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삶의 비극과 시의 축복

장철문 시집 『산벚나무의 저녁』, 창비 2003

 

 

박영근 朴永根

시인

 

 

삶의 불행에 대한 나의 예민한 자의식 탓인가, 장철문(張喆文) 시집 『산벚나무의 저녁』이 많은 지면을 들여 배려하고 있는 볕바른 시들을 나는 애써 비껴 그의 시 「기억의 프로펠러」를 되풀이해서 읽는다. 비행의 몸체를 잃고, 먼지 속에 몸을 누인 프로펠러. 그리고,

 

하늘 귀퉁이만 비쳐도

기억의 광기로 씩씩거리며 헐떡이며

허물을 벗는 프로펠러

떨어져나온 엔진의 기억을

다 소진하지 못한,

식어버린 엔진의 미련에

헐떡이는

위험천만한 프로펠러

 

시인은 시의 다른 부분에서 “한적한 마을의/나무와 지붕을 날리고/사람을 다치고/소와 닭들을 울부짖게 하는 프로펠러”라고 진술하고 있거니와, 비상의 공간인 하늘과 힘의 중심체인 엔진이 무슨 일로 말미암아 그 긍정적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고 도리어 위험천만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 주체는 모호하지만 과거의 어떤 비상의 체험이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광기어린 사건으로 시인의 내부에 찍혀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현재의 삶의 심리적 공간을 이루어 시인의 의식을 사로잡고 위태롭게 하고 있는 정황일 것이다.

장철문은 첫시집 『바람의 서쪽』(1998)에 이어 이 시집에서도 여전히 그 기억의 구체적 내용을 토로하는 것을 몹시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광기’가 역설적으로 시사하는 바, 억압되어 있는 의식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어떤 절박한 사정을 그 구체적 형상과 서사로부터 결락시키고 있는 것인가.

「석양에 바나나꽃을 보다」는 시가 드러내는 비극적 정황에 있어서는 「기억의 프로펠러」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삶과 대면하는 태도로 볼 때는 전자의 경우가 좀더 적극적이고 명료하게 다가온다. 삶의 정면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겠다는 것, 혹은 그 정면으로 육박해 들어가서 삶의 진면목을 보겠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서늘하게 떨리는 일인가.

 

커다란 자줏빛 꽃이 진다

너저분한 속내를 다 드러내며

켜켜이 떨어져서는

먼지 속에 뒹군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다

개미떼가 몰려와

떨어진 꽃잎을 물어뜯는다

바라볼 수밖에는 없다,

이 속수무책의

외로운 충만을.

잘 벼려진 석양에 베여

또 한 잎 떨어진다

 

돌아갈 수 없다

 

산벚나무시에 나타나는 꽃의 형상과 그것이 처한 정황이 가리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화자는 그 앞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는 없는 것인가. 그러니까 삶의 본디 모습이란 저렇듯 누추하고 참혹한 것인가. 그 삶의 진상을 보아버린 자의 마음을 동결하고 있는 무력감과 공포,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을 나는 거기서 보거니와, 그 자각이 시를 읽는 나 또한 무엇 하나에도 의지할 곳 없는 지극히 외로운 존재로 되게 한다. 그 위로 떨어지는, 석양빛에 물든 꽃잎 한 장.무(無)로 돌아가는 육신의 마지막 자취일 것이다. 그런데 절박하게 울려오는 한마디 “돌아갈 수 없다.” 어디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인가. 실상을 다 보아버린 자에게 지난날의 ‘나’란 이미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장철문이 미얀마 절집의 수행생활에서 얻은 몇편의 주목할 만한 시 「저녁때 차를 끓이다」 「집」 「마술」 등을 훌쩍 넘긴다.

『산벚나무의 저녁』에 실려 있는 상당수의 시들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시들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놓여 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세계의 서로 다른 성격이 지나칠 만큼 이질적이어서 한 시인의 시적 공간으로 받아들이기가 곤혹스러울 정도이다. 갈등과 누추함으로 비틀려 있는 세계와, 자연적 순환 속에서 모든 관계가 그지없이 화해롭게 진행되는 또다른 세계의 마주침이야말로 장철문 시집의 유다른 특징일 것이다. 그러한 극적인 관계는 그러나 그의 시집에서 상호 이질적인 마주침으로 불편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존의 영역을 이루어 새로운 결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르게 말하면 갈등은 그것이 아무리 가파르다 하더라도 치유를 향해 앙상한 몸을 내미는 법이 아닌가. 그것은 생의 본능일 것이다.

