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새로운 현실, 다른 리얼리즘

 

사유 · 정동 · 리얼리즘

촛불혁명기 한국소설의 분투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저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등이 있음. kiwookh@gmail.com

 

 

1. 사유와 정동

 

몇달간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조국사태’에서 자주 떠올린 것은 사유와 정동의 문제였다. 한국사회처럼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현실에서 제대로 사유하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실감하게 된 것이다. 사유와 정동의 요소가 2014년 세월호참사에서 2016~17년 촛불항쟁을 거쳐 지금에 이르는 우리 문학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황정은은 중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창비 2019)에서 어떤 특정한 의견과 논리를 생각 없이 되풀이할 때의 해악을 거론한다. 소설의 화자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등장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에 대해 “‘평범성’으로 번역된 banality는 (…) ‘평범성’보다는 ‘상투성’에 가까운 말인 듯하다”라고 평한다. 화자는 보수 신문의 어휘와 논조를 따라 말끝마다 “종북과 좌빨”을 들먹이는 아버지의 말에서 “아렌트가 묘사한 아이히만 식의 상투성”을 보고는, 그것이 “말하기, 생각하기, 공감하기의 무능성”이라고 지적한다.(219~21면) 조국정국에서 이런 ‘무사유’를 특징으로 하는 상투성은 화자의 아버지 같은 수구·보수 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진보 쪽의 ‘진영논리’도 이와 무관하달 수는 없다.

그런데 상투성에서 벗어난 사유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 앞에서 사유의 사전적인 정의—가령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등이 세상과 인간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두뇌활동이지만, 그것 자체로는 사유의 상투성이나 기계적인 조작을 면할 수 없다. 사유의 본질이 인공지능(AI)으로 대체 가능한 지적인 두뇌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인간, 과학기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동반하는, 철학적이고 시적인 것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차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최첨단 과학기술시대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력과 물질적인 힘이 엄청나게 비대해지기 때문에 이전 시대들보다 이런 사유가 더 절실히 요구된다.1

조국사태를 통해 드러난 언론의 자의성과 혼탁한 언어환경도 사유의 중요성을 돌아보게 한다. 언론개혁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것은 신문과 공영방송뿐 아니라 종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미디어에서 보도의 진위와 적절성을 일일이 점검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과 거짓을 가리지 않고 ‘아무말대잔치’를 일삼는 포퓰리즘적인 언론의 행태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을 비롯해 전지구적으로 만연하여 문명적인 병폐가 되고 있다. 개별 주체들이 사유와 진리에 깨어 있는 일이 더없이 중요해진 세상이 된 것이다.2

조국사태의 두드러진 면모는 정동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시민들 다수가 ‘정동적인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우리가 조국이다’라는 구호는 정치적 선택의 차원을 넘어선다. ‘조국지지’나 ‘조국수호’는 검찰의 과잉수사에 직면하여 내걸 수 있는 구호지만, ‘우리가 조국이다’는 그런 합리적인 차원 이전의, ‘몸’이 개입되는 구호다. 이런 정동적인 구호에는 즉각 화답하여 동참하든지 아니면 ‘나는 조국이 아니다’라는 몸의 반응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조국 전 장관이 사퇴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후자의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청년세대의 저항이 격렬했는데, 그것은 그의 공언과 달리 그와 가족의 실제 삶이 촛불정부가 내세운 평등·공정의 지표에 어긋날 뿐 아니라 청년세대 대다수의 현실과는 판이했기 때문이다.3

이 점에서 신구세대를 막론하고 자산·소득 불평등과 더불어 극단적으로 치닫는 자본의 수탈방식이 대다수 시민들을 정동적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싶다. 흔히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신자유주의의 무자비한 착취와 무한경쟁, 각자도생을 거론하지만, 그 비정한 현실의 핵심 요인은 노동을 지배하는 자본의 방식이 달라진 데서 비롯된다. 예전에는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의 재생산을 보장해주고 남아도는 노동자를 산업예비군으로 관리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재생산 없는 축적’, 즉 노동자들을 봉쇄/폐기처분하는 쪽으로 점차 바뀌고 있다. 잉여가치의 착취보다 지대(임대료)를 뽑아먹는 식의 ‘탈취에 의한 축적’과 거대 기업이 도시의 부동산을 사들임으로써 노동자들을 도시 밖으로 ‘축출’하는 형태도 이와 유사한 경우이다.4 이런 극단의 축적 방식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대다수 시민들이 봉쇄·폐기·축출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5

