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지돈 鄭智敦
1983년 대구 출생.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 장편소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등이 있음. hier910@gmail.com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Light from Anywhere)
양코씨가 서울에 온 건 1968년 11월 10일이었다. 나이는 스물일곱, 키는 중간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고 호리호리하고 허리가 짧고 팔다리가 길어 중간보다 조금 커 보이지 않아?라고 했지만 태순은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보다 작으니까, 작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작은 건 작은 거지. 양코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건 작은 거, 작은 건 좋은 거지? 그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억양으로 말했고 태순은 왜 작은 게 좋은 건지 생각했다. 작은 건 나쁜 거 아닌가. 그녀는 1968년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해 서울에 올라왔고 그 전까지 영천에 살았으며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에서는 수업 듣거나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풍경만 보고 살았다. 명동에서 종로까지 걸으며 유리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신축 빌딩과 아케이드 안으로 사라지는 사람들, 바스러질 것 같은 구한말의 집들과 일제시대에 지어진 백화점의 벽을 손으로 더듬었고 건물 사이를 들고 나는 바람과 사람들의 차림, 버스가 새로 개통한 고가도로를 올라가는 풍경을 보았다. 양코씨는 자신이 바로 그렇다고, 나와 똑같다라고 말했다. 토오꾜오에서 태어나 동경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한 양코씨는 1박에 520원인 신당동의 싸구려 여관에 자리 잡았다. 잠깐 있다 집을 구한다는 게 어쩌다보니 세끼 식사 합쳐 한달에 11,000원이라는 주인아줌마의 제안에 넘어가 1년이 넘도록 방을 떠나지 않았고 일본에도 가지 않았으며 수업이 없을 때는 방에 누워 이태준과 박태원, 김동인 따위의 소설을 번역했고 삼학소주에 김치를 곁들여 먹으며 글을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정처 없이 서울 시내를 떠돌며 풍경만 보고 지냈다. 수업을 듣거나 공부를 하고 다른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에는 왠지 게으름을 부렸고 명동에서 헌책방을 히야까시 하거나 사보이호텔 뒷골목에 기어들어가 도쿄삿포로야 라면을 먹었지만 딱히 토오꾜오가 그리워서는 아닙니다, 한번은 반외팔이 사내에게 꼬여 오양빌딩의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커다란 연탄난로가 있는 주점에서 낙지와 야채와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끓인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지요. 사내는 더블브레스티드 양복에 하얀 목도리, 베이지색 코트를 걸친 행색으로 어딘지 모르게 무서우면서도 웃긴 모양이었고 솔직한지 무례한지 구분이 가지 않는 태도로 쪽바리놈아 돈 내놔!라고 윽박질렀다가 곧 하하 웃으며 겁먹지 말라고 어깨를 치곤 했습니다. 양코씨는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했지만 그게 서울이지요,라고 말하며 사람과 바람, 서울은 이 둘,이라는 식의 같잖은 각운을 맞추며 슬며시 웃었다. 양코씨는 행색이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더럽거나 가벼워 보이지 않았고 왠지 모르게 품이 큰 윗도리와 팬츠가 썩 잘 어울리는 사내로 여타 한국 남자들처럼 목소리가 크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애정과 복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게 일본인으로서의 자격지심 때문인지 원래 생겨먹은 성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신중하고 예의 발랐으며 때때로 웃겨서 좋았지만 태순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웃기면 웃으면 되는 거다, 하는 식으로 되뇌었고 나도 웃길 수 있는데 생각했지만 태순아, 여자가 웃긴 건 미덕이 아니야 하는 큰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웃기고 있네, 웃기지도 않은 주제에. 