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정이현
1972년 서울 출생. 2002년 『문학과사회』 제1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있음.
빛의 제국
김현수, 33세, Y대학 부설 자살문화연구센터의 계약직 연구원
2004년은 투신자살자의 비율이 유난히 높았던 해로 기록되어 있다.
장유희의 사체가 발견된 것은 2004년 10월의 네번째 금요일 밤이었다. 향년 17세. 그녀는 상습절도 혐의로 소년법상 제7호 보호관찰처분을 선고받고 여성전용 소년원인 비원여자고등학교에 수용중이었다. 경찰이 판단한 직접 사인은 추락에 의한 좌측 후두부 파열. 투신자살이라는 뜻이었다. 유족은 소녀가 자살할 만한 이유가 없다며 강한 의혹을 제기했지만, 그렇다고 자살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만한 특별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기 2004년에 대하여 나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그해 동네 중국음식점의 짜장면 한그릇이 3000원이었으며 사람을 스무명도 넘게 죽인 연쇄살인범이 체포되었고 아테네 올림픽이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한국현대사 연감을 통해 확인했다. 자료를 읽는 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때의 일들이 갑자기 어슴푸레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당선자 명단이 소속 정당별로 깨알같이 박혀 있는 페이지의 한 귀퉁이에다 샤프펜슬로 계산을 해보았다. 2022-2004=18. 지금 서른세살이니 그해에 나는 열다섯살이었다. 장래희망을 묻는 설문지에 득의양양하게 ‘노숙자’라고 적어넣은 것이 열다섯살 때인지 열여섯살 때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열네살 때인지 헷갈렸다. 다른 녀석들이 한의사, 영화감독, 증권분석가 같은 직업을 써넣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 틈에서 ‘내 꿈은 노숙자가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건 적어도 ‘내 꿈은 우주비행사가 되는 거야’라는 것보다는 남자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사춘기였으니까. 현대사 연감에 의하면 정부가 전국의 노숙자 및 부랑자들을 보호시설에 강제로 수용한 것이 2010년 6월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노숙자라는 단어 자체를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좀 섭섭해졌다.
이제껏 나는 과거의 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편이었다. 한국전쟁이나 한일 국교정상화, 1990년대의 외환위기 같은 것을 주제로 다루는 주말 밤의 TV 다큐멘터리쇼는 지루해서 보지 않는다. 그 시간에는,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렬한 사랑을 불태우는 연인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사귄 지 육개월째인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한다. 지금까지 나는 일상이란 그저 앞으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모교의 자살문화연구센터의 연구원이 된 건 약 한달 전부터다. 새로 발족하는 연구소의 계약직 연구원 모집요강에는 대화학(對話學) 박사과정 수료 이상이라는 자격요건이 명시되어 있었다. 연구소장인 사회학과 허교수는 지도교수의 추천서를 들고 찾아간 나를 꽤 호의적인 태도로 대했다.
“자네, 요새 보기 드물게 반듯한 가정에서 자랐군. 그 점이 특히 안심이 되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양친이 법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한 채 삼십년 이상 살아온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반듯하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대단한 가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반듯한 가정이라니. 그렇게 주관적인 가치판단이 들어 있는 표현은 위험했다. 자칫 극렬 보수주의자의 이미지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허교수는 과연 학교 안팎에 소문난 대로 거칠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원하던 대로 이년 임기의 계약직 연구원이 되었다. 기뻤다. 언론에서 매일 실업률 해소방안에 대해 떠들어대는 이런 불안한 시기에 전공을 살려 취업에 성공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 같은 비실용적인 전공으로는 더욱 그렇다. 이제는 인간관계의 내밀한 커뮤니케이션 같은 가치는 유행 지난 양복에서 나는 좀약 냄새만큼이나 낡은 것으로 취급되는 시대다. 자살문화연구센터를 사람들은 자문연이라고 줄여 불렀다. 대형 씨스템을 선호하는 근래 대학연구소의 추세에 비춰볼 때 자문연은 비교적 조촐한 규모의 조직이었다. 상근조교 한명 외에 박사급 연구원 예닐곱명이 속해 있을 뿐이었다. 행동과학, 법의학, 청소년 발달심리학 등 연구원들의 전공은 제각각 달랐지만, 자신이 이곳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하긴 대학부설 연구소라는 곳의 정체가 원래 다 그렇고 그렇지만 말이다. OECD 가입국가별 자살 증가율에 관한 실태보고서 따위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는 댓가치고는 적잖은 연봉이었으므로 나는 새로운 생활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며칠 전 아침, 허교수가 나를 호출했다.
“자네, 비원여자고등학교에 대해 알고 있나?”
“W시에 있는 소년원 시설 말씀이십니까? 얼마 뒤에 철거된다는.”
“아, 철거되는 것은 아니고 박물관이 된다는구만. 누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인지 참.”