이 글은 촛불혁명기의 작가들이 이런 어려운 현실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몇몇 주목할 만한 소설들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문학이 사유의 거처라면 상투성에서 벗어나려는 분투는 불가피해진다. 특히 리얼리즘 소설은 현실인식과 재현을 중시하는 만큼이나 상투화의 위험이 더 크다. 따라서 상투성과의 대결은 더욱 관건적인데, 그 분투의 과정에서 정동적 요소에 눈길을 돌리는 것은 불가피하기도 하다. 먼저 이 시대 문학의 특징과 새로 제기된 리얼리즘 논의를 짚어보고, 황정은과 김세희의 몇몇 소설들을 중심으로 사유와 정동의 요소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리얼리즘 문학의 재등장

 

촛불혁명기 한국문학에서 여성작가들의 맹활약과 페미니즘은 이제 대세가 되었다. ‘대세’라고 한 것은 2016년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일이나 최근에 영화화된 조남주의 밀리언셀러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만을 염두에 둔 이야기는 아니다. 딱히 페미니즘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이전 세대와 달리 최근 여성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여성이 자기 삶의 주체이거나 주체가 되려는 과정이 기본값으로 주어진다. 이런 현상은 이 시기에 함께 부상한 퀴어문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이전 시기에는 박상영의 ‘재희’ 같은 당당한 여성인물이 출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근 주목받는 SF 등도 예외가 아니다. 김초엽과 박문영 등의 여성작가 소설을 제하고 현단계 SF를 실답게 논하기 힘들다. 이처럼 여성의 ‘주체되기’라는 기본값을 공유하되 소재와 접근방법, 감수성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고, 그것이 현재 한국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주된 원천이다. 이럴 수 있게 된 것은 20대에서 40대에 걸친 견실한 여성독자층이 든든히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주력이 어느새 여성 작가·독자들로 바뀐 데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문단내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새로운 페미니즘 물결이 한몫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이전의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다. 상당수 작가들이 2009년 용산참사와 2014년 세월호참사의 애도(60회를 넘긴 ‘304낭독회’ 포함)에 참여하면서, 사회적 약자·소수자들과 연대하는 경험을 가졌다. 그런 연대의 경험이 페미니즘운동과 결합되어 작가 개인의 윤리만이 아니라 작품적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 한강 권여선 정이현 황정은 조남주 조해진 김애란 백수린 최진영 김금희 최은미 최은영 김혜진 임솔아 김세희 등의 주목할 만한 단편·중편·(경)장편들이 쏟아져 나왔다.

용산참사에서 촛불혁명/페미니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여성작가들의 작품은 차츰 사회현실을 중시하고 페미니즘 미학과 정치를 결합하는 리얼리즘 쪽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여성작가의 리얼리즘 문학이 2000년대 이후 성행하던 다양한 반재현적 포스트모던 서사들—최근의 ‘후장사실주의’까지 포함해서—을 밀어내고 한국문학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음도 분명해진다. 문학사적으로 보자면 남성작가 중심의 1970~80년대 리얼리즘 문학에 이어 여성작가 주도의 리얼리즘 문학이 도래한 것이다. 앞선 리얼리즘이 4월혁명·광주항쟁·6월항쟁의 변혁적 열망 속에 자라났듯, 용산참사·세월호참사의 아픔을 딛고 촛불혁명/페미니즘을 일궈낸 반전의 역사 속에 리얼리즘이 재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때 제기되는 물음은 두 리얼리즘이 어떻게 연관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현재의 리얼리즘이 이전 시대의 리얼리즘에 비해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의 문제다. 연관된 두 물음에 대해 자신있는 답을 내놓을 능력은 없다. 대신 극심한 불평등 시대의 사실주의 문학 일반이 빠지기 쉬운 자연주의적 경향, 즉 불평등한 현실의 폭로나 핍진한 재현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이바지하기는커녕 세상의 기존질서를 강화하는 역설6을 극복한 수준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불평등이나 계급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설은 황정은의 「양의 미래」 「누가」 「상류엔 맹금류」(『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이다. 이 소설들은 앞서 언급한 자본의 새로운 축적 방식에 따른 노동자 봉쇄·폐기·축출의 양상과 그것이 노동자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수치와 분노, 죄책감—을 빼어나게 보여주는데, 특히 “불평등의 재현이 불평등의 ‘현실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방식”인지를 논하는 데는 「상류엔 맹금류」가 가장 적합할 것 같다.

