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삶의 진실을 보는 몇가지 이견

김영하 『아랑은 왜』, 문학과지성사 2001

김연수 『꾿빠이, 이상』, 문학동네 2001

김인숙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문학동네 2001

이호철 『이산타령 친족타령』, 창작과비평사 2001

 

 

서영인­ 徐榮姻

문학평론가. 경북대 강사. 제7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 sinpodo12@hanmail.net

 

 

1.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거기에서 어떤 삶의 진실을 발견해내기를 기대한다. 무의미하게 반복되기 마련인 일상의 지루한 사건들이 소설적 맥락에서 재구성되고 그리하여 어느 순간 반짝 빛나는 삶의 의미가 그 소설 어디인가에 맺혀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소설읽기의 오랜 관습이고, 실제로 소설읽기의 재미와 감동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만만찮은 작업인데, 삶이란 언제나 소설보다 더 풍부하고 느닷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소설이 축조하는 진실은 때로 삶과 무관한 단지 ‘허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과 삶은 이 막막한 거리 때문에 서로를 회의하면서 또한 서로를 비추고 통찰하는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소설과 삶의 이 거리가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으로 고립될 때 소설과 삶은 함께 엄청난 속도로 파편화된다. 진실은 그 이면에 또다른 진실을 품고 있으며, 그래서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삶은 누구에게나 저마다 절박하여 아무에게도 더이상 절박한 삶은 없고 그래서 모두 무료한데도 서로 무관하다. 산다는 것은 이 무료함 속에서 느닷없이 비죽이 고개를 내미는 진실들 때문에 공포이며 엽기가 된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정체 모를 진실의 출몰에 식은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 이즈음의 소설읽기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어두운 극장에서 공포에 질려 악악 소리를 지르다 우르르 몰려나와 마주친 극장 앞의 환한 햇살 앞에서처럼 우리는 오히려 삶이 낯설다. 소설은 점점 삶과 떨어져 고립되고, 소설은 소설 내적인 두려움과 무료함 때문이 아니라 삶과의 고립과 거리 때문에 더 큰 공포가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청년 실업자 130만의 시대, 내일을 모르는 하릴없는, 피끓는 청춘들의 무료함과 불안함은 그것 자체가 섬뜩한 엽기가 아닌가.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삶과 고립된 소설 속에서 고립 그 자체를 즐길 것인가. 그리고 더 용감하게, 진실은 없다고 선언하며 진실에 애면글면하는 조바심을 한바탕 비웃어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여전히 소설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는 작업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그래야 한다면 이 갈래갈래 가닥지고 또 저마다 고립된 삶들 속에서 진실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걸까. 또는 고립된 삶속으로 파고들기보다 훌쩍 뛰어넘어 더 큰 틀을 찾아본다면 저마다의 진실이 맺고 있는 연관관계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최근 젊은 작가 김영하와 김연수가 ‘아랑전설’과 ‘이상(李箱)’이라는 다른 텍스트를 기반으로 『아랑은 왜』와 『꾿빠이, 이상』이라는 소설을 각각 내놓았다. 두 작가가 공히 진실찾기라는 추리소설적 틀을 활용하여 ‘진실은 없음’을 표방한 것은 우연의 일치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젊은 작가들에게 이제 ‘없는 진실’은 새로운 사실도 아니며 그다지 안타까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다른 편에 김인숙의 근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가 있고, 또 이호철의 『이산타령 친족타령』이 있다. 김인숙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삶의 진실을 찾아 헤매고 있고 잘 보이지 않는 진실 때문에 삶을 고통스럽고 힘겹게 유지한다. 그런데 이호철에 오면 삶의 진실이란 그렇게 애타게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들 삶 속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대를 망라한 ‘진실 없음’과 ‘당연히 있음’ 사이의 진폭은 크다. 이 진폭은 다양함을 의미할 수도 있고 단절과 거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다양함과 거리를 확인하고 검토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 소설의 내적 소통과 외적 현실성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 대신 ‘삶’을, ‘진리’ 대신 ‘진실’을 짐짓 내세우며 몸을 낮추고 보폭을 줄이는 이 모호하고 갑갑한 작업은 소설과 삶의 간극을 절감하며 더 촘촘하고 겸손하게 삶을 읽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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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영하(金英夏)의 『아랑은 왜』는 익히 알려진 아랑전설을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를 소설적 틀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재구성은 이미 종결된 사건에 개입하여 흩어져 존재하는 단서들을 통해 진상을 규명하는 추리소설의 틀을 빌려 유지된다. 작가는 아랑전설의 진상에 의문을 품은 의금부 낭관 김억균이라는 인물을 투입하여 억울하게 겁간당한 처녀의 원혼 달래기라는 원래의 아랑전설을 재구성한다.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허위를 밝혀나가”는 “근대적 의미의 탐정”(130면)이라 할 만한 김억균은 추리와 조사를 통해 아랑의 전설이 처녀 원혼 달래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적 추궁을 피하기 위한 아전들의 조작극임을 밝혀낸다. 그러나 김억균이 규명하는 진상은 명백한 진실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여기에서 숱한 장애물을 극복하고 드디어 진상을 찾아 완결된다는 추리소설의 플롯은 배반당한다. 저마다의 명분 때문에 저마다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인물들이 각각의 진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은 ‘아랑전설’을 토대로 추리소설을 한편 구성해보겠다고 표방하면서 곳곳에 단서를 미리 배치해놓고 갖가지 가능성들을 타진하며 다시 소설로 되돌아오는 서술자에 의해 통제되고 차단된다. 서술자는 “우리는 이 책의 끝까지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고 그것을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종의 퍼즐게임을 계속할” 뿐이며, “적어도 우리의 책 안에서 이야기의 종결은 없”(203면)음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래서 아랑전설이든 김억균의 추리든 단지 하나의 소설적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