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비평은 있다

신경숙·은희경·전경린과 관련하여

 

윤지관 尹志寬

문학평론가.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 평론집 『민족현실과 문학비평』 『놋쇠하늘 아래서』 등이 있음. jkyoonjk@hotmail.com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얼마 전에 출간된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2)라는 도전적인 책에 촉발되어 씌어진 것이다. 이 책의 ‘도전’은 왜곡된 비평의 관행을 겨냥한 것이니, 필자를 포함하여 그 관행에 어떤 식으로든 한자락 걸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기에 무연한 척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필자 자신이 이 시대 비평의 직무에 대해서 말하면서, ‘주례사에 버금가는 격려말씀’이 만연하고 있는 평단의 상황을 거론한 것도 꽤 오래 전 일이 되었지만(「현시기 비평의 기능」, 『창작과비평』 1995년 봄호), 실상 비평의 왜곡에 대한 비판과 지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번 책은 산발적으로 있어온 평단의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한꺼번에 종합해낸 점, 구체적인 작가와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 그릇된 비평풍토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 그간 있었던 문학권력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을 더 구체화하고 심화시키고자 했던 점 등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모두 고른 수준을 보이는 것은 아니고 문제의식의 깊이나 방향이 꼭 일치하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 비평의 현단계와 그 문제점을 돌이켜보게 하고, 나아가서 비평의 왜곡을 넘어선 진정한 비평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하게끔 한다.

‘주례사 비평’이란 말로 이 저자들이 지칭하고자 하는 것은, 대체로 평단에서 일반화되었다고 이들이 판단하는 과장되거나 편향된 해설투 및 상찬투의 모든 글들, 이 책 서문의 표현을 빌리면 “수사학 및 가치평가의 과잉이라는 현상”이다. 이 책에 직접 언표된 바는 없지만, 이 현상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정도의 관점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이같은 관행이 특히 90년대 들어와 팽창하면서 ‘주류화’되었고 그것이 특정 작품들의 해석을 제한하거나 왜곡시키는 역작용을 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을 꼭 90년대만이 아니라 한국비평의 일반화된 문제로 파악하고 그 구조와 인식론적 한계를 짚어내는 것이다. 전자가 첫머리에 실린 김명인(金明仁)의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주제라면, 후자는 김진석(金鎭奭)의 「초월적 서정주의에 스민 파시즘적 탐미주의」에서 가장 설득력있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김명인이 대상으로 한 작가가 90년대를 대표한다고 해도 좋을 신경숙인 이유도 있겠으되, 그를 비롯한 몇몇 논자들은 소위 ‘90년대 작가군’에 대한 비평적 담론의 왜곡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고, 여기에는 신세대 문학논쟁에서부터 최근의 문학권력 논쟁에 이르는 90년대 문학을 둘러싼 논점들이 두루 개입되어 있다. 필자가 이번 글에서 주로 관심있게 다루게 될 주제는 바로 이 부분으로, 특히 이 저자들의 비판대상이 된 세 여성작가 신경숙·은희경·전경린의 경우 과연 이들의 진단과 비판에 어느 정도의 적실성이 있는지, 또 그 여부와 관련하여 현시기 비평의 과제는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려고 한다.

 

 

2. 비평의 빈말과 사심에 대해서

 