소설의 1인칭 화자는 오래전에 남자친구 ‘제희’와 결혼할 마음이었으나 한 사건을 계기로 관계가 틀어져 헤어지고 만 사연을 들려준다. 화자는 제희가 부모를 모시고 가는 수목원 소풍에 동행하게 되는데, 더운 땡볕에서 점심도시락을 먹을 장소를 찾다가 궁여지책으로 비탈 아래 계곡의 물가로 내려가게 되었다. “직관적으로 그 장소가 싫었”(83면)던 화자는 계곡물에 몸을 씻고 마시는 제희 부모에 대한 역겨움 내지 혐오감을 숨길 수 없었다. 점심 후에 비탈길 위쪽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함께 ‘맹금류 축사’라고 적힌 안내판을 발견한 화자는 제희네 가족에게 “똥물이에요./저 물이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86면)라고 마치 보복하듯 말한다. 화자는 제희와 즉각 헤어지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이 둘의 관계에 치명타가 되었음을 감지한다.

이 소설은 계급/계층의 요소를 끌어들이되 어떤 해결책이나 전망을 제시하는 대신 대략 두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번째 질문의 맥락은 이렇다. 번듯하게 살던 제희 가족—누나 넷과 부모까지 총 7명—이 제희 어머니와 가까운 지인의 사기행각으로 거액의 빚을 뒤집어쓰게 되었을 때이다. 제희네 부모는 함께 죽는 것, 도망가는 것까지 포함해서 많은 고민을 한 끝에 고생을 하더라도 함께 살면서 빚을 갚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희네 집이 가난을 면치 못한 이유다. 이런 사연을 들은 화자는 그런 결정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한다. “제희네 부모님은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 자신들의 양심과 도덕에 따랐지만 딸들의 인생을 놓고 봤을 때는 부도덕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69~70면) 도망가서 새출발하는 것과 고생하면서 빚을 갚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옳은지도 하나의 질문이지만, 흥미로운 것은 화자의 ‘부도덕하다’는 판단이다. 제희 부모가 자신들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선택한 결정에 대해 ‘부도덕하다’고 느끼는 것은 도덕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화자 자신의 계급적인 편견이 그런 느낌을 유발한 것인가? 두번째 질문은 더 미묘하다.

 

이따금 생각해볼 때가 있다.

차라리 내가 제희네 부모님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흔쾌히 그 비탈에서 내려서서 계곡 바닥에 신나게 돗자리를 깔았다면 어땠을까. 그편이 모두에게 좋지는 않았을까. 그러는 게 옳지 않았을까.(87면)

 

화자가 이런 자문을 하게 된 것은 지금의 남편보다 제희에게 미련이 많기 때문이다.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 “어째서 제희가 아닌가./그럴 땐 버려졌다는 생각에 외로워진다. 제희와 제희네. 무뚝뚝해 보이고 다소간 지쳤지만, 상냥한 사람들에게”(87면)라고 생각할 정도다. 인용한 화자의 자문을 작품의 마지막 발언—“나는 그날의 나들이에 관해서는 할말이 많다고 생각해왔다./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이다”(88면)—과 연결해서 읽으면, 화자는 처음에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이 자문에는 숨은 그림처럼 또 하나의 질문이 깔려 있다. 문제의 장소를 화자가 ‘직관적으로’ 싫어한 것은 그 장소가 실제로 그만큼 역겨운 것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런 정동에 빠지게 한 것은 화자의 계급적인 감수성—가령 하층계급과 그 환경에 대한 혐오감—이나 계급을 초월한 듯한 방관자적인 태도 때문인가?

이런 물음들을 끝까지 따라가면 이 소설의 한복판에 여러층의 애매성이 놓여 있음을 발견한다. 가령 빚 문제를 놓고 제희 부모와 화자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가도 그렇지만, 화자가 제희와 결혼했을 경우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인가의 물음에 대해서도 확답하기 어렵다. 애매한 층위들을 경유하도록 유도하면서 물음을 던질 때, 작가가 이미 결론에 도달한 후에 질문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최종 결론 없이 묻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방식은 계몽적인 깨달음을 주거나 진실이 드러날 때의 반전 효과를 거두지만, 사유를 촉발함으로써 상투성을 돌파하는 데는 후자의 방식이 더 강력하다. 이 작품의 애매성은 최종적으로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독자는 공감할 수는 있되 아주 믿을 수는 없는 화자에 비해 자신은 얼마나 계급적 편견에서 벗어나 있는지, 계급이 인간관계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등을 묻게 된다. 요컨대 이 작품은 우리 삶의 기본적인 요소들—사랑과 가족과 계급—을 상투성에 매이지 않고 사유하기를 요구함으로써 불평등한 현실을 핍진하게 재현할수록 기존의 불평등한 질서가 강화되는 자연주의적 역설을 돌파하는 한 예를 보여준다.

