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2

 

비판의 윤리성과 최근의 비평

 

 

임규찬 林奎燦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평론집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 『작품과 시간』 『비평의 창』 등이 있음. kclim@mail.s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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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라는 존재가 비판적임을 의미한다면, 그 비판은 맨 먼저 자기비판이어야 한다.”1 근래 발간된 여러 평론집을 읽으면서 문득 일본의 어느 지식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필자가 이전에 행했던 이런저런 비판이 다시 반박되는 대목에서, 특히 누군가를 겨냥했던 비판이 고스란히 나 자신을 겨누는 무기로 되돌아오는 회돌이 앞에서 그 말이 더욱 절실했다. 가령 ‘타자를 부정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긍정’하는 비판의 병폐에 대한 지적이나, ‘사고와 선언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라는 비판 등이 그렇다. 사실 ‘나’ 위주로 글을 쓰면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화상대를 택해 ‘아전인수’하는 병폐는 언제나 나타나기 쉽고, 타인을 향해 할 말이 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해야 한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기 쉽다. 하여 이런 지적들은 적어도 필자 자신에게 투영해볼수록 아픈 지적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문하는 윤리성도 비평의 창조적 힘을 키우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제로 근년에 ‘문학권력’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벌어졌던 논쟁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자 (1)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비평적 관점과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면서 “마치 한사람의 비평가로 새로 태어나는 것 같은 소중한 인식론적 제의를 겪게 되었다”2라고 말하거나, (2) ‘달갑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문학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각의 밀도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3라고 긍정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보면 ‘비판’의 본질은 상생의 창조성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필요한 만큼 비판하고 또 자신에 대한 비판도 사심없이 감내하면서 역지사지하는 일이야말로 비평의 일상적 수행이리라 믿는다.

사실 서로 아무리 적대적이고 또 명백히 구별되는 사유세계를 가진 입론들이라 할지라도 현실 속에서 뒤섞이다보면 복잡한 역학관계에 놓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데, 특히 서로 적응하려고 애쓸 때나 일정한 지향을 가지고 같이 움직일 때 다른 행위자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훨씬 역동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한사람의 행위자는 끊임없이 다른 행위자의 행동에 반응하면서 협동과 경쟁을 하게 된다. 이런 ‘협동과 경쟁’의 상호작용이야말로 따지고 보면 비평의 속성이고, 또 비판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최근 평론집을 펴낸 류보선(『또다른 목소리들』), 이광호(『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김형중(『변장한 유토피아』), 김영찬(『비평극장의 유령들』)이 참여한 한 문학좌담(「‘문학의 시대’ 이후의 문학비평」, 『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이 흥미로웠다. 좌담에서 사회자가 ‘오늘날 수도 없이 쏟아져나오는 문학작품들을 가장 현장 가까이에서 읽고 또 그 흐름을 가장 민감하게 잡아내고 분류하며, 또 거기서 더 나아가 가장 과감하게 맥락화하는 비평가들’이라고 형용한 대로, 그 저자들이 때마침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눈지라 더 눈길이 갔다. 아마도 필자가 생각하는 비평경향이 하나의 당사자로서 참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비판을 받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또 뭔가 반론을 펴고 싶은 마음도 들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비판의 윤리성’이란 문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글과 직접대화라는 두가지 형식이 한데 섞이면서 이뤄진 비판적 토론의 풍경을 보면 참석자들끼리는 어느정도 공정한 주고받기가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각각의 평론집의 글과 연계해 좌담의 발언을 생각해보면 거기엔 또 적당한 타협과 회피 등 부정적 요소도 엿보인다. 여하튼 오늘의 비평의 풍경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예라고 생각하여 이들의 좌담 발언과 평론집을 중심으로 필자 나름의 비판적 개입을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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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좌담의 흐름을 보면 여러 요인에 따라 진영이 형성되고 또 특정한 부분에서 연대가 이루어졌다가 다른 부분에선 분열과 대립이 생기기도 하는 등 흥미로운 이합집산이 연출된다. 그 점에서도 이 좌담은 흥미롭다. 특히 이광호(李光鎬)와 김형중(金亨中)의 발언은 서로 호흡이 잘 맞고 자신감이 실려 있어 강한 활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발언의 공정성이란 견지에서 볼 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되고 더 진척될 논의전개를 중단시킬 수 있는, 이른바 비판 자체를 무화시킬 수 있는 전제가 이 좌담에서 은연중 떠돌고 있었다. 이광호가 불쑥, 그러나 매우 적극적으로 밝힌 바, 비평가는 ‘긍정적인 것이든 비판적인 것이든 과장되게 호명하는 것’ 즉 일종의 문학적 베팅(betting)을 한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그런데 김형중 역시 ‘자신도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해석’한다고 동의 발언을 하고 김영찬(金永贊)마저 ‘2000년대 문학은 90년대 문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학’이라는 자신의 진단이 최근 위축된 문학담론을 활성화시켜보기 위한 ‘수행효과’의 전략적 측면이 있다고 하여 논의 전반을 교란시킨 면이 없지 않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확신의 윤리보다는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책임의 윤리가 떠올랐다. 책임의 윤리란 우리의 의도 또는 원칙에 대해서 책임을 질 뿐만 아니라, 가능한 대로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를 말한다. 하나의 확신처럼 이야기하지만 책임의 윤리가 부재하는 이런 식의 발언이 나옴으로써 이후 논의는 ‘의도적인 전략을 감안하더라도’ ‘수행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의도적인 건지 몰라도’라는 식의 단서가 꼬리를 물면서 발언자의 비판정신을 위축시키고 만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지나치다’ 정도로 용인됨으로써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항이 쉽게 용납되는 지점도 없지 않다.4

따라서 이들 논의의 흐름을 제대로 추적하려면 ‘전략’이나 ‘수행효과’라는 수단을 지우고 목적 자체로 직핍해 들어가 그것의 맨얼굴을 대면할 필요가 있다. 이광호, 김형중 스스로 ‘과장’이라 호명했듯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 방식의 ‘극단’들이 만들어놓은 문학과 비평의 영토가 그것이다. 의외로 ‘극단적인 찬사와 극단적인 비판’이 짝패를 이

  1. 나카무라 유지로 외 『인간을 넘어서』, 장화경 옮김, 당대 2004, 301면.
  2. 권성우 『논쟁과 상처』, 숙명여대출판국 2006, 7면.
  3. 서영채 『문학의 윤리』, 문학동네 2005, 20면.
  4. 심지어 ‘아닐 수도 있다’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면도 배제한 것은 아니다’는 등의 구멍을 만들어줌으로써, 임시방편의 논리적 방패막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민족문학론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나도 이런 정도의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투로 슬며시 덧붙이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생산적인 쟁점들이 논의의 장에서 ‘논쟁화’되지 않고 파편화되면서 흩어진다. 대신 일정한 수준의 자기주장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면서 더 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