 내면적 성찰과 투쟁의 본질을 ‘사회성’이라는 틀 안에서 새롭게 확인한다. 이 발언 속에는 ‘자유’의 본질적인 의미와 ‘사회적인 의미’의 간극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인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난다. 시에 관한 문제의식도, 이 두 시인에게는 존재의 자유와 사회라고 하는 환경이 근원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간극에 대한 고민에 다름아닐 것이다. 존재의 해방과 문학의 자율성, 그리고 사회적 정의와 공동체라는 가치율의 분열에 대하여 이 두 시인은 각각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 두 시집을 통해서 다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의 방식은 근본적으로는 시의 사회성을 먼저 묻는 것이 아니라, 시의 본질과 기능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시와 시인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이 두 시인의 성찰은 그만큼 근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의 한국시는 내면화와 서정주의로의 지속적인 진행과정을 밟아왔다고 여겨진다. 자본주의의 가속화와 세계화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과 함께 근대의 종착점을 알리고 있고, 이런 내외적인 상황이 개인의 존재형식과 생태환경에 대한 일련의 관심을 촉발시킨 결과가 최종적으로 한국시의 내면탐구와 서정주의로 귀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최근의 서정주의와 미학주의의 추세에 대해서는 몇몇 비판적인 논의가 있었고 그 비판이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2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도 역설적인 문제점은 동일하게 노출된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서 김수이(金壽伊)는 자연과 과거의 시간에 대한 경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배후와 맥락을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비판한다.[3. 김수이 「시간의 원근법과 잔여물」, 『창

  1. 이 점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우바이」(『시와사람』 2002년 봄호)라는 글에서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시를 찾는 여정이란, ‘허울좋은 시’를 버리고 ‘역사와 진실’을 찾고자 했던 여정과 일종의 ‘가역반응’ 관계에 놓인다. 『시를 찾아서』가 정희성 시인의 80년대 시로부터의 회귀 혹은 선회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전혀 반대의 의미에서 ‘일관성’을 추진해나가는 작업으로 보이는 까닭도 이것 때문이다. ‘허울좋은 시’를 부정했듯이, ‘허울좋은(에피세트로서의) 자유’를 부정하고 침묵과 고독 속에서 새롭게 말을 배우고 시를 찾는 작업은 전도된 관계이지만 역시 동일한 ‘진실’을 포함한다. 시끄러운 소란이란, 말의 허울좋은 잔치에 언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가 시끄러운 소란 속에서 형식적 수사와 매너리즘으로 전락해 역사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나, 허울좋은 자유가 ‘말의 순수와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나 그 본질적 측면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그가 ‘시를 찾아서’ 나선 동기의 순수성을 추리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169면)
  2. 최근의 이런 비판으로 가장 대표적인 글은 김승희 「순수·초월의 서정시와 불순·대항의 열린 시」(『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를 꼽을 수 있다. 이 글의 이항대립적인 단순구도와 최근 시의 흐름에 대한 도식적인 견해에 대한 비판은 졸고 「불온한 정신, 순교의 언어」(『오늘의 문예비평』 2002년 여름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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