 

 

3. 정동, ‘생생함’, 리얼리즘

 

최근 리얼리즘론에서 정동(affect)의 요소를 적극 사주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참신한 현실 재현도 반복하게 되면 생동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로운 감흥, 즉 기존의 재현체계에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정서나 감정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리얼리즘의 모순들』이라는 저서에서 리얼리즘의 대립적인 두 원천으로 ‘서사적 충동’(narrative impulse)과 ‘정동’을 꼽으면서 후자에 방점을 찍는 새로운 리얼리즘 개념을 제시한 것도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7 서구 리얼리즘의 역사를 냉철한 과학자처럼 관찰해온 제임슨은 이미 플로베르와 졸라의 시대부터 시작된 정동 혹은 ‘(시각적) 생생함의 충동’(scenic impulse)이 소설서사의 원칙들을 무너뜨려 리얼리즘은 결국 파편화되고 해체되고 말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는다.

제임슨이 정동의 잠재력을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의 구도에서 ‘이야기’는 이미 일어난 과거에 속하는 데 반해 ‘정동’은 과거-현재-미래의 선형적인 시간대와 차원을 달리하는 ‘영속적인 현재’(perpetual present)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당대의 포스트모던한 ‘영속적인 현재’는 “몸으로의 환원”(reduction to the body)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27~28면 참조) 요컨대 정동은 몸의 차원에서 느껴지는 강렬도(intensity)를 통해 ‘영속적인 현재’ 혹은 ‘생생한 현재’(scenic present)를 실현한다. 다분히 들뢰즈(G. Deleuze)의 정동 개념에 의거한 제임슨의 ‘새로운’ 리얼리즘론—일종의 리얼리즘 해체론—은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 문학론의 경향성을 대변하는 면이 있는 만큼 면밀한 논박이 필요하지만, 일단 그가 말하는 ‘현재’나 ‘몸’이 살아 있는 존재의 ‘진짜’ 몸과 시간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문학이라는 커먼즈(공유영역)는 작가와 독자를 포함한 당대 사람들의 ‘협동적 창조’를 통해서 생성되고 지속되는 세계인데, 제임슨이 상정하는 문학에는 그런 ‘협동적 창조’의 자리가 부재하다. 한편의 시는 검은 글자들에 대한 개별 독자의 (재)창조적인 반응으로서만 거기에 존재하지만—그런 과정이 없다면 시는 시가 아니라 그냥 검은 글자일 뿐이다—제임슨이 상정하는 문학은 그런 재창조 없이 그냥 주어지는 듯하다. 달리 말하면 제임슨의 ‘정동’ ‘생생함의 충동’ ‘영속적인 현재’ 같은 발상은 살아 있는 몸으로 반응하는 주체적인 독자보다는 몸-기계의 감각자료에 의해 작동하는 수동적인 독자 쪽으로 정향되어 있다. 제임슨은 정동에 의해 촉발되는 ‘생생함’과 구체적인 현재 속 인간의 살아 있음에서 나오는 실감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 실감을 위해서는 사회현실과 개개인의 삶의 맥락을 제시하는 서사가 필요한데, 그런 서사의 필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렇다고 작품에 정동을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수의 사람들이 정동적 주체가 되어가는 마당에 작가가 정동을 외면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고 어쩌면 직무태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동의 아나키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제임슨은 새로운 ‘생생함의 충동’이 벌이는 마지막 전투는 “정동적인 충동들을 제어하는 듯한 관점의 지배에 맞서는 것”(11면)이 되리라고 예측하는데, 리얼리즘의 입장에서는 서사적 ‘관점’(point of view)의 수호가 그만큼 중요한 임무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소설의 ‘관점’을 어떻게 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운용할지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이 시대의 현실에 걸맞은 서사적 ‘관점’이 무엇인지 항상 새롭게 물을 필요가 있는데, 이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사유다. 정동적인 충동에 깨어 있는 사유라야 새로운 현실에 부응하는 서사적 ‘관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늠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정동적 요소를 간을 맞추듯 적절히 사용하면, 상황이나 인물의 생생함을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복적인 서사로 말미암은 상투성이나 정치적 정답주의 등 서사의 도식성을 깨는 데도 효과적이다. 가령 「상류엔 맹금류」에서 제희가 카트에 비뚤비뚤하게 쌓인 짐 위로 고무줄을 당기다가 고리에 발목을 다치는 장면이 그렇다. “굵은 고무줄 끝에 수리 발톱처럼 생긴 금속 고리가 달려 있었는데 그게 어딘가에 잘못 걸렸다가 탁, 풀리면서 제희의 왼쪽, 그것도 안쪽 복사뼈를 때렸다. 조그만 돌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75면) 이후 제희가 소풍 내내 절뚝거렸을 때 독자들에게 그 소리와 멍과 절뚝거림으로 생생하게 전해졌을 정동은 기존의 상징 기능을 일부 담당하되 그 결이 다르다. 그 때림은 제희네 가족 내의 갈등과 하층계급에 가해지는 사회적 압박에 노출된 제희의 처지와 무관하지 않되 딱히 그런 상황의 상징은 아니다. 그럼에도 “조그만 돌이 쪼개지는 듯한” 야멸찬 때림은 작품 전체에 울림을 준다.