「산벚나무의 저녁」에서 우리는 시간의 경계를 훨씬 뛰어넘어 근대 이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의 시간대와 공간, 그리고 빼어나게 포착된 생활과 풍속의 한 진경을 만나게 된다. ‘저물어가는 골짜기’ ‘외딴집’ ‘삽짝 없는 돌담 한켠’에 환하게 피어 있는 ‘산벚꽃’ ‘삐그덕거리는 널빤지 밑이 휑한 뒷간’ 등은 시에서 전개되는 해학적 서사의 배경이자 그 소도구들이다.

 

손주놈이 뽀르르 나와 마당 가운데서 엉덩이를 깐다. 득달같이 달려온 누렁이가, 땅에 떨어질세라 가래똥을 널름널름 받아먹는다. 누렁이는 다시 산벚나무 우듬지를 향해 들린 똥꼬를 찰지게 핥는다. 손주놈이 마루로 올라서자 내게로 달려온 녀석이 앞가슴으로 뛰어오른다. 주춤주춤 물러서는 꼴을 까르르 까르르 웃던 손주놈이 내려와 녀석의 목덜미를 쓴다. 녀석은 꼬리를 상모같이 흔들며 긴 혓바닥으로 손주놈의 턱을 바투 핥는다. 저물어가는 골짜기 산벚꽃이 희다.

 

근대적 관념과 생활에 비추어볼 때 이 시의 서사는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다. ‘똥’을 생활의 청결과 위생의 대립물로 이해하는 문명인들에게 손주의 모습은 미개한 야만덩어리로 비쳐질 것이다. 이 시에서 화선지에 잘못 튀긴 먹물처럼 버성기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화자의 모습은 그런 시각의 간접화된 표현이다. 시의 전략은 문명이 만들어낸 그와 같은 추문을 뒤집는 데 있을 것이다.

사방이 트인 마당가에서 똥을 누는 손주놈의 거칠 것 없는 태도, 마치 놀이를 하듯이 ‘가래똥’을 받아먹는 누렁이의 모습(세상에, 똥꼬를 찰지게 핥다니!),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누렁이와 그 혓바닥을 턱으로 받으며 한몸이 되는 어린 손주와 누렁이…… 그 모든 정황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환하게 꽃을 피우는 산벚나무! 그렇다, 이것은 인간생활이 오래 잊고 있던 자연이 아닌가. 시에서 손주-누렁이-산벚꽃이 이루고 있는 관계를 눈여겨보라. 서로의 몸을 열고 들어가 그만큼 환해진 지평에서 자신을 꽃피우는 자연으로서의 삶, 그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의 비유의 폭과 의미를 한껏 확장해보거니와, 거기서 나는 인간과 자연, 노동과 놀이, 미와 추가 어떤 경계의 틀로도 나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위로서 각자가 분별되지도 않는 전혀 다른 세계를 꿈꾸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의 도입부에 제시되어 있는 “아들은 저 아래 터널 뚫는 공사장에서 죽고, 며늘아기는 보상금을 들고 집 나갔다 한다”는 가족사의 의미를 각별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근대의 욕망과 그 실현으로서 행해진 개발이 낳은 폭력적인 해체과정에 다름아닐 것이다. ‘터널-죽음’ ‘보상금-가출’이 갖는 주목할 만한 상징성이 그 서사의 의미를 한결 깊게 만들고 있다.

이제 나는 「비 갠 날」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시는 그의 시세계를 가장 명료하게 요약하고 있다. 나는 마지막 행의 ‘노란 장다리꽃’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지렁이 두 마리가 장다리 밑동에서

몸통 한쪽으로 서로 잇대고

근육운동을 한다

엉긴 데가

붉다

 

집게를 가진 검은 갑각류 두 마리가

이쪽 고추밭머리에서

지렁이 한마리의 양끝을 물고

줄다리기를 한다

가운데가 뚝 끊긴다

 

키 큰 장다리꽃 무리가 노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