그는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었다.
“김박사,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게. 2004년 10월에 그곳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죽었네. 옥상에서 떨어졌지. 뭐든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해버리던 시대였으니 자살로 덮어버리기도 쉬웠을 거야. 하지만 이게 말이야,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아주 많은 케이스거든. 알겠나? 이제부터 우리는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야 하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사소해 보일 테지만 이건 김박사의 예상보다 훨씬 커다란 프로젝트가 될 거야. 세상이 뒤집힐 수도 있지.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렵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애써 머리로 분석하려 들지 말고 가슴, 그래 가슴으로 바라보라고! 인권 차원에서만 봐도 이건 아주 심각한 사건이거든. 자살이 사실은 자살이 아니었다는 것, 지금처럼 높은 자살률의 뒤편에 실은 음험한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게 접근을 해보자는 거지. 우리 자살문화연구센터의 첫번째 프로젝트로서 아주 의미있는 일이 되리라는 확신이 드는군.”
허교수가 웃자 새하얀 의치가 작위적으로 반짝였다. 치석과 니코틴의 흔적으로 더러워진 치아를 새것으로 전면 교체하는 시술이 대유행이었다. 나는 입술을 다문 채 미소지었다. 뭔가 고약한 데 얽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치밀어올랐지만 꿀꺽 삼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신희경, 45세, 비원여자고등학교의 책임교도관
우리 비원여자고등학교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요. 처음 내방하시는 분들은 많이들 놀라시죠. 우리 학교가 이렇게 경관이 수려한 곳에 위치해 있다는 걸 모르셨나봐요. 소녀들이 사는 집답게 아늑하고 오밀조밀하게 꾸며놓았다는 감탄도 많이 하십니다. 우리 비원학교는 2004년 여름 문을 열어 올해로 개교 18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민영으로서는 최초의 청소년 교화기관이죠. 아, 소년원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말아주세요. 지난 세기말인 1997년에 이미 소년원의 현판을 일반학교로 바꾸는 법령이 시행되었답니다. 소년원보다는 고등학교라는 용어가 아이들을 위해 여러모로 더 낫지 않겠어요?
우리 비원 출신들이 사회 곳곳에서 똑 부러지게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자랑스런 모습들은, 아마 각종 언론을 통해 많이 접하셨을 겁니다. 변호사도 있고 탤런트도 있고 또 보험여왕도 있지요. 그애들은 이곳 출신이라는 걸 감추지 않아요. 비원을 단순히 어릴 적에 거쳐간 학교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준 고마운 마음의 본향으로 여기고 있답니다. 인간이란 원래 연약한 영육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모든 것이 아직 미성숙하고 판단력도 부족한 어린 나이에 뭘 제대로 알까요? 몰라서 저지른 범죄는 개인의 죄가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책임입니다.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하나하나 맑고 착한 아이들이에요. 성인범에 비해 교화 가능성이 수십배는 더 높답니다.
아이들은 모두 열여섯살 이상 스무살 미만입니다. 고등학생 나이에 해당하는 여자아이들만 살고 있지요. 아시는 대로, 소년분류심사원에서 제7호 처분을 받은 뒤 이곳에 오게 됩니다. 초범은 보통 6호 처분을 받고, 7호는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른 경우예요. 처음부터 여기 오는 애들은, 그러니까 아무래도 좀 심한, 누굴 죽였다든지 하는. 아아, 그런 얘기는 그만두죠. 본성이 사악한 아이는 거의 없으니까요. 문제는 환경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본 제가 내린 결론으로는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이곳에 머무르는 기간은 대개 육개월에서 이년까지입니다. 그 이상 있는 아이들도 있고요. 기간은 저희가 자의대로 정하는 게 아니라 분류심사원에서 이곳에 보낼 때부터 지정해줍니다. 물론 재범의 우려가 높다거나, 사회로의 복귀가 조금 걱정스러운 경우에는 담당교사의 재량에 따라 교화기간을 연장할 수 있지요.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가기 싫다고, 여기에 더 있고 싶다고 우는 아이들도 퍽 많답니다. 그런 게 바로 가르치는 저희의 보람이지요.
자, 이제 학교 안을 둘러보시겠어요? 일반적인 고등학교와 다른 점은 거의 없답니다. 시설은 오히려 우리가 훨씬 고급스러워요. 교문의 동쪽에는 수업을 받는 학교동(棟)이, 서쪽에는 기숙사동(棟)이 있습니다. 가운데 건물은 실내수영장과 도서관이고요. 오백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강당도 있습니다. 교과수업은 주간 스물다섯 시간을 넘지 않습니다. 오후에는 네일아트나 헤어디자인, 보석감정 같은 실용 클래스를 열지요. 어차피 일반학교로 돌아가기보다는 사회에 곧바로 나가야 하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