정동적 요소를 자연스럽되 특이한 방식으로 활용한 예로 김금희의 「세실리아」(『너무 한낮의 연애』, 문학동네 2016)에서 세실리아가 꼭 끼이는 터틀넥 안을 긁는 장면이 있다. 나중에는 너무 긁어서 “따갑다, 따갑다” 했고 그 모습을 지켜본 화자 정은은 “그러게 자꾸 긁더라, 얘, 피가 나니?”라고 반문하는데(94면), 가려움과 긁었을 때의 따가움이 물씬 전해진다. 화자 정은은 대학동기들의 송년회에서 ‘엉겅퀸’이라는 별명의 세실리아가 사실은 남자동기들에게 성폭력을 당했음을 알게 되어 현재는 유명한 설치미술가가 된 세실리아를 십수년 만에 만나는데, 이 장면이 없었다면 작품의 성격이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성폭력 방조자/피해자 간의 반성과 화해라는 ‘정치적 올바름’ 쪽의 구도로 기울었을 소설은 이 정동적 장면 덕분에 그런 상투성에서 훌쩍 벗어난 느낌이다.

 

 

4. 어떻게 살 것인가?

 

앞의 논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유는 인식론과 윤리학의 종합이자 삶의 구체성 속에서 작동된다. 그렇기에 살아 있는 한 개인이 현재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느끼는가의 문제뿐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까지 구체적으로 보여줄 때, 문학의 사유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가만한 나날』(민음사 2019)에 묶인 김세희의 소설들이 서술양식이나 어법에서 눈에 띄는 혁신과 파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적 삶의 한복판으로 바로 들어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단편소설 형식으로는 충분히 보여주지도 묻지도 못하는 것이 적잖다. 그렇지만 김세희는 형식의 한계 안에서도 직장과 집이라는 두 공간을 축으로 직장동료와 상사,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 가족과 세대와 노년의 문제까지 시야에 넣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을 차분하되 치밀한 방식으로 묻는다.

「가만한 나날」 「드림팀」 「감정 연습」에 등장하는 직장은 잘나가는 대기업과는 거리가 먼 열악한 중소기업체로 보이지만, 그런 직장에서의 삶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핍진한 사실주의 묘사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화자가 관찰자의 시점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 서기 때문이다.8 가령 「감정 연습」에서 두명의 인턴 중에 “3개월의 인턴 기간을 거쳐 한 사람을 채용한다는” 회사의 조건하에서 초점화자인 상미는 처음에는 “서로 싸울 이유도, 미워할 이유도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그를 꺾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 언젠가부터 상미는 실제로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233~34면) 이 정도에서 그치면 치열한 경쟁구도에서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승부가 자기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언질을 받은 후에도 상미는 “하루 종일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채 지내는 사람을 맹렬하게 증오한 나머지 오후가 되면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235면) 이렇게 사람을 이상한 정동으로 물들인 ‘감정 연습’을 시킨 것이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라면 그런 이상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또다른 ‘감정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요점이다.

「가만한 나날」은 「감정 연습」과 치열한 경쟁관계를 유도하는 체제적인 ‘감정 연습’ 메커니즘은 유사하지만 그 결과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 경우를 보여준다. 블로그 후기 마케팅이 주력인 광고대행사에 첫 출근을 하는 화자 경진은 함께 입사한 세명의 신입 가운데서 가장 열성적이다. 여기서도 실감을 높여주는 것은 화자가 직장생활에서 겪은 여러 감정—뿌듯함, 두려움, 혐오감, 죄책감, 부끄러움—을 자기 내부로부터 들려주는 당사자성이다.

