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손보미 孫寶渼
1980년 서울 출생.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중편소설 『우연의 신』,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작은 동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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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장난
“남자들이란 항상 골칫거리지.”
남자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에 대해 말하자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나는 의구심을 느꼈던 것 같다. 혹은 그녀가 진짜 의도를 숨기고 있다고 여겼거나. 그때 나는 열두살이었고, 여자애들끼리 모여서 시도 때도 없이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남자애들은 더러워. 바보, 멍청이들,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어. 모조리 다. 발언 속에 포함된 경멸은 언제나 진실된 것이었다. 그들—남자애들—에 대해 우리가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즐거움과 흥분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지 이야기의 대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아, 아니다. 그런 건—혐오의 대상에게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내가 그녀의 말에 의구심을 느꼈던 이유는,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그녀라는 사실,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운전 중이었고, 과속 방지턱을 넘어가는 동안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아서 우리의 몸은 차 안에서 꿀럭, 하고 요동쳤다(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도, 어린아이들을 카시트에 앉히지 않아도, 어른들이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워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런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다). 조심성 없는 운전 습관 때문에 그런 일은 빈번하게 발생했지만, 그녀는 한번도 내게 괜찮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를 덜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는 그 정도 물리적 충격이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서였다.
그녀의 운전 습관은 나이가 든 후에도 여전했다.
“그때, 장모님 운전 실력이 총알택시 기사 뺨쳤다니까. 나 토할 뻔했어.”
몇달 전 나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우리가 아직 부부였던 시절, 남편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갑자기 그때의 일을 끄집어낸 적이 있다. 나는 좀 의아했다. 그는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딱 한번 타봤을 뿐이었다. 칠년 전, 그러니까 우리가 결혼을 하기도 전의 일로, 처음으로 그가 우리 부모님 집을 방문한 날이었다. 그는 토요일 오후에 고속철도를 타고 서울에 왔다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일정을 짰다. 주말 내내 시간을 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아, 물론 그는 바빴다.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기획재정부 소속 공무원이었다.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들과 비교하면 일의 강도는 비슷한데 연봉은 형편없다고 그는 자주 말했다. “그냥 대기업에 들어갈 걸 그랬어.” 실수했다는 듯한 표정과 자책하는 듯한 말투 속에는 자신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는 자신감, 그리고 최종 선택에 대한 만족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는 진짜 감정을 숨길 의도가 없었다. 그건 그가 말하는 방식일 뿐이었다. 그는 그게 허위의식이나 가식과는 상관이 없다고 믿었고, 매너—하나의 형식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그게 그의 고질적인 특질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저 미숙하고 순진한 부분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그와 결혼하지 않을(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그날 일정을 그렇게 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고, 어디서 하룻밤을 자야 할지 그가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혼도 하기 전인데 여자친구의 부모님 집에서 잠을 자는 건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 당시 나는 직장 근처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내 오피스텔에서 자면 되잖아?” 그는 내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너네 부모님을 만난 날 밤에 너와 같은 방에 머물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근처 호텔서 혼자 자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그런 건 얼빠진 자식들이나 하는 짓인 것 같거든. 자기는 어떻게 생각해?”
그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와 그는 아버지와 그녀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다소 긴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곧 그런 분위기는 사라졌다. 그녀는 활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친근하게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별말 없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늘 그랬다. 손님들이 집에 오면 늘 그랬다는 말이다.
열살 때의 이사—내 생애 첫번째 이사였다— 이후로 가끔 아버지의 회사 동료, 부하 직원, 대학 동창 부부가 집으로 초대되었다. 일회성인 경우도 있었고, 오래도록 지속된 경우도 있었다. 부부 동반 모임! 처음 손님이 집에 오던 날, 낮부터 부산스럽게 준비를 하며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말을 몇번이나 반복했었다. (순전히 남편 때문에) 생판 처음 만나는 여자 어른들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어떤 여자들—보통은 아버지 부하 직원의 아내들—은 대충 분위기를 맞추다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남몰래 나에게 미소를 보내기도 했고, 어떤 여자들은 열성적이고 과장된 포즈로 친밀하게 굴었다(남자 어른들은 여자 어른들 사이에 흐르는 이런 미묘한 기류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거나, 혹은 애써 무관심한 척했다). 무언가 언짢다는 듯이 신랄하고 인색하게 굴며 안주인의 흠집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이런 경우, 그녀들의 남편은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나조차 알아차릴 지경이었건만, 그녀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시종일관 생글거리다가 맥락도 없이 내게 말을 걸곤 했다. “우리 딸, 잘 먹고 있어?” 그녀는 이름 대신 꼭 우리 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경우, 식사가 끝나갈 때쯤이 되면 신랄하고 인색한 기운은 맥없이 사그라들고, 심지어 어떨 때 그들—여자들—은 마치 아주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 같아 보였다.
