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우리 문학은 지금 무엇과 싸우는가

 

불평등 서사의 정치적 효능감, 그리고 ‘돌봄 민주주의’를 향하여

김유담, 강화길, 장류진 소설에 주목하여

 

 

신샛별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지방-여성 서사의 문학사적 반격: 강화길론」 등이 있음.

venus860510@naver.com

 

 

1. 정치적 효능감과 한국문학

 

감염의 두려움이 계속되는 와중에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의 투표율이 66퍼센트를 넘겼다. 총선만 따지면 지난 20년 중 가장 높은 수치다. 그 원인이야 여러 관점에서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교과서적인 분석 중 하나는 투표율이 ‘정치적 효능감’(political efficacy)과 연동된다는 것이다. 정치적 효능감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정치참여를 통해 개발되는 개인적 자질이고, 그렇게 개발된 정치적 효능감은 다시 적극적 정치참여를 유발함으로써 순환적으로 발전한다.1 그렇다면 이번 총선에서 확인된 정치적 효능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2017년 촛불혁명으로 성취한 대통령 탄핵이라는 가시적 결과가 일단은 그 기원으로 보이지만, 실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생생한 정치참여의 흐름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촛불정부의 출범과 함께 일신된 정치적 지형에서 시민들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생활밀착형 법안들의 개정 및 제정을 요구해왔고, ‘갑질’ 반대운동, ‘혜화역 시위’, ‘조국사태’의 국면에서 보여주었듯 정치적 의견의 발언 창구로 광장과 거리를 기습적으로 이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게 됐다. 이 역동성과 응집력의 기저에 4·16의 참뜻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와 다짐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세월호 이후 한국문학은 참담하게 퇴행해버린 시대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이 세계에서 다치고 죽어가는 인간에 대한 애도와 위로의 시간을 거쳐,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에서 분출된 문학의 정치적 효능감을 보유하고 발전시키는 데 힘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이 해낸 일의 의미를 규명한 뒤에, 나는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정치적 소재를 다루는 소설은 많지만 마침내 정치를 해내는 소설은 드물다. (…) 광장의 정치를 위해 모였던 촛불의 열기는 많이 식었지만, 『82년생 김지영』의 독자들이 여성의 삶을 바꾸는 정치를 꿈꾸며 밝히기 시작한 촛불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다.”2 상징적 분기점이 된 『82년생 김지영』 이후 최근 한국문학은 냉철한 현실인식과 삶에 대한 참신한 발상을 두루 갖추면서 독자들의 ‘참여적’ 호응을 얻으며 그들과 함께 ‘정치를 하는’ 쪽으로 확실히 이행해가고 있는 듯하다. 다수의 비평이 작품이 선보인 페미니즘적 통찰의 시의성을 해명하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증폭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은 그 변화의 방증일 것이다. 정치적 효능감을 중심으로 정치와 개인, 그리고 삶의 관계가 재편돼온 형편과 나란하게, 한국문학을 매개로 하는 작가와 독자, 그리고 현실의 상호작용의 핵심에는 정치적 효능감이 놓이게 됐다. 두 정치적 효능감이 서로를 북돋우면서 같은 방향으로 수렴해간다는 것, 그것이 이전과는 다른 단계에 접어든 오늘날의 ‘문학과 정치’론의 긍정적 맥락이다.

『82년생 김지영』을 계기로 촉발된 낯선 형태의 문학적 상호작용을 분석하면서 “문학장을 향해 직접 자신을 발화하고 욕망을 주장하기 원하는 새로운 독자”3의 출현에 주목한 김미정은 새로운 문학의 존재방식을 묻는 또다른 글에서 “지금 문학장 안팎은, 이미 주어진 공통성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고 만들어갈 공통성들에 대해 고투 중”4이라고 진단했고, 이 진단에 동의하면서 최진석은 이제 비평의 과제는 ‘사건의 규범화’를 경계하며 “사건이 중단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표제화하는 데, 즉 새로운 의제를 공급하는 데 있다”5고 강조했다. 이 논의들을 이어나가면서, 또 한국문학이 촛불혁명기를 살아내고 있다는 입장6에 동조하여 그렇다면 “혁명의 ‘완성’을 향한 긴 여정”7에 동반돼야 할 ‘촛불정신’이란 무엇인지를 몇몇 작품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여기에 소개되는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불평등을 직시하며, 그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를 인용하며 불평등을 “사회의 정신 자체의 위기”8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 황정아의 논평에 기대어 말해본다면, 이 작품들은 한계에 봉착한 ‘사회정신’을 대체할 ‘촛불정신’의 요체를 탐문하고 있다.