 

그보다 더 열심히 일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완전히 자발적으로. 20대 중반까지는 돈을 지불하고 뭔가를 학습하고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런데 이젠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았고, 내 머리와 손끝을 써서 뭔가를 생산해 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쓸모 있는 존재라는 느낌. 조금만 더 시간을 할애해 정성을 기울이면 결과물이 더 좋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108면)

 

이만하면 체제 측의 ‘감정 연습’은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라서 차라리 ‘감정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공 자체보다도 그것을 이끈 주된 동인, 즉 “쓸모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다. 노동자들이 ‘폐기처분’되기도 하는 우리 시대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이 토로에는 ‘쓸모없는 존재’(쓰레기 같은 존재)를 가까스로 면한 사람의 성취감과 다행스러움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이런 뿌듯함이 아무런 보장이 되지 않는다. 블로그 후기 마케팅 업계가 수익을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직원들 모두가 일시에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과장과 허위가 판치는 온라인 언어생태계의 문제점을 섬뜩하게 드러낸 부분도 눈길을 끈다. 화자는 블로그 이웃의 쪽지를 통해 독성물질을 함유한 살균제 ‘뽀송이’를 자신(‘채털리 부인’)의 블로그에서 리뷰한 적이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여기서 ‘안방의 세월호’라 불리는 ‘가습기살균제 사건’를 연상시키는 ‘뽀송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자연주의의 역설을 감안하면, 엄청난 재난을 재현할 때 재난의 ‘현실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방식을 고민해야 하는데, 이 작품은 얼핏 재난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포착하는 듯하다. 가령 화자는 블로그 후기에 리뷰를 쓰면서 “이렇게 해도 괜찮나? 싶을 때도 있었다. 병원이 제시한 문구를 넣어 사각턱을 절제했다는 후기를 작성할 때였다. (…)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러나 곧 그 감각도 사라졌다”(106~107면)고 고백한다.

사실 1인칭 화자와 작가(작품)의 ‘관점’을 동일시하는 한, 이 작품은 ‘쓸모없는 존재’를 양산하고 세월호참사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불가피한 것으로 기정사실화할 우려가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의 ‘관점’과 화자의 ‘관점’은 미묘하게 다르다. 어쩌면 「상류엔 맹금류」의 화자가 그렇듯이 이 화자는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하지만 숨기기도 하는데, 독자는 타자에 대한 이 화자의 자기중심적인 반응을 통해서 그런 이중성을 엿보게 된다. 가령 입사동기인 예린이 직장에 적응하지 못해 퇴사할 무렵 예린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는 장면이 그렇다.

 

그녀는 기운 없는 모습으로, 자기는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이 일이 좋아지지가 않아요. 그때 나는 입가에 떠오르는 우월감을 최대한 억제하며, 마음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게 아니라 일을 못하는 거겠지. 그래서 쫓겨나는 거잖아.

그러고 나서 그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요? 저는 이 일이 진짜 적성에 잘 맞는 거 같은데.”

그녀는 진심으로 동조해 주었다.

“네, 경진 씨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녀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그녀를 쫓아가 정정하고 싶은 다급한 욕망에 휩싸였다. 그땐 몰랐는데, 저도 그렇게 적성에 맞았던 거 같진 않아요.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130면)

 

‘뽀송이’ 사건을 겪고 화자는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진심으로 반성하기보다 유리한 입장으로 비춰지고자 하는 욕망에 묶여 있다. 이를테면 ‘감정 교육’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되 바로 그런 당사자만이 줄 수 있는 실감이 느껴진다.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는 여러 주제를 건드리는 풍부한 텍스트이지만 그 중심에는 극에 달한 자본주의체제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이 놓여 있다. 결혼을 고려하고 있는 진아와 연승 커플은 연승의 선배이자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인 소중한의 점심 초대를 받고 서울 변두리에 있는 중한의 아파트를 방문해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그의 아내와 함께 넷이서 하루를 보낸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주제는 여럿이지만 “더 늦기 전에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12면)는 연승의 장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방문의 주된 목적도 얼마 전 유통업체 직장을 사직한 연승이 학창시절에 심취했던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보려고 먼저 이쪽 일을 하고 있는 선배 중한으로부터 실제적인 조언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한은 연승이 기대한 조언은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유로 이쪽 길을 택했으나 점점 자신의 선택을 세상에 원한을 품는 알리바이로 삼게 된 사람들에 대해”(47면) 말한다. 진아는 돌아오는 길에 연승의 어두운 얼굴빛을 보고는 “네가 세상에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염려하고 “네가 일그러져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일 거라고”(52면) 생각한다.

이 소설에는 현재의 자본주의체제를 살아가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현실적이고 앞가림을 잘하는”(11~12면) 진아처럼 체제의 요구에 자신을 맞추어 사는 방식이 있고 다른 하나는 소중한과 그 아내처럼 “똑같은 시스템 안에 있”(48면)되 체제의 논리나 요구에 일방적으로 맞추지는 않는 방식이다. 연승은 진아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다른 방식의 삶—가령 돈은 많이 못 벌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삶9—을 살려는 기대를 갖고 이전의 직장을 사직한 것이다.