90년대 문학에 두어질 이 글의 촛점과는 어긋나게도 정작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서 비평의 문제에 대한 가장 인상적이고 의미있는 관찰을 전해준 것은 김진석의 글이다. 김진석은 ‘주례사 비평’이란 말은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서정주를 대상으로 하여 “문학 텍스트에 대한 비평가의 빈말이 그 텍스트의 ‘문학적’ 존재 자체”를 흐리고 있는 현상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그가 말하는 ‘빈말’은 비평가들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공허한 상찬’으로, 특히 서정주에 대한 ‘미학주의적’ 찬사가 어떻게 텅 빈 수사를 통해 텍스트와 삶의 불가피한 관련성(그의 표현으로는 스밈, 혹은 꼬임과 얽힘)을 호도하고, 결국 “텍스트에 대한 존경을 빙자한 선정적 선동”으로 떨어지고 마는가를 파헤친다. 이같은 관점 자체는 흔하다면 흔한 것이지만,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읽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것이기에 그만큼 비평의 이름에 값한다. ‘주례사 비평’이라는 문제의식과 관련짓자면, 문학텍스트가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맥락”에 존재하고 있음을 망각하거나 회피하는 비평언어들은 결국 거짓언사이자 선동의 언어, 즉 ‘주례사 비평’이 된다. 결국 단순히 해설이나 겉표지의 추천사에서 발견되는 의도적인 의미 사주기와 노골적이고 부정직한 편들기식 평과 같은, 워낙이 ‘주례적인’ 성격이 강한 글뿐만이 아니라, 본격평론을 목표삼은 ‘잘 쓰인’ 평문일지라도 ‘사회적 실천적 맥락’에 대한 의도적·비의도적 망각을 통해 빈말을 불러오고 비평의 허구를 만들어내는 활동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빈말의 수사학은 가령 서정주에 대한 경우가 그렇듯이 텍스트에 대한 ‘미학주의적’ 관점 속에 내재해 있다. 물론 미학주의와 상반되는 의미에서의 ‘정치주의적’ 관점에도 비평의 빈말이 스며들 위험은 상존하는 것이니, 여기서 빈말 아닌 비평의 본성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그러나 핵심적인 물음이 다시 떠오르게 된다.

의도적인 과잉해석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이 비평의 추문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비평이 김진석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빈말’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가는 또다른 문제다. 비평이 빈말 없는 단단함과 충일함을 지향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주례적인’ 측면이 사상된 상태에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비평의 현실태라고 할 수 있다. 주례 없는 결혼식을 생각하기 어렵듯 관례적인 언사나 인사말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평문도 찾기 어려우며, 나아가서 주례의 인사와 격려부터가 모두 ‘빈말’이라고만 하기에도 어려운 구석이 있다. ‘주례사 비평’ 일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라, 비평에서든 다른 영역에서든 이미 사회 내에 정착된 기제들은 타파되어야 할 관습으로 굳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관련과 구조 속에서 피할 수 없는 한 요소로 얽혀 있는 삶의 요건들이기도 하다. 비평이란 이 얽힘을 풀어내고 ‘빈말’의 요소를 끊임없이 걸러내는 물음과 성찰의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빈말’의 이같은 착잡한 기원은 단순한 비판이나 배격만으로 문제가 종식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소박하게 말해서 주례사가 하나의 사회적 관례로서 유의미한 만큼, 비평의 관례로 자리잡은 ‘빈말’들도 맥락을 고려하고 각각의 수준을 가려서 변별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 이러한 ‘빈말’의 기원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례사 비평’이란 말의 쓰임새들을 살펴보면, 그것은 문학권력에 복속하여 이득을 누리고자 하는 비평가의 부정직한 영합이라는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출판자본으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문화생산기제에 편입된 문학의 입지라는 구조적 차원에까지 걸쳐 있다. 개별적 기원과 구조적 기원이 혼란스럽게 나타난다는 점이 이 책의 문제의식의 소재를 불명확하게 만들고 있지만, 대체로 이 책이 파악하고 있는 빈말의 궁극적 기원은 이 두 영역이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문학권력’이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문학부문에서 권력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한 대형출판사들과 그와 맺어진 비평가 및 문학그룹의 부정적 행태가 속출하는 빈말들의 산실이며, 특히 90년대 들어 “일상세계와 내면성의 탐구라는 흐름이 문학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면서 90년대 작가와 비평가들은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일종의 연대의식으로 맺어져 비판보다는 상찬과 격려, 적극적 의미부여에 더 주력하는 양상”(김명인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주례사 비평’에 대한 이처럼 일반적인 관찰이 또다른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충실한 해석과 평가가 늘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또 비평활동이 텅 빈 공간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관련 속에서, 즉 ‘권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문학권력’을 빈말의 원천으로 보는 시각은, 좀더 세밀해지지 않으면 동어반복이 될 위험도 있다. 사회적 현실의 맥락 속에서 생성되고 존속되는 빈말들이 현실과 가지는 착잡한 연관관계는 손쉬운 양심의 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