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살아 있는 역사와 좋은 시의 언어
신동엽론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평론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21세기 오감도(烏瞰圖)」 「분열하는 감각 너머의 리얼리티」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1. 시의 눈동자
평범하거나 좋지 않은 시에 ‘하늘’이나 ‘강물’이 나오면, 감당하지 못할 존재와 세월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감상적으로 누설하는 형식으로 이어지기가 쉽다. 또한 이런 형식들에 대한 반감을 알게 모르게 훈련하다보면, 하늘이나 강물이 나오는 작품을 다르게 보는 일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세련된 것들을 수용하는 데도 훈련이 필요하지만 무언가를 세련되지 않다고 여기던 사고에서 벗어나 달리 보는 일에도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 신동엽(申東曄, 1930~69)의 시에 나오는 하늘과 강물 또한 다르지 않다. 이 시어가 품은 조건과 맥락을 충분히 들여다보지 않을 때 그것을 의미가 굳어버린 상징어처럼 읽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실제로 한 평자는 저 단어들이 용해시키고 있는 복잡다단한 감정과 꿈, 그리고 피로를 읽어주지 않은 채 ‘막연한 몇개의 비유’라는 말이나 ‘무의지의 비유’ 같은 말로 신동엽의 시를 비판하기도 했다.1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동엽의 시를 실패한 비유의 관점으로 설명하다보면 그 설명하는 언어가 실패한 비유처럼 뻔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평범한 비유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굳은 결기와 같은 힘은 물론이거니와 읽는 이의 행동을 추동하는 감동을 주는 시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신동엽의 대표시로 꼽히는 「껍데기는 가라」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같은 시는 분명 그런 부류일 게다. 이런 작품들을 만날 때 우리는 신동엽의 시를 통해 단단한 기운을 충전받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는 신동엽의 시가 확보한 독특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저 유명한 하늘을 보는 시선을 말하기 위해서는 사실 돌아갈 길이 멀다. 우선은 그의 시에 눈동자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보자.
너는 말이 없고,d
귀가 없고, 봄〔視〕도 없이
다만 억척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呱呱)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눈동자」 부분2
빛과 눈동자 모두 신동엽의 시에서는 중요한 시어들이다. 이들이 출현하는 곳에 시인의 특별한 인식이 자리하며 또한 시를 발동시킨 삶의 현장이 그려진다. 두개의 중요한 시어가 결합된 「빛나는 눈동자」는 장엄한 기운마저 맴도는 작품이다. 어떤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위엄을 지키는 저 ‘빛나는 눈동자’는 신동엽의 시세계 전반을 가로지르는 시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다른 시선의 위용일까. 그것은 “봄〔視〕도 없이” 걸어간다. 이는 일차적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평범한 눈과 다른 빛을 내고 있다는 의미일 테지만 그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는 그 눈동자와 눈빛을 주고받는 시선이 없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많은 눈들은 저 눈동자의 빛과 시선을 교환하지 못한다(“너를 알아보는 사람은/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러기 때문인지 눈동자는 세기의 대합실에서 그 빛을 알아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신동엽 시의 특별한 시선은 아직 현실화되지 못한 어떤 흐름을 감지하며 저 막막한 기다림 속에서 출발한다.
시의 후반부에 가면 ‘빛나는 눈동자’에 몇개의 이미지가 덧붙는데, 그때 우리는 ‘정신의 눈’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그것이 ‘이승을 뚫어버린 인간정신미(美)의 지고(至高)한 빛’을 발한다는 말과도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정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면 다소 의심스러운 구석이 생긴다. 빛이 초월성의 이미지로 자주 사용되는 점까지 고려하면 빛나는 정신의 눈은 마치 범인들에게는 차단된 어떤 초월적 진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전이 있다. 사실 저 눈빛을 사람들이 잘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한없이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 사람보다 더 낮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신동엽이 자신의 단상을 적은 산문의 일부이다.
人間의 座席은 非美·非眞·非善이다. 藝術과 宗敎는 人間을 上部로 이끌어 올리려는 길이 아니다.
下野의 짐승이나 꽃에게로 내려가려는 안타깝고도 凄絶한 몸부림이다.3
이 낮은 곳으로의 지향은 다른 산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훌륭한 시인을 설명하던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훌륭한 詩人이란 그 사고 속에 가로막힌 장벽이 없는 精神人을 말한다. 그는 夕刊에서 읽은 세계의 표정이나 社會面 기사를 호흡하되 목구멍으로가 아니라 가슴·아랫배, 더 깊숙이 내려가서 발끝으로까지 빨아들였다가 그 가운데서 연민과 기쁨과 진실을 읽고 또 노래한다.4
인간의 자리가 “非美·非眞·非善”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그것들에 이를 수 없다는 회의로 빚어진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진선미라고 불리는 것들이 차지한 자리가 인간들의 생생하고 가치있는 삶에 비해 비좁을 수 있다는 말이며 동시에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보기에 진선미를 창조하려는 예술은 의미가 이미 매겨진 자리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의 체계로부터 배정받지 못한 자리까지 내려가야 한다. 거기에는 인간적 의미가 미처 포섭하지 못한 생명력이 짐승의 모습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