이 작품이 소중한 부부의 삶을 하나의 바람직한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체제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고 수행자처럼 살고자 하는 소중한은 너무 ‘거룩’하고, 그런 방식에 아무런 불만이 없되 예측불허의 언행을 하는 부인은 너무 ‘푼수’처럼 보인다. 게다가 정동적 요소를 활용하여 이런 대안적인 삶의 방식이 빠지기 쉬운 허점을 즉각 환기하기도 한다. 가령 소중한이 아내의 종용에 못 이겨 “분만하려고 누워 있으면 지나가던 의사가 불쑥 거기에 손을 넣어 보”(33면)는 산부인과 의사의 행동을 언급한다든지, 아내가 죽염 섭취로 “생리혈이 맑아졌”(35면)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장면에서 부부의 삶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요컨대 작품은 소중한 부부의 삶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작품은 연승과 진아의 삶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데, 둘의 차이는 분별을 요한다. 진아는 소설의 인물들 중에 체제의 ‘감정 교육’이 가장 잘되어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가령 그녀는 소중한의 삶의 방식보다 소중한의 집이 서울 변두리에 있는 것이라든지 좁고 낡아서 물이 새는 것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그런 반응이 사실은 ‘감정 교육’의 효과일 수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에 비해 연승은 “수리 영역만 빼고 수능 성적이 전부 1등급이었어”(39면)라고 자랑할 정도로 엘리트의식이 강하지만 다른 한편 그런 특권의식을 모두 버려야 가능한 대안적 삶을 꿈꾸고 있기도 하다. 자신의 분열된 양면을 직시할 만큼 자기객관화가 안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인물 중 누구에게도 작가는 전적인 공감을 표하지 않는데, 그 때문에 독자는 자기 스스로 누구의 삶이 나은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네 사람의 현재적 삶을 놓고 어느 쪽이 상대적으로 더 나은지를 가늠해볼 수도 있지만 꼭 그중에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덜 거룩한 소중한과 덜 푼수인 그의 부인, 좀더 객관화가 된 연승, ‘감정 교육’을 약간이라도 더 탈피한 진아가 되는 길이 어떤 것인지 사유할 때만이 “세상에 원한을 품지 않을” 확률은 높아진다. 그리고 이런 사유의 훈련을 통해서만이 말기에 다다른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과 자아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의심해볼 수 있을 만큼 발본적이되, 구체적인 현실에서 어떤 삶이 더 나은지를 비평적으로 가려보는 것이 문학적 사유라면 김세희의 이 작품은 단편 형식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게 그런 사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제껏 사유와 정동을 화두 삼아 촛불혁명기의 소설문학을 살펴보았다. 글을 끝내면서 보완의 의미로 사유와 정동의 관계에 대해서만 한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조국사태를 통해 드러났듯, 우리는 개인적 삶을 포함하여 사회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정동의 작용이 매우 활발해진 현실을 맞이했다. 이런 새로운 현실에서 정동의 아나키즘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유와 정동이 어떤 관계인가를 묻는 것이 요긴해진다. 사유와 정동이 본질적으로 대립적이거나 이율배반적인 것이라면 사유가 정동의 작용을 차단하거나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사유가 정동의 작용을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설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그게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반면 정동마저 통합하는 사유가 있다면 그런 사유야말로 어떤 상투성에 매이지 않으면서 정동의 아니키즘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따져보면 김수영이 시작(詩作)에 대해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할 때의 사유는 이미 정동이 내재된 사유라는 생각이 든다.

 

 