그녀와 아버지는 손님이 오기 전, 어떤 역할을 맡을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매력을 발산하며 관심을 끌고, 아버지는 시종일관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심을 골고루 나누어준다. 아버지는 과묵하게 굴었지만 적절한 때 재치있는 농담을 던질 줄 알았다.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 아내는 내 진정한 대변인이야, 우리는 이심전심이야, 나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어, 기타 등등. 숭배하는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 주위로, 그전까지 마구 흩어져 있던 자신감과 권위의 편린들이 한꺼번에 일렬로 줄을 서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녀는 양쪽으로 늘어뜨린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마치 아버지와의 사이를 갈라놓는 장벽이라도 된다는 듯— 아버지와 맞닿지 않은 어깨 쪽으로 모조리 넘겨버리고는 아버지의 팔에 자신의 팔을 밀착시켰다. 나는 항상 그걸 못 본 척했다.
평소에 아버지는 전혀 과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대변인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마음을 다 아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건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가 왜 그토록 시시콜콜하게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말해야 했단 말인가? 주말 동안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서 그녀에게 이것저것 요구했다. “나 물이 마시고 싶은데”라든지, “리모컨이 내 가까이 있으면 좋겠는데”라든지, “저녁은 일곱시 십분 전에 먹고 싶어” 등등.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태도에서는 요구사항을 하달하는 사람의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조바심과 초조함, 흐릿한 열의 같은 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 요구사항을 군말 없이 들어줄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말할 때가 더 많았다. “그게 정말 지금 당장 필요한 건지 다시 생각해봐줄래요?” 그러면 아버지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결국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아.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그녀는 약간 극적으로 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구요.”
그러므로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한번도 원하는 것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고, 그럴 필요조차 없다고 말할 때 나는 좀 의아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나는 아버지가 특별히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사춘기의 폭풍 한가운데 서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온갖 시시콜콜한 행동들을 떠올리며 머릿속 재판을 거행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그런 태도는 절대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다.
손님들과 식사가 얼추 마무리되면 아버지가 내게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면 아버지가 찬장 깊숙이 숨겨둔 양주와 작은 잔들을 꺼내리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앞에서 술 마시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흡연가였지만 우리 집에는 재떨이가 없었고, 라이터나 담배가 내 눈에 띈 적도 거의 없었다(다른 집에서는 아버지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아주 일상적이었다). 길거리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함께 걷다가 그런 사람들을 목격하면 아버지는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식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목격하면 어떻게 했는가? 아버지는 두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린다—아버지의 커다란 두 손이 급박하게 내 눈앞에 드리워진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남녀가 포옹하는 장면이 나오거나, 외국 영화에서 키스를 나누는 주인공들이 등장할 때에도 아버지는 내 눈을 가렸다. 그런 세계—하지만 그게 어떤 세계란 말인가?—가 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겠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접근금지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되었다면 그때 내가 그들이 술을 마시리라는 사실, 그들이 담배를 피우리라는 사실, 그들이 특별한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을) 단어들을 내뱉으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겠는가? 접근금지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내가 그 세계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그만 들어가서 자라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언제나 군말 없이 따랐다. 부인들은 꼭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휴 착하기도 해라.” 그런 말을 들으면 머리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기분이 들었고 소름이 돋았다. “동생이 갖고 싶지 않니?” 이런 질문을 받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은 여자 어른 중 한명이 질문을 던졌고, 나머지 어른들은—여자 남자 할 것 없이—안 그런 척하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들은 애가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 말했다.
열한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 나는 손님들이 있는 식탁을 떠나 세수와 양치질을 한 다음,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 불을 껐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어둠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지는 않았다. 눈을 감으면 진짜로 잠들어버릴 수도 있었으므로(이미 그런 경험이 몇번 있었다). 내가 잠들었는지 그녀가 확인하고 가면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방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썼다. 집 구조상으로 보면 내 방은 식당과 가장 먼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 귀에 도착하는 건 적당히 뭉쳐지고 굴려진 음파들의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어렴풋이 감지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나는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를 정말로 매혹시켰던 것은 내가 금지당하는 대상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접근금지 딱지가 붙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 딱지를 ‘그런’ 세계가 아닌 나 자신에게 붙여놓았다는 것. 나는 어둠 속에서 내 신체 전부가 거대한 귀가 되었다고 상상했다. 신체는 언제나 정신을 지배하는 법이어서, 그런 상상이 작동되기 시작하고 나면, 나는 그 흐리터분한 덩어리 속에 독자적인 음절들을 경계 짓고, 하나씩 차례대로 골라잡을 수 있었다. 쾅, 하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 무언가가 쏟아지는 소리, 냉동실에서 꺼낸 얼음을 통에 붓는 소리, 사람들의 뭉개지는 말소리. 그러다가 나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내 아내는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모두 다 알아차린단 말이야.”
