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의 문화지도, 어떻게 달라지나

 

‘상상력’으로 열어가야 할 새로운 지평

90년대 한국사회의 성담론 성찰

 

 

이남희­ 李南姬

서울대 강사, 서양사. 『여성과사회』 편집위원. namhlee@yahoo.co.kr

 

 

1. 상상력의 소중함과 빈곤함

 

문화에 관한 여러 갈래의 정의를 읽던 중, “문화연구의 핵심어로서의 문화란 인간의 생존방식을 논의하는 단어이며, 특히 ‘유전자로 프로그램된 삶’이 아니라 ‘모여서 만들어가는 삶’에 대해 말하기 위해 고안된 단어이다. 문화란 결국 사회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내적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자, 그 외적 조건과 자신을 연결시키는 내적 성찰능력이며,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살고 있는 조건을 바꾸어가는 창조적 능력이다 (…) 문화연구는 한마디로 자신의 삶의 조건을 낯설게 바라보는 자기성찰적 훈련이다”(조혜정 「문화이론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정치적 언어’에서 정치적 언어의 정치학으로」, 『연세춘추』 1994. 2. 28)라는 진술, 특히 ‘자기의 삶의 조건을 낯설게 바라보는’이란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는 이것을 다른 말로 ‘상상력의 발휘’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어진 현실조건에서 자리바꿈을 해보는 것도 때로는 통쾌함과 반성의 재료가 되지만 그 지점을 넘어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힘을 갖는다. 우리 사회의 ‘성과 가족’ 문제를 성찰할 때 ‘상상력’이 갖는 소중함을 돌아보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지만 얘기의 출발은 일단 그 상상력의 빈곤함을 지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가만히 보면 우리 사회에서 몇사람이 채 읽지 않는 이론서보다 TV 드라마 등 대중문화를 통해 성과 가족에 대한 더 급진적인 주장이나 생각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다. “결혼한 세 부부 중 한 부부가 이혼. 한국의 가정들은 지금 위기에 봉착해 있다. 가정이란 굴레를 벗어 던지고 저마다 ‘나’의 욕망을 좇아 꿈틀거리고 있다”(MBC 「위기의 남자」 기획의도 http://www.imbc.com/ tv/drama/crisis/)는 현실진단 아래 남편과 아내가 각기 다른 상대를 만나는 내용을 다룬 드라마는 이제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꽤 도발적인 제목 아래, 결혼과 애인과의 동거를 양립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감독 유하는 “이 영화를 통해 결혼이란 화두를 공론화시키고 싶었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본 결혼제도에 대해 담론을 이끌어내고 싶다. 영화 속 이야기는 옆집에서 일어나는 실제상황이다. 즉 누구에게나 연희는 존재하는 것이다”(『씨네 21』 2002. 4. 23)라고 말한다. 훗날 어느 역사가가 이를 사료삼아 한국사회의 쎅슈얼리티를 연구한다면 어떻게 기술할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문제제기는 과격해도 결론은 ‘버킹검’일 수밖에 없는 대중문화의 속성 탓인지 이들이 펼치는 상상력은 한없이 빈약해 보인다. 「위기의 남자」의 기획의도 말미에는 “그러나, 방황의 계절을 거친 많은 이들은 다시금 가정의 울타리를 그리워하기 마련. 이 드라마는 인간의 마지막 안식처는 결국 ‘가정’임을 일깨워주고자 한다”고 안전핀을 달았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고 ‘결혼제도를 고민’하게 됐다는 한 지식인은 기껏 내놓는 대안이란 것이 이러했다.

 

성 소비의 자유와 다양성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차라리 지금의 결혼제도를 그대로 둔 채 공창제를 운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공창제에서 성적 쾌락의 일차생산자는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있다. 또 이 제도 아래서 성적 쾌락의 일차생산자가 지금의 사창가에서처럼 중간상인들에게 착취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고종석 「아저씨,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고 결혼제도를 고민하다」, 『씨네 21』 2002. 5. 10)

 

현실의 제도에 비판적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 이들로서는 다른 그 너머를 꿈꾸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에 비하면 얼마 전 TV의 ‘주말의 명화’ 시간을 통해 방영된 말린 고리스(Marleen Gorris) 감독의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 1995)은 가부장적 가족제도나 성관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이 어느 정도까지 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로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지난 몇해 동안 대학의 여성주의 모임이나 여성단체의 교육프로그램에서 토론교재로 즐겨 선택됐던 것인데 주말의 명화를 통해 안방에서 보게 됐다. 방송 담당자가 그 영화를 고른 이유가 감독이 ‘국민 영웅’ 히딩크와 같은 네덜란드 출신이라는 게 눈에 띄어서였는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탔기 때문인지, 그 주제의식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였는지, 그도저도 아닌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중파를 통해 그 영화가 방영된 것이 조금은 의외였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가족 혹은 성에 대해 펼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적 가능성을 한상 가득 차려낸, 좀처럼 맛볼 수 없던 영화다.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고향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살게 된 안토니아와 딸 다니엘, 손녀로 이어지는 여성 4대의 이야기가 큰 줄거리이다. ‘애들 엄마’가 되어달라는 홀아비 바스의 청혼에 ‘나는 아들이 필요없어요. 남편도 필요없어요’라고 분명히 말하고, 대신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 돕는 친구로, 주일에는 양쪽 아이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는 이웃으로, 원할 때는 애인으로 새로운 관계맺기를 해나가는 안토니아, 결혼이나 남편은 원치 않지만 아이를 갖고 싶어한 화가 다니엘, 수학과 음악에 몰두하고 연애나 모성에 집착하지 않는 천재 타입의 테레사, 이들 삼대 중 누구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혼자 사는 늙은 여자, 미혼모, 아비 없는 자식 등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나 고정 관념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 집에 모여드는 사람들, 정신지체자인 디디와 ‘얼빠진 입술’의 사랑, 같은 성(性)인 다니엘과 테레사 담임의 사랑, 죽음의 행복 대신 삶의 행복을 택해 파계한 보좌 신부와 애 딸린 레타의 사랑은 마을과 교회로부터는 배척당하지만, 평화롭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아름답다. 소위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이는 하나도 없지만 결핍의 그늘은 없다. 그 대척점에서는 대지주인 디디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오빠 피터가 강간을 저지르고 주임 신부가 위선적인 설교를 한다.

아무리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나라라고는 하지만, 네덜란드에도 이런 목가적인 풍경의 소수자를 위한 낙원 안토니아네는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감독이 줄곧 환상적이고 코믹한 풍으로 화면을 끌어간 것도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의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필자가 여전히 궁금한 것은 이렇게 기존 성관계와 가족질서를 몽땅 뒤집는, 잔잔하지만 ‘위협적인’ 영화가 공중파를 통해 방영될 정도로 우리 풍토가 달라졌는가, 그걸 본 시청자들은 어떤 감흥을 느꼈을까, 그리고 이번 시청 체험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가족을 해체·재구성하는 힘을 가진 담론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하긴 주말에 배를 방바닥에 붙이고 느긋하게 보는 외화와 토론거리를 생각해가며 세미나실에서 보는 영화는 다를 것이다. 가끔 TV에서 댄싱그룹이 리메이크해 부르는 민중가요 「사계」를 들을 때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가사는 낯설기만 하고 그들의 춤동작만 눈에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