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 ‘닫힌 미래’와 싸우다
삶다움의 가능성을 믿는 시
최근의 시가 전망을 그리는 방식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눈먼 자들의 귀 열기」 「나는 거기에 있지 않다」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1. 확인되지 않는 삶?
제주시 탑동에 위치한 미술관 ‘아라리오 뮤지엄’에 입장한 관람객이라면 누구나 코오헤이 나와(名和晃平)의 ‘픽셀 디어’(PixCell Deer) 시리즈 중 하나인 「디어 패밀리」(Deer family, 2014, 혼합재료)를 만날 수 있다. 거리를 두고 선 관람객에게 이 작품은 유리구슬로 이루어진 다섯개의 사슴 조형물로 보인다. 조명 아래에 올곧은 자세로 선 다섯마리의 유리 사슴은, 2000년대 초반까지는 영화관으로 사용되었다가 그 주변 상권이 침체되자 한동안 방치되었던 공간을 개조하여 마련한 미술관의 허름한 벽면과는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반짝인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유리구슬이 실은 박제된 사슴을 뒤덮고 있는 렌즈에 불과하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순진한 유리 사슴 가족이 ‘박제가 되어버린’ 몸으로 미술관 내부에 일렬로 서 있을 때, 관람객은 그들 몸을 뒤덮은 화려한 유리구슬 장식으로 인해 그들의 끔찍한 운명을 감히 상상하지 못하고 그 곁을 지나쳐버리거나, 역으로 아름다운 장식에 이끌려 다가갔다가 표면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코오헤이 나와가 조각 연작의 타이틀로 내건 ‘픽셀’(PixCell)은 “디지털 영상에서 화상의 정밀도를 나타내는 픽셀(pixel)”과 “생물학적 세포를 일컫는 셀(cell)의 합성어”1)이다. 박제된 동물 본연의 무게, 냄새, 색을 이루는 ‘셀’은 그것을 뒤덮은 유리구슬로 인해 왜곡되고 굴절되면서 관람객에게 대상을 정확히 인식하는 일의 어려움을 전한다. 작가가 ‘픽셀’(pixel)이란 개념을 굳이 거론한 배면에는, 디지털 매체와 불가분한 시대의 특징 중 하나로 이른바 ‘진짜’ 현실을 가려내야만 하는 상황의 빈번한 발생과 그에 따라 존재보다 앞서는 인식의 규정력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그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유리구슬로 가려져 있다 한들, 박제된 사슴의 현실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슴 박제는 최근의 시를 다루는 비평의 태도를 재고할 단서를 제공한다. 가령, 엄연히 사슴이 ‘있는’ 정황에서 유리구슬 이면의 현실을 비어 있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는지, 어쩌면 그렇게 함으로써 이면의 현실을 ‘박제’로 방치해버리진 않았는지.
평론가 이광호(李光鎬)는 2010년 이후에 발표된 시편들이 “인식될 수 있는 저항과 비판의 논리”로 한정되지 않는 “비결정의 가능성의 영역”에서 상상력을 개화하므로, “체제 안에 소속되지 않는 시간”을 사는 “비성년”들의 “놀이”가 시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성년’이 아닌 자들이 선보이는 놀이의 순간은 “체제 안에 소속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시적인 언어로만 발설되는 미지의 언어”로 이루어지므로, 비평가가 다룬 작품들에서 삶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는 시적주체가 체제의 한가운데 개입해 들어가 능동적으로 구사했던 미학적 전략을 오히려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여기는 것에 가깝다.2)
어쩌면 시는 유리구슬을 둘러야만 겨우 설 수 있는 사슴과 같이, 삶을 쉽사리 ‘확인’할 수 없는 미학적인 형식을 다소 장착해야만 하는 장르인지도 모른다. 말의 자질에 예민하기에 어떤 유리구슬을 택할지 더욱 치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란 얘기다. 하지만 시를 통해 드러나는 ‘시적인 것’의 발견이란 결국 삶의 한가운데서 이뤄지기에 (시인이 시를 어떤 의도로 썼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시는 현실의 세목을 전할 말에 파장을 일으키면서 삶을 구성하는 역할을 짊어지기도 한다. 시에 붙여진 ‘확인되지 않는 삶’이란 표현에 유독 마음이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시에 드러나는 시적주체가 주로 무기력하고 왜소하다고 말하는 비평에서는 실제 ‘삶 이하의 삶’을 사는 이들, ‘삶다움’이 보장되지 않는 시스템에 묶여 내일을 내다볼 수 없다고 기정사실화된 이들이 다뤄져왔기 때문이다.3)
하지만 삶다움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의 안간힘은 왜 삶이 아닐까. 오히려 최근의 시는 ‘삶 이하의 삶’ ‘확인되지 않는 삶’을 다른 시선으로 조명하여 그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간곡하게 말하는 방식으로 입체적인 삶의 국면을 작품 안에 들인다. 단순히 현실이 새기는 고통에 압사당하는 주체가 자기연민을 안전하게 전시할 수 있는 폐쇄적인 장으로서가 아니라, 빠져나갈 탈출구가 없다고 강요된 시스템 내부에서 주어진 ‘지금—여기’를 감당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바로 그 자리에서 돌파구를 마련해가는 몸짓을 취하면서. 이는 2010년대 이후에 씌어진 시들이 이른바 ‘미래파 논쟁’에서 언급됐던 시편들과 같이 미학적인 전략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통해 삶을 증명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삶’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입체성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삶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장소 역시도 삶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 문학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비평은 좀더 사려깊은 시선으로 살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코오헤이 나와의 작품은 유리구슬을 미적 전략으로 삼아 박제된 사슴의 상황을 폭로함으로써 사슴이 놓인 미술관 전체 풍경을 다시 보게 만든다.4) 이때 유리구슬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질문하는 렌즈로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시에서 활용되는 미학적인 형식은 바깥에 대한 상상이 가로막힌 현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도록 이끌고 종국에는 가려졌던 삶의 다른 면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에게 새로운 길을 능동적으로 마련해가게 한다. 최근 시의 경우엔 시적주체가 보고 있는 바를 다시 봄으로써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방식(황인찬, 임솔아의 시)이나, 은유로 미처 전달되지 못하는 진실을 은유로 전달해야 하는 한계 상황 속에서 토대의 전환을 촉구하는 방식(정한아, 전문영의 시)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이는 이중의 구도를 형성해서 현실의 한계를 노출시키고, 바로 그로부터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전략을 최근의 시가 활용한다는 얘기도 된다. ‘확인되지 않는 삶’ 역시 삶으로 살피는 문학의 길 위의 숱한 웅얼거림을 단지 응석으로 넘겨짚지 않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이들 시가 타진하는 진동에 좀더 적극적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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