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2
사회적 상상력과 상상력의 사회학
2000년대 젊은 소설을 보는 한 시각
진정석 陳正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더니즘의 재인식」 「길 위의 소설, 소설의 길」 「민중적 주체성의 복원을 위한 도정」 등이 있음. jjsssj@hanmail.net
1. 사회적 상상력의 귀환?
2000년대의 젊은 소설가들에게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사회적 상상력의 편린이 명시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연대기적 단순화의 폭력을 감수하고 말할 때, 그들에게는 1980년대 문학이 스스로 부과했던 역사적 책무와 계몽적 포즈는 물론, 1990년대 문학에 지배적인 자아의 이상화나 개인주의에 대한 주장도 별로 없다. 역시 익숙한 전통적 이분법에 기댄다면, 이들은 ‘현실 반영’이나 ‘전형의 창조’라는 리얼리즘적 요청에 무심할 뿐 아니라, ‘미적 자율성’과 ‘전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모더니즘적 실험에 전념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들은 애당초 그런 “환멸과 저항의 전선을 설정하지 않는” “무중력 공간”1의 아이들이며, “자신의 현실적·정신적 무력함을 일종의 운명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빈곤하고 왜소한 주체”2들이다.
물론 이런 비평적 호명은 어느정도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을 적극적으로 의미화하기 위한 전략적 과장이기도 하다. 주류의 단선적 교체라는 고질에서 벗어나 작가들의 세대, 경향, 화법 등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다양한 층위와 두께를 가지게 된 것이 2000년대 문학의 실상에 좀더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속이 아닌 단절의 측면에 주목해 새로운 변화의 조짐과 징후를 예감해볼 수는 있다. 이때 한가지 뚜렷한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적 상상력의 퇴조 현상일 것이다. 확실히 강영숙 김애란 김윤영 김중혁 박민규 박형서 백가흠 손홍규 윤성희 이기호 천운영 편혜영 한유주 등 2000년대에 접어들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작가들 대다수는 보편적 의지의 모색보다 개인적 실존의 탐색에 전념하고, 이념적 지향보다 문화적 향유를 중시하며, 현실의 탐구보다 유희적 상상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상은 현실의 결핍을 보상하는 문화적 장치이며, 사회적 상상력의 결여 역시 사회적으로 결정된 문화적 징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특정 세대의 문학에 사회적 상상력의 결여가 집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 상상의 존재방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실적 조건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주요 문예지들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귀환’이나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또는 ‘탈주체론을 넘어서’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이라는 주제로 연이어 기획특집3을 마련한 것을 보면, 2000년대 문학에서 철지난 유행으로 치부되던 사회정치적 상상력이 조금씩 복원되고 있거나, 적어도 그런 관점에서 동시대 문학을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점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6·15시대론’의 관점에서 2000년대 한국문학을 분석한 한기욱(韓基煜)의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4는 정치와 문학, 사회적 상상력과 상상력의 사회학에 연관된 문제를 검토하는 데 유익한 논점을 제공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2000년대 문학의 기점에 해당하는 역사상의 계기”로 1997년 IMF사태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거론하고, “남녘 사람의 일상생활에 직격탄을 날린” 전자보다 “한반도 주민 전체의 장래에 더 결정적인 사건”인 후자가 더욱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파악한다. 한기욱에 따르면 6·15선언은 한반도 분단극복과정의 한 전환점일 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야기한 “2000년대 문학의 기점”이자 “최종심급”이기도 하다. 그는 소설공간의 확장과 소재의 다변화, 상상력의 변화 등 2000년대 문학의 특질들이 6·15 경험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가정하고, ‘경계넘기’라는 분석틀을 폭넓게 활용하면서 2000년대 문학의 현장에 접근한다. 기본적인 취지와 방향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좀더 진전된 토론을 위해 몇가지 논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보기로 한다.
먼저, ‘6·15시대론’에 내포된 현실인식의 타당성 문제이다. 한 논평자의 지적처럼 한기욱이 IMF와 6·15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설정”5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에 좀더 규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IMF는 아닌가?’라는 상식적인 반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분단체제론과 그에 이어진 ‘6·15시대론’은 한반도 전체를 분석의 지평에 담는 포괄적 비전이지만, 남한 주민의 생활실감에는 IMF위기 이후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방면에서 벌어진 엄청난 변화가 훨씬 더 크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한사회의 미래와 한반도의 운명을 별개로 치부하는 것은 일종의 허위의식이지만, 그런 일그러진 의식 역시 분단체제에 강요당한 정신적·문화적 효과이기도 하다. ‘6·15시대론’이 이론적 정교함과 대중적 설득력을 좀더 높이기 위해서는 분단체제에 대한 개념적 인식과 분단현실에 대한 일상적 실감의 낙차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둘째, ‘6·15시대론’의 문학적 적용 가능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시대적 인식의 타당성이 문학적 분석틀로서의 효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6·15시대론’이 전제하는 ‘6·15시대’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보는 하나의 관점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이념이기도 하다. 때문에 “6·15시대의 관점”에서 2000년대 문학에 접근하는 것은 6·15를 하나의 “최종심급”으로 전제하고 그 기준에 적합한 경향과 작품을 선별하는 연역적 독해가 되기 쉬우며, 6·15와는 다른 맥락에서 개별 텍스트들이 달성한 인식적 가치와 상상적 모험을 외면할 가능성이 크다. ‘민족문학’ 또는 ‘분단체제의 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이라는 총론적 규정이 개별적인 문학작품을 읽어내는 데 일종의
- 이광호 「혼종적 글쓰기, 혹은 무중력 공간의 탄생」,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문학과지성사 2006, 101면. ↩
- 김영찬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비판적 단상」,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73면. ↩
- 「사회학적 상상력의 귀환」, 『문예중앙』 2006년 봄호;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탈주체론을 넘어서」, 『실천문학』 2006년 여름호;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 『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 ↩
- 한기욱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
- 홍기돈 「경계와 윤리, 그리고 포월」,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36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