  1.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록의 서두에서 “걱정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시대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생각을 일으키는 점은 우리가 아직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강조는 원문)라고 근대인의 ‘무사유’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이 발언에는 서구 형이상학적 사상체계 일반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Martin Heidegger, What Is Called Thinking?, tr. J. Glenn Gray, Harper Perennial 1976, 4면. 이 발언을 포함하여 하이데거의 기술 시대론과 사유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백낙청 「문명의 대전환과 종교의 역할」,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361~62면 참조.
  2. 구글(유튜브),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같은 거대 테크 기업과 소셜미디어가 ‘사색 가능성’을 파괴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프랭클린 포어 『생각을 빼앗긴 세계: 거대 테크 기업들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가』(이승연·박상현 옮김, 반비 2019) 참조. 진실이 실종된 트럼프 시대의 언어환경에 대해서는 미치코 가쿠타니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김영선 옮김, 돌베개 2019) 참조. 이 책의 해제에서 정희진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진실의 실종’이라는 이유로 비판”하는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음을 밝히면서 “진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 모든 담론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의 ‘올바름’이 아니라 ‘효과’다”(197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혼탁한 언어환경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지 않거니와 유무를 벗어난 경지의 ‘진리’와 해체 가능한 ‘진실’의 차이를 변별하지 않은 채, 해체론적 진리/진실관을 되풀이한다는 문제가 있다.
  3. 그렇다고 ‘386세대’를 불평등의 원인 제공자로, 청년세대를 그 ‘희생자’로 부각하는 이철승의 ‘불평등 세대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솔깃한 대목이 적지 않으나 불평등의 복합적 원인을 끝까지 규명하기보다 세대론적 통념을 강화한다는 느낌이다.(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누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었는가』, 문학과지성사 2019, 14~21면 참조) 이런 가해자-피해자 모델과는 달리 장석준의 ‘세대 정치’는 설득력이 있다. 기후변화와 성장주의의 위기 앞에서 “구세대가 이어온 맹목의 질주에 새 세대도 끼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구세대의 ‘전향’을 요구하는” 것이 진짜 ‘세대 정치’라는 것이다. 장석준 「진짜 세대 정치」, 한겨레 2019.10.18.
  4. ‘재생산 없는 축척’(accumulation without reproduction)에 대해서는 Lorenzo Veracini, “Containment, Elimination, Endogeneity: Settler Colonialism in the Global Present,” Rethinking Marxism (2019.4), ‘탈취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에 대해서는 David Harvey, New Imperial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축출’(expulsion)에 대해서는 Saskia Sassen, “ The City: A Collective Good?,” Brown Journal of World Affairs 23 : 2 (Spring/Summer 2017) 각각 참조.
  5. 이런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복지 강화’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데, ‘보편적 기본소득’이 그에 값한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이번호에 수록된 존 란체스터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 참조. 현재 경기도가 추진하는 연 1백만원의 보편적 기본소득안은 초보 단계에 불과하지만 유의미한 시도라고 본다.
  6. 가령 황정아가 묘사한 다음과 같은 경향이다. “상식을 벗어난 극심한 불평등을 폭로하는 일은 그것을 바로잡자는 호소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거의 초월적이며 존재론적인 질서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 불평등이 가시화를 통해 스스로를 강화할 수도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불평등의 가시화, 또는 불평등의 재현이 불평등의 ‘현실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방식을 고민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불평등의 재현과 ‘리얼리즘’」, 『창작과비평』 2019년 가을호 23~24면.
  7. 제임슨의 이런 입장은 루카치가 「서사냐 묘사냐?」(Describe or Narrate?)에서 졸라와 플로베르의 묘사 중심의 소설을 똘스또이와 발자끄의 서사 중심의 소설과 대비시켜 비판한 리얼리즘론을 뒤집어놓은 꼴이다. Fredric Jameson, The Antinomies of Realism, London: Verso 2013, 1~44면 참조.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제임슨은 ‘리얼리즘’과 ‘사실주의’를 구분하지 않는 서양학계의 관행을 따르는 듯하다. 양자를 구분한다면 책 제목은 ‘사실주의의 모순들’이 더 정확할 것이다. 루카치의 글은 Georg Lukács, Writer and Critic: and Other Essays (New York: Grosset & Dunlap 1971)에 수록됨.
  8.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2019)에서 느껴지는 톡톡 튀는 생동감도 리얼하게 묘사된 직장이라는 환경적 요인과 작가 특유의 밝은 감성뿐 아니라, 당사자성에서 비롯되는 실감이 크게 작용한 덕분으로 보인다.
  9. 이 소설을 연승의 ‘소확행’(작고 확실한 행복) 시도가 좌절된 것으로 보는 한영인의 해석은 연승에 관한 한 설득력이 있으나 소중한 부부를 ‘소확행’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보는 데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그렇게 ‘소확행’ 개념으로 작품 전체를 감싸면 체제의 요구와 다른 대안적 삶에 대한 탐구의 지평은 이 작품에서 사라지게 된다. “자신을 만족시켜줄 ‘작고 확실한 대상’”을 스스로 찾고 “내 삶에 있어 ‘적절한 욕망’의 크기와 형태가 무엇인지를 거듭 묻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예전의 ‘소시민’ 개념처럼 ‘소확행’에 깔려 있는 체제순응의 측면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한영인 「‘뉴노멀’ 시대의 소설」, 『창작과비평』 2019년 가을호 302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