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 소설
사라진 ‘아비’와 글쓰기의 기원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저서로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llauper@hananet.net
1. 가족로망스와 자기발견의 여정
근대 이후의 소설사에서 가족로망스(family romance)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기의식을 정립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유효한 틀이 되어왔다. 한 개인이 최초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장이 바로 가족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가족로망스야말로 인간의 삶을 다루는 소설장르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Freud)의 정의에 따르면 가족로망스는 자신이 부정하고 폄훼하는 친부모 대신 더 높은 지위를 지닌 다른 사람들로 부모를 대체하려는 신경증 환자들의 환상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부모와 집으로부터 뛰쳐나가려는 욕망의 기원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중요한 참조틀을 제공한다.
프로이트가 부모에게 강박된 자녀의 심리를 중심으로 가족로망스를 해석한다면, 린 헌트(Lynn Hunt)는 모든 가족로망스의 구도가 반드시 부모를 대체하거나, 부모의 자리를 메우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린 헌트 『프랑스혁명의 가족로망스』, 조한욱 옮김, 새물결 1999, 52~53면 참조).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고아라고 여기며, 낯선 곳에 홀로 내팽개쳐져서 자기 힘으로 살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 ‘아버지의 보호 없이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내세우는, 지극히 반가부장적인 장르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헌트의 지적은 공감할 만하다.
최근 소설의 흐름을 살펴보더라도, 가족을 다룬 많은 이야기들은 부모에 대한 뚜렷한 강박관념이나 열등의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존재를 규명하려는 강박의식으로 시작되는 스토리더라도, 아버지를 극복하거나 복원하는 길로 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부재를 당연시한다. 결국 그의 공허와 결핍을 채우는 것은 그 자신에 대한 연민과 애증이다. 탄생의 기원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아버지 대신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이 불안하고도 가슴 설레는 기록들은 이번 계절의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그 첫번째 이야기로 구효서의 「소금가마니」(『창작과비평』 2005년 봄호)를 주목해보자. 이 작품은 출생의 비밀을 지닌 주인공이 어머니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결말을 드러낸다. 아버지 부재의 현실과 고아의식을 발랄한 화법으로 포착한 김애란의 「사랑의 인사」(『문학사상』 2005년 3월호)가 주목되는 것은 구효서의 소설과 다른 세대적 층위에서 자기애의 서사가 성립되는 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다. 이들이 자아찾기의 일환으로 가족로망스에 접근한다면, 심윤경의 「토토로의 집」(『문학동네』 2005년 봄호)과 이기호의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문예중앙』 2005년 봄호)은 가족로망스의 구조를 이야기의 기원으로 새롭게 활용하는 소설의 사례로서 관심을 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게 될 박완서의 「거저나 마찬가지」(『문학과사회』 2005년 봄호)와 박민규의 「코리언 스탠더즈」(『문학수첩』 2005년 봄호)는 구체적인 자본주의 일상에서 집과 가족의 의미가 해석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작품이 세태풍자의 기억으로 호출하는 80년대의 이야기도 비교해서 살펴볼 만한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
2. 사라진 ‘아비’와 글쓰기의 기원
「소금가마니」는 근래 농밀한 서정성에 도달한 구효서(具孝書) 소설의 한 지점을 일러주는 수작이다. 동시대의 소설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주제의식과 실험적 형식문제에 늘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구효서의 전작들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내향적이고 서정적인 탐구방식은 희귀하게 다가온다. 「소금가마니」는 「이발소 거울」(『한국문학』 2004년 여름호), 「시계가 걸렸던 자리」(『현대문학』 2004년 4월호)와 주제가 연결되는 기억의 연작이라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시계가 걸렸던 자리」는 어머니의 죽음과 고향 이야기를 소재로 밀도높은 자기성찰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소금가마니」와 유사한 점이 많다.
「소금가마니」에서 기록적 복원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의 삶은 가부장제 사회 속의 전형적인 여성수난사를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여기서 어머니를 둘러싼 남성들의 형상이 부정적인 것은 당연한 설정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첫사랑으로 알려진 박성현은 6·25전쟁 때 처형당할 뻔한 어머니를 구출하긴 했으나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을 근본적으로 구원하지 못했으며, 아버지는 어머니의 첫사랑을 빌미로 평생 그녀를 구타하고 괴롭혔다. 부정적인 두 남성의 모습과 견준다면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성스럽고 인내심 많은 존경의 대상으로 신비화된다. 그녀는 온갖 수난을 스스로 견디고, 자식에 대한 헌신적 사랑으로 ‘집’을 지켜나간다. “어둠과 습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식을 사랑으로 지켜”낸 어머니는, “간수를 빼낸 새하얀 소금처럼 정화되어 꽃상여 안에 누워” 아흔일곱해의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만 한정해서 읽을 때 이 소설이 보여주는 인물 일대기는 다분히 신비화된 모성성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면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자식들에게는 헌신적인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가 왜 그토록 글을 읽고 쓰는 것에 집착했는지, 자신의 첫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가슴속에 갈무리했는지, 그리고 생부의 존재에 대해 왜 화자에게 말해주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녀의 삶은 인내와 침묵 속에서 철저히 장막에 가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여성은 남성 자아가 아버지 부재의 현실을 견디기 위한 통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에서 어머니의 삶으로 재현되는 역사적 기억들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신비스럽고 아득한 에피소드로 여겨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실제로 이 소설에서 설득력있는 것은 어머니의 삶보다는 그것을 들여다보는 주인공의 내면에 소용돌이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