 

 

2. 세습사회 능력주의자의 산화: 김유담의 경우

 

작년 여름 시작된 일련의 ‘조국사태’를 지나오면서 ‘촛불’은 특정 대학 소속 청년 주도의 ‘공정’에 대한 요구로 묘사되곤 했다.9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연재기사는 그 후기에서 청년담론에 내재된 편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국의 청년은 ‘인서울 4년제 대학생’을 말한다. 주류는 ‘스카이’(SKY) 대학생이다. 이들이 한 말은 ‘요즘 청년들’의 견해가 된다. (…) 한국에서 깎고 다듬어진 ‘청년’이라는 상징은 누군가를 과잉대표하거나 과소대표하는 낱말일 뿐이다.”10 이런 맥락에서 나는 ‘지방-청년’이라는 정체성에 ‘여성’으로서의 시각을 겸비한 소설에 각별한 주목을 요청한 바 있는데,11 최근 출간된 김유담의 첫 소설집 『탬버린』(창비 2020)이 지방-청년-여성이 경험하는 입사와 그 실패의 곡절을 섬세하게 풀어 들려주었을 때의 반가움은 큰 것이었다.

김유담의 소설에서 지방-청년-여성의 입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뿐더러 다양한 갈등을 만나고 반복적 위기를 겪으며 언제나 실패 직전에 처해 있다. 예컨대 「핀 캐리」의 화자 ‘나’는 서울의 학교 앞 오피스텔에 살면서 “이 집에서 행복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되뇌”(19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인물인데, 그녀는 자신의 삶이 오빠의 죽음(으로 내몰린 삶)에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트럭운전을 하다 졸음운전 사고로 사망한 오빠가 남겨준 보험금으로 거처를 마련했다는 데서 기인한 미안함이 그 일차적 이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가 장래에 살고자 하는 삶이 오빠가 일찍이 포기한 삶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녀가 고향에서 오빠의 “가난하게 자라, 가난하게 살다가”(18면) 끝나버린 삶을 복기하는 과정을 통해, 시도조차 되지 못한 그의 다른 인생을 상상해보고 그 가능성을 끝내 버리지 못했던 오빠의 미련까지 헤아리는 여정을 좇는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 아버지가 반듯한 가장이었다면, 엄마가 좀더 야무지게 우리 남매를 건사할 줄 알았더라면, 오빠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14~15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 힘껏 굴려도 (…)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오빠의 삶이 이제야 묵직하게 다가왔다.”(42면)

그런데 죽은 오빠에 대한 애도가 진행될수록 부모를 포함한 고향 사람들에게 그녀가 느끼는 울분은 커져만 가고, 오빠를 향한 것인 줄로만 알았던 연민은 그녀 자신을 향하게도 된다. 따지고 보면 남매는 하나의 인생이 균형 있게 가져야 할 ‘책임’과 ‘소원’을 각각 나눠 산 셈이었다.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를 내쫓고 열일곱살부터 가장의 역할을 자임해오면서 “자신의 꿈은 나와 엄마의 소원을 이뤄주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오빠 덕분에 화자는 가계의 곤궁함을 잊고 “학교 앞에 원룸이라도 하나 얻고, 돈 걱정 없이 대학을 다니는”(18면) 소원만 좇을 수 있었다. 오빠가 죽고 생전 그가 전담했던 책임까지 짊어지게 될 상황을 맞닥뜨리자 화자는 “자기가 다 책임진다고”(30면) 큰소리쳐온 오빠가 원망스러운 한편, 장례를 마치기도 전에 부모에 대한 “살아남은 내 책임을 강조”(15면)하는 동네 사람들의 은근한 압박이 못마땅하고, 타협의 여지 없이 소원을 철회할 수밖에 없게 된 자신의 처지가 착잡하기도 하다. 게다가 오빠가 사라진 자리에는 건강을 잃은 아버지가 돌아와 간병을 요구할 권리 운운하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갈 따름이다.

이 소설의 남매는 과도한 ‘책임’을 부여받은 반면 ‘소원’은 박탈당한 청년들이다. 이 불균형이 그들을 절망하게 한다. 소설의 정념이 “무언가 던지고 부숴버리고 싶다”(39면) 쪽으로 수렴해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삶이 이제는 희망고문도 아닌, 말 그대로의 고문처럼 느껴질 때 발생하는 리셋의 정념.12 김유담의 소설에 배음으로 깔려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증오와 원한, 그리고 강력한 파괴의 욕망이다. 물론 그것은 모든 불행의 원흉처럼 여겨지는 아버지의 형상, 즉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난폭하고 이기적인 데다 무능하며 자신의 무능을 외면하는 탓에 더 나쁜 선택을 반복하는 고집불통의 점령군 앞에서만 돌출할 뿐, 평소에는 제법 잘 관리·통제된다. 「핀 캐리」가 유난한 것은 화자가 오빠의 유품인 볼링일지를 경유해 그 관리·통제를 가능하게 만든 신념의 체계, 즉 능력주의의 폐해까지를 들추는 집요함을 갖춘 덕분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오빠”(32면)는 피곤을 물리치기 위해 “‘젊은 날의 선택’이라는 광고로 유명한 자양강장제”(12면)에 의존해 일상적으로 과로와 무리를 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철저히 단속해 동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