음파들의 덩어리 속에서 특정한 지점을 건져 올리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버지는 엉성한 발음이긴 하지만 쩌렁쩌렁하게 집 안이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아버지가 자주 했던 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도 낯설고 이상한 느낌을 품고 있었다. 과묵함을 뚫고 나오는 권위나 자신감도 찾아볼 수 없었고, 평소에 집에서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처럼 성마른 조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뒤이어 무모하게 무언가를 잔뜩 헝클어뜨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키득거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게 웃음소리(그중에서도 그녀의 웃음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길을 걷다가 구멍에 쑥 빠지는 것처럼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바깥에서는 갑작스러운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들이 그 시각 방 안에 잠들어 있을 이 집의 어린 딸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얼른 침대로 가서 누웠다. 눈을 감은 채로 어른들 중 누구라도 나를 보러 오기를 원했다. 내가 그들의 말을 엿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보증해주기를 바랐다. 보증. 그래, 나는 그것을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고, 그 사실 때문에 나는 다소 처참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번쩍, 하고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방금까지 꿈을 꾼 것 같은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부엌으로 간 나는 텅 빈 식탁 위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실망감을 느꼈다(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설거지통은 깨끗했고, 그릇과 술잔들도 이미 다 찬장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치워진 것이다. 나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그녀와 아버지가 함께 잠들어 있을, 그러니까 꽉 닫힌 안방 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일부러 침대 위로 엉금엉금 천천히 기어 올라갔다. 그때, 문득 조금 전 꾸었던 꿈의 일부가 떠올랐다. 사실 일부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내가 떠올린 것은 그저 꿈속에서의 나의 모습, 그것뿐이었다. 나는 거대한 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귀에 손과 발이 달려 있었는데, 꿈속의 나—거대한 귀는 아주 조잡하고 초라하며, 볼품이 없었다.
그 조잡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귀가 꿈속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꿈 밖의 (더이상 거대한 귀가 아닌) 나로서는 기억해낼 재간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님들이 집을 방문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교류가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시들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녀가 몸이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던 시기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병원 검진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그녀는 자신의 백혈구 수치를 걱정하거나 족저근막염이나 부비동염 같은, 그 당시의 나로서는 들어본 적도 없고 어떤 식으로 아픈 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병명을 들먹였다. 주말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우리는 병원으로 갔다. 내가 집에 있겠다고 하면 그녀는 우리 모두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병원 앞에 도착하면 보란 듯이 내게 말했다. “넌 차 안에 있어.” 나는 뒷좌석에 앉은 채로 그들이 함께 병원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걸 지켜보아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그녀가 운전을 하겠다고 우겼다. “몸을 좀 써야겠어.” 어불성설이었다. 집에 걸어가는 편이 훨씬 낫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퇴직한 후로 일년에 한두번쯤, 그녀와 둘만의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집에서 아버지가 시시콜콜한 요구사항을 늘어놓으면 그녀가 그 요구사항의 가불가 판정을 내리는 일은 계속되었다. 적어도 내가 그 집을 나와서 따로 살기 전까지는 그랬다. 둘 사이를 흐르던 극적이고 무엇인가 샘솟는 듯한 기운은 사라졌지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아버지의 표정과 야릇하게 씰룩거리는 그녀의 눈썹은 그대로였다.
그날, 그를 처음으로 우리 집에 데리고 간 날, 끝도 없이 질문 세례를 던지는 그녀와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그들이 그 옛날, 손님들과 머물던 식탁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버지와 그녀가, 나와 그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특정한 시기를 반복해보려는 공모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구심. 내 머릿속으로 이미 주름이 잔뜩 파인 아버지의 얼굴과 주름이 파였다는 표현이 아직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얼굴이 마주하고 킬킬거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 장면이 일단 떠오르고 나자, 그들이 실제로 그런 공모를 했느냐 마느냐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 상상력 때문에 짜증이 났다. 그랬다. 상상력, 언제나 그게 문제였다.
기차표를 예매해놓았다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고 그가 말했을 때, 그녀는 미래의 사윗감을 택시에 태워서 보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좋은 생각이네. 당신이 운전을 하면 되겠네.”