태순은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생각난 걸 말하지 않고 속으로 말하다보니 어느 순간 말하지 않는 게 편해졌고 받아칠 타이밍도 잊어버렸고 난 더이상 웃기지 않나봐 생각이 들어 우울하기도 했지만 내가 나를 웃기니 그걸로 됐어, 웃기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거나 생각하고 집에 들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쓰고 내일 있을 것 같은 일을 쓰고 더 기분이 좋을 때는 10년 후에, 30년 후의 일에 대해 일기를 쓰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30년 후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때는 나도 오십이 넘고 손녀 손자에 볼장 다 봤을 나이고 텔레커뮤니케이션으로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세기말이니까 여자가 웃긴다고 지랄할 사람은 없겠지, 안 그래, 양코씨? 하고 태순은 생각했다. 양코씨는 자기가 뭘 실수했나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태순을 봤다. 태순의 눈이 뭔가 말하고 있었고 입꼬리가 실룩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태순은 가끔 그랬고 말하고 싶은 게 잔뜩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는 걸 온몸으로 말했는데 그건 나도 그래, 너랑은 다르지만 나도 그래, 68혁명이 일어나고 야스다 강당이 해방되고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검은 장갑 시위대가 행진하고 기동대가 투입되고 박살 난 동경대생들이 질질 끌려나오는데 나는 여기서 뭐 하지, 반도호텔과 삼성빌딩 사이에 서서 골목을 돌아나오는 바람, 서울 시내의 골목을 휘젓고 튀어나온 젤리 같은 부드럽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감상에 젖기나 하다니, 그렇지만 내가 서울에 살기로 한 것도 이 바람 때문인데, 베를린과 토오꾜오를 본뜬 서울의 건물들 사이를 거닐며 액화되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면 안 되냐고 양코씨는 생각했고 이쪽으로 가요, 오늘은 남산으로 가요,라고 말했다. 양코씨와 태순 모두 서울에 산 지 일년 넘도록 변변한 친구가 없었고 친구를 사귈 생각도 없었다. 이르게 죽음을 맞은 망자처럼 서울의 남은 시간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걸었고 그렇게 오래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길을 걸으며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마주치지 않으면 점점 얼굴이 흐릿해지고 몸의 가장자리가 천천히 깜박거리는 거 같은 느낌이 들지요, 양코씨를 만난 건 그렇게 망각이 일상화되고 내가 서울의 풍경을 비추는 외벽유리처럼 느껴지던 때였습니다,라고 태순은 말했다. 양코씨가 왜 양코씨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의 본명은 초오 쇼오끼찌, 한자로는 장장길(長璋吉). 하지만 모두 양코씨라고 불렀다. 모두라고 해봤자 태순을 포함해 두어명밖에 없지만 모두 양코 내지는 양코씨라고 했고 그런데 별명에 씨를 붙이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렇다고 양코라고 하기는 좀 그렇죠. 태순은 말했다. 양코라고 할 만큼 친하지 않고 초오짱, 초오쿤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양코씨는 아무렇게나 불러요,라고 했고 이름에 대한 문제는 그걸로 일단락, 후에도 이름에 대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했다.
반도의 바람은 열도와 달라요. 양코씨가 말했다. 반도의 바람은 대륙의 바람이고 사또오 키요시는 한랭의 미를 맛보는 것은 조선에 사는 자의 특권이라고, 추위에 하늘이 갈라지고 모든 찌꺼기, 더러움, 구태, 불순한 생각과 허례허식이 얼어붙어버린 차갑고 조용한 경성의 거리를 걸어보라고 했지요, 물론 저는 그 사람을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양코씨는 문학을 공부했고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책을 쓰고 싶어했다. 태순은 영문학을 공부했지만 책을 쓰고 싶지 않았고 영시를 낭송하는 재미 같은 건 대학 입학 첫날 깨끗이 잊었다고 말하며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들뜨거나 풀이 죽는다고 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아침마다, 가끔 밤의 침묵 속에서 불쑥 솟아올랐고 그건 아무래도 지금 시대 때문 아니겠어요?라고 양코씨는 말했다. 모든 게 변하고 있고,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하고 양코씨는 말했다. 양코씨는 일어도 영어도 잘하고 매일 외국 잡지를 끼고 다녔다. 반면 태순은 뭔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게 없어, 친구들이 빠져드는 불문학이나 독문학, 비틀즈 말고 다른 게 없을까, 조금 덜 낭만적이고 덜 파퓰러한 걸 찾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