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백민석 白閔石

1971년 서울 출생. 1995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공포의 세기』 등이 있음. hungryyears@naver.com

 

 

브로콜리 소녀/마시멜로 소년

 

 

처음엔 철썩철썩 소리만 났다. 다음엔 물에 젖은 고무 슬리퍼를 신고 스텝을 밟는 소리가 났다. 다음엔 이 가는 소리가 나더니 코맹맹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토마타 소년의 헐벗은 머리가 눈에 들어올 때쯤엔, 그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네가 그 책들을 정말로 다 읽었어?”

오토마타 소년의 얼굴 어딘가에서 샌드페이퍼로 갈아낸 듯한 거친 목소리가 났다.

“네가 그 많은 책을 어떻게 다 읽을 수 있는 거야? 나는 속일 수 있어도 시간은 속일 수 없지.”

오토마타 소년이 다시 등나무 안락의자를 흔들었다. 그러자 의자에 놓인, 윤곽이 불분명한 형체가 이 가는 소리를 냈다.

오토마타 소년은 기능성이 강화된 개체이기 때문에 인간과 닮을 필요가 없었다. 신문용 오토마타가, 때로는 육체적 괴롭힘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오토마타가 인간이어서는 곤란했다. 신문관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 용의자들이 일단 속이려고 들기 때문이다. 신문기계는 그저 소년이라고 부를 만한 덩치를 갖고 있을 뿐 별로 인간종 같아 보이지 않았다.

“네 일주일을 보자고. 168시간이지. 이건 누구에게나 주어진 상수야. 네가 평균적인 인간이 아닐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 하루에 6시간을 잔다고 해. 그리고 침대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시간이 앞뒤로 30분씩 있고. (설마 불면증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럼 168시간에서 119시간이 남지. 욕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하루에 1시간으로 잡자고. 똥 싸고 아침저녁으로 씻고. 남은 건 112시간. 밥은 두끼만 먹는다고 치고, 네가 음식을 하지 않을 경우 하루 1시간 20분. (와이프한테 장보기에 조리랑 설거지까지 다 맡겨버리나? 이 친구가…) 그럼 102.7시간이 남지. 그리고 일주일에 2시간짜리 강의가 세번 있어. 이제 96.7시간이 남아. 넌 두군데 대학에 출강하는데, 한곳은 집에서 자동차로 50분 거리고, 다른 한곳은 지하철로 1시간 10분 거리야. 넌 차가 없지. 그래서 한곳은 주로 택시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지하철을 타. 50분 거리가 두번이니까, 출퇴근 왕복 시간은 3.3시간 더하기 2.3시간. 그리고 학교에 30분쯤 일찍 가서 준비하지 않나? 그래서 이제 89.6시간 남았어. (내 계산이 틀리기를 바라지 마.) 그리고 한두편씩 챙겨보는 미국 드라마가 있지. 요즘엔 뭘 보나. 프로야구가 개막했으니 그것도 보겠지. (넌 성실하니까) 텔레비전 앞에서 일주일에 5시간만 허비한다고 해. 168시간에서 84.6시간 남았어. 그리고 글쓰기. 넌 네 우상 레이먼드 챈들러처럼 하루에 꼭 4시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려고 하지. 노트북을 켜고 워드프로그램을 열어놓고 말이야. 휴일 없이. (정말 하루에 4시간만 일하나? 거저먹는 인생이군.) 56.6시간 남았어. 일주일에 하루는 네가 관여하는 출판사 기획회의에 나가. 2시부터 5시까지 원고 검토하고 회의하고 다음에는 저녁을 먹고 술을 먹지. 귀가 시간은 보통 자정을 넘겨. 이거 10시간. 이걸로 끝이면 좋은데, 그렇게 술을 먹으면 다음날 오전은 이제 나도 늙었네, 체력이 달리네, 하면서 그냥 침대에서 뒹굴지. 이거 보통 6시간. 남은 건 이제 40.6시간. 그런데 일주일에 한번쯤은 뜻하지 않은 만남이나 경조사나 사건사고가 생기니 5.6시간은 그 몫으로 치고 빼자고. 자, 이제 네가 일주일에 책을 읽을 시간이 몇시간 남았지?”

35시간이요.”

안락의자 위의 형체가 이 앓는 소리를 냈다. 훌쩍이는 소리가 난 듯도 했다. 오토마타 소년이 손을 펼치고는 부드럽게 형체의 턱을 매만졌다. 철썩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네가 책을 하루에 한권씩 읽는다고?”

그러자 안락의자 위의 형체는 크게 소리 내어 훌쩍였다. 오토마타 소년은 한발짝 물러서서 형체가 진실을 털어놓기를 기다리듯 뒷짐을 하고 섰다.

“네가 그러고도 사기꾼이 아니야? 네가 무슨 책 읽을 시간이 있어?”

또 한번 철썩 소리가 나고 고무 슬리퍼가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가는 소리에 칭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음엔 그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울렸다.

나는 그제야 그 형체를 알아보았다. 언젠가 텔레비전 쇼에서 본 적이 있다. 책을 아주 많이 읽고 책에 대한 칼럼도 여기저기 쓰는 저명한 서평가였다. 저명하지만 아주 젊었다. 일간지 두곳, 월간지 한곳, 문예지에도 쓰고 있었고 일본의 서평잡지 『다빈치』에도 연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쇼에 나와 책의 무게로 양평 집 구들장이 무너진 사연을 소개했다. 종이책은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어린 시청자들까지 열광했다. 종이책을 읽는다는 것은, 귀족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화적으로 고상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표지였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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