아버지는 한번도 그녀가 운전하는 차에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마치 평소 확고하게 지니고 있던 ‘안전함’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아버지 신체 기관의 반응이 그녀의 운전 스타일에 맞추어 새롭게 조정되는 것 같았다.
마력.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타인의 신체—마음을 조종하는 그녀의 능력을 나는 마력이라고 불렀다.
그날, 그녀는 사십분은 걸릴 거리를 이십오분 만에 주파했다. 그는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처음 타본 사람들이 어정쩡하게 내뱉는 말, 예컨대 “운전을 정말 잘하시네요” 혹은 농담하듯 “와, 진짜 너무 험하게 운전하시네!” 따위의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정신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끝까지 사윗감으로서의 예의를 지켰다. 나는 그녀와 아버지에게 돌아가라고, 그를 배웅하고 바로 내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기차역에 둘만 남았을 때, 그가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장모님 연세가 어떻게 되신다고 했지?”
그후로 그는 한번도 그녀의 운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몇년이나 지난 후에야 불쑥 그런 말을 꺼낸 것이다. 장모님의 운전 실력이 총알택시 기사 뺨친다고. 나는 그때 뭐라고 했는가? 그즈음 나는 남편이 하는 말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으려고, 그저 농담처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쓸데없이 뺨을 왜 쳐?” 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도 나는 궁금하다. 그는 그저 재미있는 일화를 불현듯 떠올린 것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운전 습관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다가 이때다 싶은 시점에 의도적으로 내게 던진 것일까? 그런 식으로 장모의 무신경하고 성급한 부분을 내 앞에 들이밀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당신은 정말 무신경해. 장모님을 닮아서 그런가봐. 피는 못 속이잖아.
정말로 그런가? 아니면 (그가 내게 자주 하는 말처럼) 내가 모든 것을 너무 극적이고 과장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다시 생각해봐줄래요?”라고 말하며 눈썹을 움직이던 그녀처럼?
하지만 여기에는 두가지 오류가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무신경하지 않았다. 경솔한 부분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경솔하다고 표현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범하다는 표현은 어떨까? 아니면…… 무모하다고? 그랬다. 그녀는 무모했다. 오래전, 그녀는 자신보다 열두살이나 많은 남자, 그것도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 다니는 아홉살짜리 딸의 아버지—유부남—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었다. 이게 바로 두번째 오류였다. 아홉살짜리 딸,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인 것이다.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그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분히 의도된 나의 오류이다.
아버지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는 스물일곱살이었고, 초등학교에 부임한 지 몇년밖에 되지 않은 초짜 교사였다. 일년 동안 이어진 둘의 사랑은 비밀로 부쳐지다가 내가 열살이 끝나갈 무렵 꼬리가 밟혔다. 그러고 한달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학교를 그만뒀는데, 자의적인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공식적인 처벌이나 조치의 결과였는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은 그녀가 내 담임 선생님이었다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런 적은 없었다. 심지어 나는 학교에서 그녀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나중에 벌어진 일들을 고려하면 그녀가 내게 학교 선생으로 각인된 적이 없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결혼한 이후로 자신이 한때 선생이었다는, 그런 비슷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다못해 내 학업에 도움을 주려는 그 어떤 시도조차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과거가 마치 이제는 효용을 다한, 징그러움만 남은 허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뒤로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혹은 그렇게 보였다). 특별한 소란도 없이(이것 역시 그렇게 보였다는 의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을 했고, 그다음 해 1월 말에 그녀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결혼식 같은 세리머니도 없이 아버지와 그녀가 법적인 부부가 된 후, 원래 거주지에서 꽤 거리가 있는 동네로 이사를 했다. 내가 전학을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사실 이 모든 사안—이혼, 재혼, 이사, 전학—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이루어졌다. 이전부터 어머니와 아버지는 주말부부였는데, 아버지의 불륜 사실이 발각되자마자 나는 어머니가 주중에 머물고 있던 지방으로 보내졌기 때문이었다. 둘의 주말부부 생활이 시작된 건 내가 일곱살 때, 어머니가 지방에 있는 대학에 전임 교원으로 채용되고서부터였다. 어머니의 짐을 옮기던 날, 아버지와 함께 교수 아파트에 함께 갔던 기억이 난다. 임시거처. 처음에 그곳을 그렇게 부른 건 어머니였고(“여보, 여기는 임시거처일 뿐이야”), 그후로 아버지와 나 역시 그곳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엄마, 내일 임시거처에 안 가면 안 돼? 우리 집에 함께 있으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